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벗어나 적당한 거리가 떨어졌다고 판단되는 곳에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지하철 역 인근으로 지나다니는 행인도 많았다.
“아가씨, 여기 정도면 안전하겠네요.”
오토바이에서 멀쩡히 생긴 여자가 내리니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신기한 듯이 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희가 지갑에서 뭉태기로 5만원을 집었다. 혹시 몰라서 그녀는 현금을 많이 넣고 다녔다. 그래도 사람들이 볼까봐 주먹으로 꼭 쥐고 찬주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이거 받으세요.”
찬주가 돈을 말아쥔 세희의 손을 물끄럼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시주, 잔돈이 없으니 배달료 4천원만 받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중에서 5만원권 한장만 쏙 빼더만, 허리춤 전대에서 잔돈을 거슬려서 세희의 손에 건네주었다. 세희는 하도 황당해서 그냥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찬주의 몸놀림이 전광석화 같아서 말하는 것이 마치는 속도에 이미 손바닥에 잔돈이 들어와 있었다.
"저기...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성함이라도..."
찬주가 고개를 돌렸다. 헬멧 실드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너무나 깊고 맑아, 세희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15년 수련으로 다져진 찬주의 청정한 기운이 세희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성함은 됐고, 혹시 다음에 배달 시키시면 리뷰 써주실 수 있습니까?"
"...네? 리뷰요?"
"별 다섯 개 주시면 큰 힘이 됩니다. 그럼 이만."
찬주는 신법을 써서 순식간에 오토바이에 올라타더니 대로 너머로 사라졌다. 세희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다가, 자신의 명품 핸드백 대신 손에 쥐어준 나무젓가락 한 벌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그가 사자후를 내뱉기 전 소중하게 챙기던 그 젓가락이었다.
"뭐야, 저 남자...? 왜 이렇게 멋있어?"
세희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국내 최대 기업 상진그룹의 후계자로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두근거림이었다.
세희는 결심했다. 그 '마라탕 전사'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룹의 정보력을 동원하는 대신, 가장 확실하고 재벌다운(?) 방법을 쓰기로.
"오늘 점심은 전 직원 마라탕이다. 단, 반드시 '그 업체'를 통해서만 주문해."
한편, 찬주는 오늘따라 쏟아지는 주문에 정신이 없었다. 특히 목적지가 국내 최고층 빌딩인 상진그룹 본사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무아미타불, 대기업 사람들도 마라의 매운맛에 번뇌를 씻으려는 모양이군."
찬주가 로비에 들어서자 보안 요원들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가 헬멧을 벗고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자, 로비에 대기 중이던 세희가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다시 만났네요, 리뷰 만점의 주인공님? 여기서 근무하시는가 보네요."
세희는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채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찬주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세희는 '드디어 내 미모에 반했겠지?'라고 생각하며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찬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시주, 안색이 좋지 않군요. 지난번 납치 사건 때 역기가 몸에 정체된 모양입니다. 기혈을 뚫어드려야겠소."라고 말하면서 양 손에 들고 있던 마라탕을 내려놓으면서 바로 검지를 들어 마치 키보드에 대고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을 치듯이 오른손과 왼손으로 정확히 목과 어깨의 혈을 짚었다. 정면에 선 자세로 절대 나올 수 없는 각도의 몸놀림이었다.
"네? 기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찬주는 세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 뒤 견정혈을 가볍게 눌렀다. 소림 점혈법(點穴法)!
세희 옆에는 전담 보디가드도 있었지만, 워낙 찬주의 손이 빨라서 그저 보고만 있었다. 더구나 이미 자신이 전담하고 있는 회사의 비공식적인 2인자인 회장의 딸이 자신을 이미 저지하지 않았던가.
순간 세희의 몸이 찌릿하며 뜨거운 기운이 전신을 한 바퀴 돌았다. 만성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적 같은 경험이었다. 세희의 눈이 하트로 변하려는 찰나, 찬주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이제 몸이 가벼워졌을 겁니다. 자, 여기 마라탕 100그릇입니다. 배달료 40만 원은 선결제 되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잠깐만요! 돈은 필요 없으니까 나랑 저녁 먹어요. 이 빌딩 꼭대기 층에 제가 아는 식당이..."
"소승... 아니, 저는 육식을 멀리하고 도(道)를 닦는 중이라... 그리고 다음 콜이 강남역 파이브가이즈 앞이라 늦으면 안 됩니다. 성불하십시오!"
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목례를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세희는 텅 빈 로비에서 식어가는 마라탕 봉지를 내려다보면서 소리쳤다.
"저 남자 뭐야?! 점혈로 사람을 녹여놓고 파이브가이즈로 튀어?! 내가 거기 햄버거 다 사버릴 거야!" 그녀가 두 주먹을 쥐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외쳤지만, 옆에 선 보디가드들은 얘써 못들은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