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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아재 Nov 12. 2024

미묘한 사기 2

증권시장, 그 거대한 사기의 실체

“이사님, 이 업체 좀 위험해 보이던데, 심사 통과 시켜도 될까요?”

임 대리가 조심히 물었다. 


“뭐가 위험해? 어차피 자네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뭘 망설이나?”

김 이사는 임 대리를 올려다보았다. 


“자본잠식 상태가 심각해 보입니다. 이거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은데요.”

“저 방문 좀 닫고, 자네 여기 소파에 좀 앉아.” 김점백 이사의 손가락이 자신의 집무실 책상 바로 앞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에 3인용 소파 하나와 1인용 소파 두 개가 마주하고 있었다. 


김 이사는 임 대리가 들고 온 서류뭉치를 소파 테이블 위에 ‘탁’하고 빰을 때리듯이 내려놓고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김 이사의 얼굴은 뭐가 맘대로 안돼서 마뜩잖은 표정인지 다소 굳어 보였다.  

“그러니까, 기술특례 상장이잖아. 기술력은 있는데 성장하지 못하는 회사들을 도와주는 취지로 IPO(기업공개)를 하잖거잖아. 뭐가 문젠데?”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제가 지난주에 업체에 자본잠식 상태 해소 계획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자료가 어제 왔는데 아무리 봐도 월별 매출도 허위 같고, 완성된 계획도 실체가 없습니다.”

“임 대리, 자네 몇 년차야?”

“네?”

“몇 년 차냐고?”

“5년 차입니다.”

“자네 아직 대리인가.... 과장 달기 싫어?”

“...................”

김 이사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어제 만난 아가씨가 생각났다. 거나하게 얻어먹고 차 트렁크에는 아직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5만 원짜리로 꽉 찬 비타 500 박스가 2개나 있었다.


그가 접어 놓은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운데 숫자를 짚었다. 

“여기 봐봐, 매년 1,200억이고 내년도 2,500억 그리고 3년 후에는 5,000억 한다고 쓰여 있잖아.”

김 이사가 손가락을 짚어가면서 조목조목 따졌다. 

“그뿐이냐? 수주확정액만 보수적으로 따져도 연간 500억이야, 그럼 된 것 아니냐고?”

“제가 회사방문을 했을 땐 실체가 없었습니다.”

임 대리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물러서면 선의의 개미투자자들이 손해 볼 것이 눈에 선했다. 실제 코스닥 심사를 들어온 회사의 80~90%는 아직 상장을 해서는 안 될 회사들이었다. 이익도 급하게 조달을 한 것인지 상대 거래처가 불분명해 보이는 어설픈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회사가 잘 되어서 수익을 주주들과 나누겠다는 경우보다, 지금 운영하는 일이 어려워서 새로운 자금을 수혈받겠다는 의지로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실무 경력 5년이지만 충분히 이 업계의 돌아가는 생리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되고 있었다. 

“너, 지난 주 술자리는 왜 갔어?” 이사의 시선이 임 대리를 향했다. 


“그야, 이사님께서...”

“아니, 지금 주관 증권사에서도 기다리고 있고, 다 될 것처럼 말해서 다들 대기 중인데, 담당이 이런 마인드면 따라가지를 말았어야지.”

“....................”

“자네도 선물 받았어?”

“네?”

“자네... 비타 500 선물 받았냐고..... 물었어.” 이사는 천천히 물어왔다. 

“네, 조금 받았습니다.”


그 순간에 임 대리는 아, 선물이 사실은 김점백 이사의 아이디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비열한 선임이 깔아놓은 함정에 자신이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차를 가지고 가자고 한 것은 김 이사였다. 이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여의도에서 강남까지 그냥 택시를 이용해도 되고, 보통은 그런 일이 있으면 운전기사까지 있는 김 이사의 차를 타고 가면 되는 일인데. 어쩐지, 웃으면서 자신의 차를 가지고 가자고 하더라니.


