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9> 발터 벤야민
나의 요즘 밥 친구는 흑백요리사 2다. 오늘도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게 많이 나올까 기대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켰다. 근데 어이없게도 좀 울었다.
명시적으로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실존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은 모두 인생에서 느끼고 싶은 순간이나 찾고 싶은 것이 있어서 산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그게 뭘지 고민하는 부류에 속한다. 흑백요리사에 나온 셰프들은 각자 자신이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뭔가가 있는 사람이다. 글쟁이들이 글로, 그림쟁이들이 그림으로 하는 것처럼. 거기에서 요리는 통상적인 의미를 넘어 다른 무언가가 된다. 나의 고유성을, 현존성을 알아봐주길. 몇몇 셰프들은 '그래, 너 거기 있구나. 이런거 하고 있었구나'라는 얘기를 듣고 싶었다고 했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흘러가는 그의 삶의 원본성을 알아보는 말이다. 나의 역사가 층층이 쌓여 만들어지고 표현되어 복제할 수 없는 세계. 필연적으로 통합되어 맥락속에서 이해되고 그 전체 맥락 속에서 갖게 되는 아우라. 벤야민은 아우라란 공간과 시간에 의해 짜여있는 불가사의한 직물이며, 인간이 지금-여기에 있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고 했다. 인격의 아우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구한 역사 속에서 내가 속한 세상의 틈바구니에 들어가려고 부서지고 깎여진, 울퉁불퉁하지만 단 하나 뿐인 모양을 가진 나의 신념. 그 신념을 가지고 행하는 것들은 나의 아우라를 구성한다.
사람에게 아우라를 적용하면 재밌는 지점들이 많다. 벤야민은 회화나 연극무대와 영화가 다른 지점으로, 영화는 여러 부분들로 잘게 쪼개어진 영상을 새로운 법칙에 따라 결합하는 것이며, 고도의 분리능력 때문에 보다 큰 분석 가능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이 부분에서 나는 상담실 안에서 개인의 삶의 부분을 가지고 와서 얘기하는 내담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현존하며, 고유하고, 아우라가 상실될 다른 조건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말하는 그 내러티브 안에서는 분명 회화나 연극무대의 방식보다는 영화의 촬영기법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기술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와 같이, '전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전면에 드러내'며,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필연성들에 대한 통찰을 증대'시킨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정말 영화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우라가 붕괴된다고 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