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백신을 맞아야 했고, 백신 휴가 덕분에 4일이라는 휴가 같은 휴무가 생겼다. "여행을 갈까?" 생각하다가 혹시 모를 백신 후유증을 생각해 일단 아무 일정을 잡지 않았다. 백신을 맞고 하루는 피곤함과 미열이 올라왔고, 다음날 비교적 괜찮은 컨디션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가까운 바다라도 보고 싶었다. 유난히 시린 겨울의 바다를 상상했다. 차갑다 못해 화가 난 바람은 우리를 향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보고 싶은 바다였다. 이사를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주 다녀왔던 곳, 이사를 오고 나서 운전을 했지만 쉽게 가지 못했던 곳이 그리웠다
누군가와 함께 출발하는 일정이라면 "좋아, 가보자!"라며 씩씩하게 출발할 텐데 혼자 움직이려고 하니 가는 길이 너무 멀지는 않을지, 일몰을 보지 못하지는 않을지, 너무 늦게 출발하는 게 아닌지 - 걱정한다고 달라지지 않는 걱정들을 하며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마음은 온갖 걱정거리를 가져와 내 발목을 붙잡기도 한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걱정의 스위치를 강제로 꺼버렸다
" 좋아, 나를 위한 드라이브인걸! 일단 가보자!"
씩씩하게 외치곤 시동을 걸고 1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바다에 왔다. 유난히도 화가 난 바람은 사진 한 장 찍기 힘들 정도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파란 하늘에 뜬 달과 갯벌에 반짝이는 윤슬은 참 아름답다. 제주를 닮은 듯 일렁이는 억새 또한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을 추는 걸 넘어서서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하는 억새는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그저 시린 겨울의 풍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그 누구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
누군가와 함께 와도 좋을 겨울 바다를 혼자 왔다. 코끝이 시려오고 손은 얼어 버렸다. 혼자 운전을 하는 동안 외로움은 잠시 멀어졌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옆 사람을 신경 써서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고, 길을 잠시 헤매도 괜찮았다. 그저 나를 위한 시간을 위해 바다로 향하고 있는 내가 대견했다. '내가 혼자 바다에 갈 수 있다니! 대단한걸!' 어쩌면 누군가에게 바다를 보여 주기 운전하는 일에는 씩씩하면서 나를 위해 운전을 하려니 무언가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나에게 미안해졌다
늘 그랬듯 나는 타인에게는 좋은 사람이었고,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지 못했던 날들이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타인보다 나를 더 우선순위에 두어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나를 위한 마음보다 타인을 위한 마음을 먼저 헤아리려고 했던 것 같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려 할수록 서운하거나 상처를 받는 일들이 많아졌다. 어떤 이는 내 호의를 당연시 여기기도 했고, 어떤 이는 나의 호의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저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이 어쩌면 나를 더 아프게 하는 일들이 되어 버렸다
몇 년 전, 하던 일이 잘되지 않아 꽁꽁 숨어 버리고 싶었던 시간이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려워졌던 시기였고, 누군가를 만나도 주눅 들어 있었다. 그저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나는 제주로 떠났고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누군가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온전한 내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꽁꽁 숨어 있을 때도 나의 안부를 물어 주는 이들이 있었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내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들이었다. 내 마음은 꽁꽁 얼어 버려 그들을 안아 줄 수 없는데도 그들은 내 마음을 자주 들여다 봐주었고 있는 그대로의 얼어 있는 나를 인정해주었다.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끝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다시 한번 살아보겠다고 용기를 낸 것도 모두 다정한 그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바다를 닮아 있었다
주변이 꽁꽁 얼어 버린다고 해도 그들의 다정한 마음은 얼지 않는 바다를 닮아 있었다
여전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건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바다 같은 사람들 덕분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홀로 떠나 왔지만 그들의 빈자리가 느껴지기보다 그들이 그저 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