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어떤 것에 대해 느낀다. 그 느낌에 대해 표현하고 언어로 구사하여 소통하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미치도록 힘들었던 어떤 순간에 대해서, 엄청난 환희의 경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할 때 우리는 나의 경험의 타임라인에서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가장 잘 설명할 어떤 에피소드를 끄집어 올린다. 내가 가진 언어의 사전을 뒤져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단어를 찾는다. 가끔은 그게 잘 안되고, 언어가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고 느낄 때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소통하는 방법에 언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밀도 높은 이야기를 전달할 때 쓰이는 가장 흔한 수단일 뿐. 그림도 있고, 몸짓도 있고, 음악도 있고, 사실 찾아보면 많다. 영화감독은 자신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을 위해 시퀀스의 구성, 카메라의 구도, 화면의 비율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자신의 세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방법을 찾아가게 되는데, 오늘 봤던 전시의 예술가는 색채가 그 도구였다.
팜플렛에 크루즈 디에즈는 사람의 눈이 색을 인지하는 원리를 이용한 작품으로 현대 미술에 혁신을 가져온 작가로, 예술 속 색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하며 지각의 범위를 확장시켰으며 스스로를 ‘과학자의 학문을 적용하는 예술가’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같이 간 선배의 말처럼 대학시절 열성적으로 지각심리학을 강의하던 교수님이 생각나는 평면 작품들이 걸려있다. 각각의 선들은 처음, 중간, 끝의 굵기가 서로 다르고, 화폭에 펼쳐져 있는 각도나 색깔도 다르다. 정쌤은 이 작품을 보고 뭐라고 얘기할지 잠시 생각해본다.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야 너희 리터럴 인히비션 가쪽억제 기억하지? 아 왜 내가 수업시간에 마하밴드랑 헤르만격자 보여줬었잖아. 우리 눈의 망막이 빛을 받아들이면 그 안의 시신경들한테 가닿는데 그게 연결되어 있어서 한쪽이 막 활성화되면 그 옆에 애들이 억제신호를 받고…” 하지만 난 상상 속의 교수님이 하시는 말을 거부한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이렇게나 황홀하고 행복한데! 교수님 이따 전시 끝나고 얘기하면 안될까요? 그런 신경학적 설명들 정말 재밌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설명이 제가 느끼는 감정들과 온도가 너무 다르단 말예요.
들어가자마자 재생되고 있는 영상 속에서 작가는 말한다. “색은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있다.” 빛의 물리적 속성-파동인가 입자인가-을 논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작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색에 대한 관점을 전하는 것인데, 또 다른 영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붓으로 색상을 적용한 영원한 캔버스에서 벗어난 새로운 담론을 말입니다.” 이래서 예술가다. 그 현상을 발생하는 원인을 해석하는 과학자가 아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는. 너무 아름다워서 질투가 난다. 붙잡아 놓고 몇시간은 같이 대화하고 싶은데, 몇 년 전에 돌아가셨네…
나는 이런 전시가 좋다. 무엇보다 직관적이라서 배경지식 없이 그냥 가서 본다고 해도 전시를 감상하며 희열을 느끼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 이렇게 문을 열어주면 더 궁금해져서 내가 이걸 잘 해석해서 먹어치워야겠다는 욕구가 생기는데… 일종의 에피타이저 같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