발레에 차 키를 맡기고, 술을 인근에서 3차까지 마시고 차 키를 받아 든 것이 새벽 1시였다. 그때 왜 임 대리는 심사를 하고 있는 업체 직원이 차 키를 주는지 몰랐다. 

그가 귀에 대고 살짝 말했다.


“임 대리님, 트렁크에 선물 좀 넣어두었습니다. 나중에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맛있게'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팍 주어서 얘기했는지는 몰랐다. 대리기사가 도착해서 트렁크를 생각한 것은 그제 아침이었다. 트렁크를 열어서 보니 비타 500 박스였다. 그걸 한병 따려고 들었는데 무게가 비타 500 무게가 아니었다. 뭐지 하고 열어보니 5만 원권이 가득 들어있었다.


머릿속에서 하루는 고민을 했었다. 돌려줄까 하다가 회사일이 그날따라 바빠서 사실 거의 까먹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그냥 지난 터였다. 임 대리 바로 위에 직속상관이었던  윤혜정 과장이 같은 반대를 하다가 작년 말에  부산으로 좌천된 것은 직원들끼리 암암리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8천만 원. 

그 비타 500에 들어간 돈은 현금 8천만 원이었다.

세금 한 푼 안 내도 되고, 아무도 모르는 돈이다.

그걸 앞에 앉은 김점백 이사는 정확히 알고 있다. 

임 대리는 이미 심리싸움에서 졌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사는 자신이 가진 히든카드 2장이 뭔지 알고 있다. 사실 포커로 치면 상대가 무슨 패를 가지고 있는지 다 알고 치는 게임이었다. 서로 2장의 히든카드를 가지고 바닥에 깔린 3장으로 심리게임을 하는 포커.

이럴 땐 패를 내려야 한다.


“너 구속되고 싶어?”

“네?”

“너 그거 구속사유야. 그쪽에서 입만 뻥긋하면.”

구속이란 말에, 임 대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언론에서도 나오지만 이런 뇌물도 받은 지 일주일정도 지나서 돌려주면 그 진정성에 의심을 받는다. 자신도 그런 똥물에 빠져 버린 느낌이었다. 

“딴생각하지 말고, 믿고 가자고. 여기 회계법인에서 잘 검수했겠지. 설마 엉터리로 주관 들어온 것은 아닐 거잖아.”

확 자신을 한번 들었다가 메치고, 다시 그 손을 잡아주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보이지 않는 승부의 매트리스 위에 한판 패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승리자의 브이자를 만들면서 두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짚었다. 

임 대리의 시선이 김 이사가 짚은 손가락의 처음과 끝을 향했다. 이사가 짚은 대로 MKKK회사의 주관 S회계법인은 나름 업계에서 인지도가 있는 회사였다. 다들 여기서 회계감사들도 받고 하니까. 그 S회계법인이 주관사였다. 3년 전에도 IPO에 부실 회사를 승인해서 문제가 된 회사였다. 미국 같으면 문을 닫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무슨 백그라운드인지 그러고도 거의 금감원의 경고 정도 받고 끝이 났다. 

겨우 지도감독이라나. 그 S회계법인 대표의 친 형이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법무법인의 대표라고 했다는 후문만 들었다. 회계법인과 법무법인.... 어차피 그들의 세상이었다. 오래전에  어떤 고위공직자가 일반 대중을 향해서 개돼지라고 싸잡아서 비하하는 발언을 했었다.

그래서, 한동안 술자리에서 회자되곤 했는데, 막상 실제 실무에서 일을 해보니 개돼지는 높이 쳐 준 것이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버러지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 

임 대리는 할 말이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목표대로 할 사람이었고, 지금 단계에서 좌천되어서 부산으로 내려가면 과장도 아닌 만년 대리로 지낼 판이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하자니, 자신의 자리가 위험하고,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자니, 대중을 기만하는 것 같았다. 임 대리의 표정을 보면서 김 이사가 결정구를 던졌다. 

