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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선 긋기

아가씨(2016), 나를 찾아줘(2014), 현대사상 입문(2023)

by Ashley

나를 구성하는 요소와 내가 세상과 맺었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든 송두리째 변화하는 것을 경험해본 적 있는가? 들뢰즈는 존재의 탈구축을 심오하게 다룬 철학자이다. 그는 모든 사물은 상이한 상태로 '되는' 도중에 있다고 했다. 세계는 다방향의 관계성에 열려있고, 변동하고 있으며, 나의 마음 혹은 신체를 이러한 변동 속에 있는 가고정의 것으로 파악한다. 우리는 세계를 경험할때 'A는 A다(예: 저 사람은 못됐다)', 'B는 B다(예: 저 사람은 착하다)', 'A는 B가 아니다(예: 저 못된 사람은 착하지 않다)'처럼 독립적인 것이 현동적(actual)으로 존재한다고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A가 B가 되는, 구별을 횡단하며 새로운 관계성을 발견하는 잠재적(virtual)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듯 동일과 대립을 넘어 보편적인 접속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것을 '존재의 탈구축'이라고 하며 하나의 구심적인 전체성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관계를 도주선을 긋는 것으로 표현했다. 오늘 나의 존재는 어떤 도주선을 긋고 있을까.


<아가씨>에서 히데코가 들판을 질주하다가 만난 담을 넘지 못했을 때, 숙희가 가방으로 단을 만들어 이를 밟고 넘어가는 장면을 알 것이다. 등장인물의 변화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씬이다. 히데코는 무력한 인형의 모습을 탈피하여 세상을 향해 뛰쳐나가고, 숙희는 이득의 수단으로 보던 히데코를 자신이 키웠던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하며 아낀다. 변화는 어디에서 왔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사람은 생각보다 관성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익숙한 것을 선호한다. 스스로 내렸던 나에 대한 정의와 내 생의 역사가, 나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모습과 그들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바뀌는 것은 굉장한 파급력을 가져온다. 설사 그것이 나에게 장기적으로 좋은 변화라고 할지라도 생각보다 그렇게 송두리채 변화하는 것을 달갑지 않을 수 있다. 그건 결국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을, 내가 한 사람 혹은 이 세상 전체와 맺고 있었던 관계방식과 영영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이렇게 바뀌어도 나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으려나 싶을정도로. 변화의 계기에 환경적 사건과 개인의 선택 중 어떤 것의 비중이 큰가 묻는다면 나는 환경적 사건에 더 무게를 싣고 싶다. 관성으로 움직이는 세계에서 내가 선택하는 사건들 역시 원래 나의 세상이 띄는 색깔로 물들어 있을테지만 다른 주체의 물결이 합류될 때 새로운 색깔이 흘러들어올 수 있을테니. 다만 그런 다른 물결을 허용하는 것도, 어느 순간 새로운 색깔이 더해졌음을 지각하는 것 역시 나의 몫이며,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다행인 것은 어떤 사건이 나타나 흔들어 깨운 후의 변화는 극적인 것이라기보다 서서히 찾아온다는 것이다. 만약 변화가 일어나길 원한다면, 지금 내 세상의 온도와 느낌 전부가 떠나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 같다면 변화한 후의 세상에서 존재하면 좋을 구성요소를 하나씩 찾아 관계 맺어두는 것도 방법이다. 변화가 항상 명시적으로 지각하며 바쁜 마음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고난의 길은 아니다. 아주 서서히 찾아와서 시간이 흐른 후에서나 아, 내가 변했구나 알아차릴 정도로 스며드는 종류의 것이기도 하니까. 그저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을 잊지 않는다면. 내가 원했던 느낌이 점차 도래하는 것에만 주목한다면.


<나를 찾아줘>에서 에이미를 보자.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부모님 밑에서 살았다. 모두가 어메이징 에이미를 알지만 정작 그녀는 그를 모른다. 부모가 만들고 세상이 기대한 상에 완벽히 도달했다고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혼 후 에이미는 모든 것이 낭만적이고 완벽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변해가는 결혼생활을 본다. 그녀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닉의 바람이었다. 에이미는 닉을 자신을 살해한 살인자로 꾸미기 위한 계획에 착수한다. 에이미가 사라진 후 닉은 의심을 해명하기 위해 TV에 나와 그래도 단 하나, 에이미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고 말한다. 에이미는 돌아온다. 왜 돌아왔을까? 모든 것에 도주선이 있다면, 그녀는 어떤 도주선을 긋고 있는 중일까.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가 변했다. 이제는 내가 각본을 짠다. 그 각본을 추진하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나다. 나를 옭아맸던 많은 상-완벽한 성장 서사가 있는 딸, 남편을 의심하지 않는 쿨하고 아름다운 아내-을 상대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나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산다. 그 누구보다도 욕망에 충실하게. 내가 정한 나의 이상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돌아온 에이미는 그런 모습을 숨기지도 않고 오히려 닉을 협박하며 어렵게 찾은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남편의 모습을 요구한다. 찾아달라고 했던 나는 이런 당찬 모습이었구나. 사실 에이미 같은 유형이 곁에 있으면 무서운 건 둘째치고 굉장히 피곤하다. 내가 만약 닉이라면 죽을 각오를 무릅쓰고(사실 너무 화나서 그런 건 신경도 못쓸지도 모른다) 너의 이상향을 왜 내게 강요하냐고 말하며 대판 싸웠을거다. 하지만 닉이 어떤 사람인가? 에이미는 닉이 내 각본에 맞춰 살아줄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고 돌아온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으며 닉에게 그때 TV에서 보여줬던 바로 그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 도주선을 긋는 것은 닉의 몫이다.


상담과 임상장면에서는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의 어려움을 파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쓴다. 심리 검사를 쓸 수도 있고, 어쩌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 놓였는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다만 더 중요한 것은 도주선을 긋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것이 어려움에 대처하는 다른 방법들과 상담을 구분해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나는 A가 A고, B는 B고, A는 B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것들이 이렇게나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동시에 곳곳에서 두절될 수 있구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됨과 동시에 이렇게나 모든 것이 무관할 수 있구나. 이런 관계 속에서 나는 생성변화하고 있구나. 모든 것은 '되는' 도중이기에, 어떤 것도 궁극적인 완성형이 아닌 과정의 지점 위에 서있구나. 도주선의 개념을 가져온다면 이 위에 또다른 도주선을 긋는 것도 가능하다. 내담자만 이런 도주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상담자도 긋는다. 내담자에 대한 정의, 상담의 목표, 그 모든 것들이 가고정, 준안정상태이다. 당신은 특정단어로만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상담은 어떻게 변해야만 하는 과정이 아니다. 사실 가장 중요했고 어쩌면 당신이 찾던 것은 당신에게 맞춰 반응하며 변화하는 세상을 보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계속 당신에게 공명하는 이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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