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림다운 계절, 고슴도치의 스물아홉 기록
아림다운 스물아홉 일기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답답한 마음을 비워내고 싶을 때 자주 바다를 찾곤 했다. 대학교를 다닐 때는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가 비교적 쉬워 자주 떠나곤 했지만 하나둘씩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함께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서로 회사의 상황을 보며 눈치 게임하듯 휴무와 연차를 맞춰야만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여행은 몇 달 전부터 계획되어야 했고, 회사 상황에 따라 여행이 취소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을 어쩔 수 없이 취소해야 한다며 미안해하는 친구에게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뭐 네 탓도 아닌걸' 이라며 애써 쿨한 척 이야기해보지만, 함께 떠나기로 한 여행이 취소되면 꼭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허전한 기분이 들었고 항상 허전함을 무언가로 채울 수 있을까 생각했던 날들이 점점 더 늘어갔다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에 익숙했던 날들, 7년 전 처음으로 혼자 배낭을 메고 제주도행 티켓을 끊었다. '혼자 떠나는 첫 여행' 상상만으로도 설레었고, 걱정스러웠지만 내가 꼭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부산 바다의 흐린 모습을 보다가 문득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제주도로 출발했던 스물두 살의 나, 처음으로 혼자 배낭을 메고 떠났던 기억은 선명하다
나의 첫 나 홀로 여행은 외로웠고, 당황스러운 순간도 많았고, 행복했던 순간들도 참 많았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SNS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모든 걸 검색에 의지해야만 했다. 시내에서만 버스를 타봤던 나는, 제주의 버스 배차간격을 전혀 몰라 한 시간 넘게 버스를 기다렸고 - 택시를 부르는 어플이 없었던 때라 무더운 여름에 배낭을 메고 3KM를 무작정 걷기도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애써 밝은 척 웃으며 저녁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잠시 스쳐가는 여행자에게 건네는 따스한 마음들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고이 접어 담아두었던 수많은 마음들
함께 떠나는 여행도 너무 좋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은 수많은 마음들을 마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어느덧 칠 년이 지나 스물아홉이 된 나는 여전히 혼자 배낭을 메고 자주 떠난다. 배낭을 메고 떠나 숙소에서,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시간은 나를 조금 더 바다처럼 넓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오랜 친구들과의 시간도 늘 소중하지만 -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시간은 또 다른 시간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처음 마주하는 이들과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들, 지나간 기억과 앞으로의 시간을 나 홀로 생각해보기도 하고, 가끔 밀려오는 외로움에 힘들다고만 했던 나의 일상의 소중함을 알아가기도 한다
매일 아침 출근길의 피곤함도, 매일 앉아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나의 사무실도, 힘들다며 한탄하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고마운 이들과의 연락도, 아침밥은 거르면 안 된다며 건강 음료를 만들어주는 엄마의 따듯한 마음도, 늘 딸들을 생각해주는 딸바보 아빠의 마음도, 늘 내 곁에서 나를 응원해주는 내 사람들의 마음도, 퇴근길에 마주하는 시원한 바람과 밤하늘의 달님까지도 말이다 -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에 지칠 때면 배낭을 메고 바다 곁으로 떠난다, 바다를 보며 나의 마음을 조금 덜어내기도 하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마음들을 마주하며 나의 마음을 한번 더 안아준다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하루하루 똑같다고 생각했던 나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번 더 느낄 수 있으니까 -
바다를 보며, 하늘을 보며 나의 마음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참 행복하다.
'많이 지쳤구나, 괜찮아, 넌 소중한 사람이야, 난 너를 믿어'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들을 나는 혼자만의 시간에 더 많이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항상 타인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만은 엄격했던 나를 반성하기도 하고,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소중한 나에게 해주지 못했던 이야기를 스스로 해주려고 노력하는 시간. 나에게 배낭을 메고 혼자 떠나는 이유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아무리 즐거운 일을 하고 있더라도 같은 출근길을 간다고 생각한다면 근무 날과 휴무날의 발걸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휴무날의 발걸음이 훨씬 더 가벼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듯 나는 종종 일상을 벗어나는 일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일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고 믿으니까
오늘도 나는 배낭에 잠옷과 책 한 권을 넣고 떠날 준비를 한다. 나에게 조금 더 예쁜 말들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 지쳤던 나의 마음을 안아주기 위해서 말이다. 넓은 바다 곁에서 나는 또 수많은 마음들을 비워내고 또 다른 마음들로 채워갈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나 홀로 배낭을 메고 떠나는 여행이 소중하다며 이야기한다, 조금 지친 마음을 가진 이들이 혼자만의 시간을 더 잘 채워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이들이 바다처럼 넓고 깊은 자연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