“이건 통과시키고 바로 너 과장 진급 가자. 임 대리 내가 책임지고 승진시켜 줄게.”

과장이란 말에 임 대리의 얼굴에 복합한 감정이 올라왔다. 아, 무슨 진급을 이런 식으로 시켜주냐. 하지만, 당장, 산후 우울증에 빠져있는 아내가 좋아할 터였다. 나이 서른에 입사해서 이제 삼십 대 중반인데 아직 대리를 달고 있으니, 처가에서도 걱정하고 있었다. 과장이 되면서 대우가 확 달라진다. 대리는 실무이지만 과장은 수석심사역이 되는 것이다. 과장이 되면 작지만 법인카드도 나온다. 월 100만 원 한도 내에서 거래처를 만나서 점심 식사도 살 수 있고, 출장 갈 때는 회사카드로 기름도 만땅 넣을 수 있다. 


‘휴...’ 

임대리가 한숨을 표시하지 않게 쉬었다. 


물론 앞에 앉은 김 이사는 자신보다 많은 돈을 받았을 것이다. 어제 참석한 사람들에게 쓴 돈만 해도 대략 10억은 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상장을 시키고 나면 눈먼 개미투자자들의 돈이 밀려들어온다. 그럼, 이 회사가 시가총액 1조로 매겨졌으니 이번에 발행되는 20%면 2천억이다. 


10억 투자에서 2천억의 돈이 회사의 통장에 꽂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사고팔 수 있는 나머지 회사주식을 감안하면 10억 투자로 1조의 자금을 쓸 수 있게 된다. 100배가 넘는 장사. 

세상에 이런 황금 장사가 어디 있던가. 하지만, 김 이사는 실적은 자신의 공이고, 실수는 직원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올려놓고 나중에 문제가 터지자 그걸 빌미 삼아서 윤 과장을 부산으로 좌천을 시켜버렸듯이. 어찌 보면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온 위기를 빌미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다니.  


임 대리는 김 이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허연 와이셔츠 위로 삐져나온 목살은 두툼했다. 번들거리는 이마의 기름이며 몇 가닥 남지 않은 이마엔 하도 영양분이 과다 공급되어서 오십 중반이 넘었는데도 주름도 별로 없다. 금테 안경은 계속해서 콧기름을 타고 내려와 또 코 등 끝자락에 겨우 붙어 있었다.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여기서 막는다고 과연 이 일이 막아지기는 하는 것일까. 거대한 흑막의 쓰나미가 오는데 자신은 한낱 모래주머니 몇 개로 구멍을 막겠다고 덤비는 격 같았다. 


좋소, 당신이 이겼소.  

“하겠습니다. 심사통과요.” 임 대리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정작 자신의 말에 설득당한 임 대리가 하겠다는 답을 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김 이사였다. 실무라인에서 하겠다는 말이 주는 파장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당황한 목소리가 나온 것은 아마도 임 대리가 더 버티면 다음의 강수를 준비해 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자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이사는 두툼한 20년 재직기념 금반지를 낀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임 대리가 양손으로 그 손을 악수하듯이 잡았다. 


“후후, 잘 생각했어. 자네는 오늘부터 내 라인이야, 알겠어?” 

그의 눈빛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네, 감사합니다. 이사님.”

임 대리가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이사가 다시 불러 세웠다.

“임 대리, 이거 가지고 가야지?”

그의 손에 방금 임대리가 들고 온 보고서가 있었다. 제일 앞장 표면에 붉은색으로 거절사유라고 적힌 겉장의 보고서였다. 자기에 앉아서 임 대리는 리포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력 버튼을 눌렀다. 프린터기를 타고 나온 겉장은 이번엔 색깔부터 푸른색으로 조금 전 리포트와는 달랐다. 


