세희는 무술 같은 것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딱 한 가지는 깨달았다. 자신을 납치하려고 했던 사내들도 보통 몸집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을 단번에 제압한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더구나 어제는 평소 가끔 생기는 편두통 때문에 하루 종일 인상이 절로 찌푸렸다. 그런데 이 남자가 자신의 관자놀이와 등 쪽 어딘가를 따끔하게 누르자 그 순간에 느꼈던 찌릿하는 기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번 생기면 보통 일주일은 가는 편두통이 싹 사라지고 없었다. 그깟 오토바이 배달부 주제에 무슨. 세희는 업무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서류에 그 녀석의 얼굴이 나타났다. 해외에서 디자인 공부도 했고, 남자도 만나봤지만 이런 터프한 매력의 남자는 처음이었다.
과거 중국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남자친구인 총총 그룹의 장남이 워낙 중국 영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본 장이모 감독의 무영자란 영화였다. 염문도 봤는데 그것도 시리즈로 재미가 있었다. 왠지 지금 생각해 보니 남자, 이미 세희는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정찬주라고 했지. 비서실에 물어보니 바로 답이 나왔다. 그 오토바이 배달점의 소장 말이 웃겼다고 들었다.
“찬주 말이죠. 아주 성실합니다. 잠도 하루 4시간인가 밖에 안 자고 배달을 해요. 제가 괜찮냐고 물으니 운기조식을 한다고 하던데, 제가 어디서 그 조식을 파냐고 물었더니 피식 웃기만 했어요.”
세희는 아직 남자가 완전히 좋은 건 아니었다. 자신과 살아온 과정이 너무 달랐다. 자신이 견고한 성 안에서 곱게 유리온실 같은 곳에서 자랐다면, 배달남은 거리를 떠도는 하이에나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이성으로 눌러질 거야. 충분히. 하지만 그것보다는 일단 화가 났다. 지금껏 상진그룹의 장녀인 그녀를 이런 식으로 대한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돈의 위력 앞에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래, 오르지 못할 나무라서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지. 뭐.’
그녀는 전신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매를 비춰봤다 탄탄한 몸매에 착 붙은 원피스는 마치 그녀의 피부의 일부 같았다.
일하면서 하루 종일 자꾸 그 빡빡머리의 지저분한 녀석이 자신을 구해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이 주는 수백만 원의 현찰만 받았어도, 그것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돈을 무슨 두루마리 휴지 보듯이 하다니. 참 나 원. 좋아 일단 내 존재를 알게 해 주겠어. 그다음에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차 버릴 거야.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찬주를 좀 괴롭힐 필요가 있었다. 옛말에 자주 봐야 정든다고 하지 않던가. 이웃사촌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도 다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좋아, 아주 자주 보는 상황을 한번 만들어주지.
세희는 일단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 무식한 남자, 평범한 유혹으로는 씨알도 안 먹힌다. 그래서 준비했다. 이름하여 '전담 배달지 지정 작전'.
찬주는 오늘 하루 종일 이상한 일을 겪고 있었다. 앱을 켜기만 하면 배달지가 전부 한 곳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닌가.
"나무아미타불, 이 근방에 대기근이라도 든 것인가. 왜 모두가 이 주소로만 주문을 하지?"
도착한 곳은 강남의 한 프라이빗 파티룸. 문을 열자마자 화려한 조명과 함께 '찬주 님 전용 배달 수령처'라는 현수막이 그를 반겼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최고급 실크 드레스를 입은 세희가 와인 잔 대신 단무지를 들고 서 있었다.
"어머, 찬주 씨. 또 만났네요? 이건 운명이죠?"
"시주, 운명이 아니라 시스템 조작 같습니다만. 앱 개발사 지분을 사셨습니까?"
"눈치 빠르긴. 자, 배달 왔으니 여기 앉아서 같이 먹어요. 이건 마라탕이 아니라 세계 3대 진미가 들어간 특별식이라고요."
세희는 찬주를 소파에 앉히기 위해 은근슬쩍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찬주는 소림사에서 익힌 금나술의 수법으로 매끄럽게 손을 흘려보내며 합장했다. 금나술은 관절을 가동범위 밖으로 꺾거나 근육과 힘줄을 비틀어서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여자를 상대로 지금은 역으로 미꾸라지처럼 팔을 빼는 데 적절히 사용했다.
"여인과의 동석은 아직 제 수행에 방해가 됩니다. 소승... 아니, 본인은 산에서 내려올 때 '여자는 호랑이다'라고 배웠습니다."
"호랑이? 내가? 이렇게 예쁜 호랑이 봤어요? 어흥!"
세희가 귀엽게(?) 위협하며 다가오자, 당황한 찬주는 본능적으로 경공(輕功)인 초상비(草上飛)를 펼쳤다. 말 그대로 풀위를 날아다니듯이 달리는 기술이었다. 거실 바닥을 딛지도 않고 미끄러지듯 창가로 이동한 찬주. 세희는 지지 않고 그를 쫓아가며 외쳤다.
"도망가지 마요! 당신이 배달하는 거 싫으면 내가 배달의민족 같은 앱 하나 차려줄게요. 이름은 '찬주의 민족'! 사장은 당신, 직원은 나 어때요?"
"시주, 자꾸 이러시면 제가 정신수양법(精神修養法)으로 시주의 기억을 잠시 봉인할 수도 있습니다."
"어머, 내 머릿속을 당신으로 꽉 채워주겠다고요? 대찬성!"
세희는 찬주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남자가 순식간에 창가로 이동했지만, 그녀는 원래 상대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하는 스타일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저, 오토바이 배달점의 소장의 말대로 소림사에서 수련하고 왔다는 이력서 내용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기에 무술을 좀 할 줄 아는구나 정도로 이해했다.
세희의 막무가내 구애에 천하의 초일류 고수 찬주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15년간 연마한 부동심(不動心)이 현대판 재벌 영애의 '직진 공격'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부동심은 외부의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인데. 찬주는 왜 소림의 고승들이 평생 수양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하아... 정 그러시다면 딱 하나, 제 제안을 들어주시면 저녁 공양 정도는 함께하겠습니다."
"뭐든요! 상진그룹 주식을 원해요? 아님 한강 뷰 아파트?"
"아니요. 내일부터 저와 함께 새벽 4시 108배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세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새벽 4시? 108배?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했다.
"좋아요! 108배가 아니라 1080배라도 할 테니까, 내일 새벽 4시 우리 집 앞으로 배달... 아니, 데리러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