< 세계적인 수요를 가지고 향후 21세기를 선도할 반도체 장비 기업 00의 기술특례 심사의 이유 >


새로운 리포트를 들고 김 이사의 방을 노크했다. 표지만 보고도 김 이사는 만면에 미소를 뗬다. 그리고, 놓고 나가라고 하면서 그 사이에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쪽에서 약속대로....”

이사의 방문을 살짝 닫았다. 더는 듣고 싶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듣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길이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그런 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길. 

금요일 오후에 자료를 제출했는데 벌써 그걸 가지고 월요일 언론에 하반기 상장리스트에 해당 업체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업무처리가 정말 빠른 것 같았다. 


임 대리의 최종 승인 보고서를 기반으로 각 증권사에 수요예측이 들어갔다. 공모주 청약 정보는 각 플랫폼에도 올라갔고, 각 증권사에도 뿌려졌다. 반도체 장비회사인 MKKK는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이미 가계약이 잡혔다는 각종 언론사를 주축으로 홍보성 보도자료들로 올라왔다. 

최초 공모주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은 폭발적이었다. 반도체 장비에 대해서 그들이 뭘 알기는 알고 투자를 하는 것일까. 그냥 옆에서 누가 좋다고 하면 양잿물이라도 불사의 영약으로 마실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공모주 경쟁률은 무려 2천대 1.


“우하하하, 그래 축하해.”

“오늘은 내가 한잔 살게.”

김 이사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가 스무 명 남짓한 직속 심사역들을 데리고 1차는 법인카드로 2차는 자신이 개인으로 사겠다고 강남으로 불렀다. 임 대리는 평소에는 저녁을 잘 먹지 않았다. 아내가 이제 막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에 정신이 없었고, 밤새 얘가 울어대는 탓에 집에 오면 한 시간마다 깨는 아이 분유를 타 먹이느라 도저히 밥 맛이 나질 않았다. 


안 먹던 회와 고급술들이 배를 불편하게 했다. 가뜩이나 잘 마시지도 못하는 독한 술을 마시니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화장실에 갔다. 제일 끝 쪽 칸에 들어갔는데, 핸드폰을 쳐다보고 들어가느라 문 입구 붙은 ‘고장’이라고 적힌 종이를 건성으로만 보고 들어갔다.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니 물은 잘 내려갔다. 어랴, 고장이 아니네.

문을 닫으려고 보니 문이 고장이었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다시 나갈 까 생각했지만 고장이란 종이 때문에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바지를 내린 상태라 나가기도 귀찮아서 그냥 용변을 보고 퍼뜩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시원하게 볼 일을 봤다. 

이제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통화를 하면서 화장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 여긴 아무도 없어. 짧게만 말해.”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남자화장실에 들어와서 양변기 칸 세 개의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탁한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했다. 김점백 이사였다.

“주당 10만 원이니까, 20배네 뭐. 지금 나한테 20억 주고 유세하는 거야? 내 돈 1억 원은 돌려줘야지?” 

그의 목소리가 낮았지만, 뚜렷이 들렸다. 그의 통화는 이어졌다. 


“계산은 바로 하자고, 이건 내가 운이 좋아서 받은 거고, 주금 납입금 1억 원은 사실 형식이잖아.”

누가 봐도, 상장한 회사의 주식을 샀다는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런 주식을 사는 것은 근무규정에 중대한 위반이다.  

녹음 버튼을 누를까 하다가,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기가 귀찮았다. 

그럼 그렇지, 김 이사가 순순히 승인을 해 주더라.

막상 예상만 하는 것과 막상 눈앞에서 현실이 벌어지는 것과의 느낌은 가짜 돈과 진짜 돈의 차이만큼 크다.  

“허허, 이 회장님, 돈 벌리더니 너무 세게 나오시는데...”

김 이사의 말이 이어졌다. 


저런 놈인 줄 예상은 했지만, 저 정도면 양아치와 뭐가 다를까. 소속이 회사에서 임원이고 이사라는 직책이지, 만약 동네 백수가 저런 말을 한다면 완전 깡패일터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가벼운 위협도 마다하지 하는 사람. 저런 사람이 굳건하게 사회라는 울타리리엔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냉혹한 현실일지도 몰랐다. 그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바뀌었다. 

상대의 태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음조.


“아? 뭐라고요? 1억 원은 다시 보내겠다고요. 허허 알겠습니다. 네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네 서로 윈윈이죠. 네네 회장님 선물도 감사합니다. 오늘 술값도요? 어이쿠 말씀하시자마자 바로 메시지가 뜨네요. 네네 1억 도 받았고 보내주신 오늘 술값도 들어왔네요. 무슨 억 단위 돈을 이렇게 무슨 커피값 보내듯이 빨리 보내십니니까. 아, 물론 이렇게 행동이 빠르시니 그 위치까지 올라가셨겠지만요. 존경하는 회장님, 네네 감사합니다. 네네 감사합니다.”


저런 건 배워야 하는 것일까. 배척해야 하는 것일까.

짧은 통화 안에 기승전결이 다 들어있다. 

원하는 말을 하고, 위기를 고조시키고, 돈을 다시 받아내고.

오늘 술값도 결국 저 사람이 사는구나. 허 참 나.  


당연히 통화의 상대방은 막 상장이 된 회사의 오너일터였다. 대강의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냥 현금으로 뇌물을 주고받기는 그러니, 김 이사가 회사의 주식을 사게 해 주었고, 계획대로 그 주식은 20배나 오른 것이다. 1억을 넣고 20억으로 뻥튀기를 했으니 얼마나 맛있을까. 그 반만 있어도 인생이 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20억이 되고 보니, 주식을 산다고 넣은 1억의 자금이 아까운 것이었다. 참, 이런 사람의 특징은 ‘조금만’ 전법의 달인들이다. 사막의 텐트에서 주인이 자려고 하는데 낙타가 와서 하는 말이 있다. 주인님 밖의 기온이 추우니 머리 조금만 넣을게요. 그리고 상대의 반응을 본다. 괜찮다 싶으면 또 어깨까지만 넣을게요. 그렇게 하다가 결국에는 꼬리까지 넣고는 텐트의 주인을 내쫓는다는 우화가 있다. 


화장실에서 생각하니 우스웠다. 회사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있지만 뒤로는 호박씨를 잘 까서 말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중에 잘 풀리지 않을 거야. 하늘에서 알아서 벌을 주실 거야. 착한 나는 복을 받고, 뇌물 받고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장본인들은 큰 벌을 받을 거야. 


밖에서 물을 틀고 손을 씻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사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임대리는 화장실에서 조심스럽게 나올 수가 있었다. 

“다들 잘 먹었지?”

계산대 옆에서 양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이사님이 나오는 모습을 봤다. 

“뭐 하러 여기 서 있어.....”

그의 손이 지갑으로 갔고, 한 장의 카드를 꺼냈다. 그건 내가 결제할 때 가끔 봐서 잘 아는 S카드사의 흰색 개인카드다. 


오, 웬일이야,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네.

하긴 자신이 오늘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법인 카드는 파란색이다. 카드 왼쪽구석에 법인카드라고 적혀 있다. 

그래도 엄밀히 따지면 그가 아니고 업체에서 산 것이다. 이미 김 이사는 그 돈을 받았다. 

“아, 잠시만요.” 

김 이사가 막 결제단말기에 꽂으려는 식당 주인을 제지했다. 

“이걸로 해 주세요.”

그가 파란색 카드를 꺼냈다. 


임 대리는 최소한의 기대도 하지 않기로 했다. 기대를 한다는 것은 그나마의 정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이후로는 업무도 최소한의 것들만 티 나지 않게 처리했다. 이사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서 후임을 시키거나 새로 배정된 선임을 시켰다. 그런 눈치를 채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사도 딱히 따로 임 대리를 부르거나 하진 않았다. 이미 배송이 완료된 종이박스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다. 어차피 임 대리 말고도 택배상자를 배달해 줄 자원자들은 회사 내에서 차고 넘친다. 어쨌든 임 대리는 상장이 되고, 여기저기서 축하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쨌든 미래는 폭포의 끝을 향하고 있지만 그들이 볼 때 그는 최소 강에 큰 범선을 띄웠으니까. 그리고 3개월 후에 승진발령을 받았다. 


수석심사역, 과장 승진대상자

임형석 과장.


남들도 다 이렇게 승진하지는 않을 텐데. 서류 만들고, 야근하고, 땀 흘리고, 노력하고 그렇게 올라올 텐데. 왠지 치열하게 노력했던 자신의 지난 5년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2년이 지나자 김점백 이사는 다른 곳의 사장 자리로 추천이 되어서 소위 ‘영전’을 했다. 

정치권과 아주 유대관계가 좋다는 것이 하나의 추천 이유였고, 업무능력이 탁월하다는 안 밖의 하마평도 한몫을 했다. 


임 과장은 수석심사역에서 다른 자리로 순환 보직에 들어갔다. 보통의 경우 심사역에서만 있다가 벤처캐피털이라고 불리는 VC 쪽으로도 많이 가지만, 제법 큰 규모의 전담 상장의 실무자인 그의 이런 새로운 인사는 약간 의외였다. 


총무과는 큰 기업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곳이었다. 회사의 인프라를 책임지고, 전산망 교체 같은 큰 작업이 일어나면 전 직원들이 날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큰 작업은 별로 없다. 자리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자리를 잡고 나면 회사 내의 공무원과 같은 위치를 보장받는 곳이 총무과다. 더구나 실무 대리는 힘들지만 과장급은 이제 초급 간부진이다. 

자신의 위로는 부장 한 명이 있을 뿐이다. 부장은 실제 업무보다는 윗선에 라인을 대어 임원을 따보려는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다. 


“야, 요즘에 회사 다닐 맛 난다. “


대학동창들 모임에 나가면 요즘 그가 하는 말이었다. 그전 부서에 있을 때는 기한에 맞춰서 보고서를 올리거나 올라오는 상장 희망 업체들을 체크하느라 날밤을 새는 날이 많았지만, 지금 부서는 웬만해서는 나인투파이브다. 오전 정시 출근해서 6시 정시 퇴근이 기본이다. 


오전 8시. 

출근해서 회사 탕비실에 들어온 최신식 커피머신에 컵을 대고 에티오피아 원두가 내는 향내를 맡으면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뽑았다. 그는 아침 일찍 맞이하는 이 한산하고 조용함이 너무 좋았다. 회의실에서는 여의도의 한산한 가로수들이 줄지어 보인다. 아직 사람들이 출근하려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그는 신문을 듣고 회의실로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부서 회의실에 공용으로 온 신문을 읽었다. 


갓 볶아낸 원두에서 나오는 쌉쌉한 맛 끝에 그가 추가한 설탕의 단맛이 섞어서 올라왔다. 

커피를 마시면서 느끼는 한가로움이 너무 좋았다. 

어떤 맛이든지 추가하면 된다. 

그게 인생이었다. 


일간지를 읽고, 경제지로 넘어갔다. 

첫 면에는 한 업체의 부도소식이 대문짝만 하게 크게 실려 있었다. 

회사 정문에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피켓을 들고 있는 사진도 컬러풀하게 나와 있다.  

MKKK 반도체 장비업체.


그곳이 화려하게 상장 폐지 및 최종 부도처리되었다는 기사였다. 

커피에 손이 갔다.    


갑자기 커피맛이 유난히 쓰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설탕을 한 스푼 더 넣을 것 그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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