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술청 Jun 16. 2019

코카서스 3국 여행기15

세반호수에서 공화국 광장까지 길고 허기진 하루


 세반호수로 가는 길은 평원과 낮은 구릉들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이 목축지인 듯 간간히 풀을 뜯는 가축들만 보이고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게가르드 수도원에서 13시 30분에 출발했는데, 14시 45분쯤 세반호수에 도착했다. 

세반호수의 유명세를 반영하듯 제법 많은 인파들로 붐비고 있었다. 주차장 근처에는 기념품 상점과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기는 식당도 즐비했다. 



세반호수는 표면적이 940평방킬로미터인 코카서스에서 가장 큰 담수호수다. 수면은 해발 1,900미터로 가장 높은 호수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세반이란 ‘검은 반’이란 뜻인데, 오래전 터키의 반 호수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빛이 검은 호수를 보고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세반호수의 대표적인 방문지는 호수에서 길쭉하게 튀어나온 작은 반도의 끝에 솟은 언덕 위에 있는 수도원인 세바나반크이다. 수위가 지금보다 16미터 높았던 1933년 무렵에는 반도가 아닌 섬이어서 배를 타고 오가야 했다. 소련 시대 관개용수 공급과 수력발전을 목적으로 터널을 뚫고 물을 빼서 수위가 20미터나 낮아졌다고 한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언덕을 힘들게 올라가니 세반호수가 점점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북쪽으로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물빛은 이름처럼 검푸른 색깔을 띠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검푸른 물빛이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언덕 끝에는 세바나반크 수도원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우뚝 서있었는데, 건물이 오래돼서인지, 세반호수의 검은 물빛에 영향을 받았는지 대체적으로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수도원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늙은 화가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니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아침도 안 먹은 상태였다.  점심을 먹고 가자고 했다가 맞아 죽는 줄 알았다. 여성들이 무슨 3국 동맹이라도 맺었는지, 그러기에 왜 공짜로 주는 아침을 먹지 않았느냐고, 쌤통이라고, 어디 한 번 견뎌보라고 윽박지르고 비꼬았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매점에서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사서 희롱하듯 먹고 있었다. 내가 배고픈 걸 참고 말지 더러워서 그딴 거는 안 먹는다. 내가 그 추운 겨울날, 천막에서 100끼를 굶어본 사람이다. 한두 끼 건너 띄는 것은 달밤에 징검다리 건너기다. 

 차는 다시 예레반으로 향했다. 도중에 주유소에 들렸다. 그때까지는 몰랐었는데 우리가 탔던 차는 LPG 차량이었다. 주유소에 도착하자마자 기사가 우리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잠깐 기다리면 될 텐데 왜 내리라고 하나 의아해하면서 우리들은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에 그 이유가 밝혀졌다. 아르메니아의 LPG 주유소는 한국처럼 고압으로 가스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호스로 천천히, 아주 저압으로 가스를 주입하는 구조였다. 보통 차 1대당 가스 주입을 마치는데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강제로 30분의 휴식을 가진 다음에야 차는 다시 출발했다.   

 예레반 북쪽 언덕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마테나다란(Matenadaran)에 도착하니 16시 40분이었다. 마테나다란은 박물관과 연구소를 겸하는 국립 서고이다. 서고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1만 7천여 권의 중세시대의 책과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신고전주의 풍의 건축물인 마테나다란은 건축가 마르크 그리고리안(1900~1977)의 작품이다. 건축물 하단의 전면에서 팔을 벌리고 있는 대리석 석상은 서기 406년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제한 메스로프 마슈토츠이다. 4세기의 아르메니아는 비잔틴과 페르시아 두 제국에 의해 분할되어 지배를 받고 있었다. 독자적인 문자가 없어 그리스, 페르시아, 시리아 문자를 빌려 써야 했고 언어의 표현과 뜻의 전달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이가 바로 메스로프 마슈토츠이다. 한국에 세종대왕이 있었다면 그보다 천 년 전에 아르메니아에는 메스로프 마슈토츠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만든 36자의 문자가 ‘아이브벤’이라 불리는 지금의 아르메니아 문자이다. ‘아이브벤’은 창제된 이후 모음 두 자가 첨가되었고, 소련 시대가 개막한 1920년대에는 문자 개혁으로 철자법의 변화를 겪기도 했다. 1950년대 아르메니아의 문자 해독률은 90%에 이르렀다. 

 마테나다란의 건축물 전면 좌우에는 아르메니아 역사에서 존경받는 6명의 학자와 예술가들의 석상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학자, 시인, 예술가 등 각자 다른 직책을 갖고 있었던 현자들은 표정도 다르고 모양도 달랐다. 

중세시대의 책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서고 입구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도서관의 폐관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도서관 입구를 카메라에 담은 후 아쉬움의 발길을 돌렸다.  

 ‘캐스케이드’로 가는 길가 담벼락에는 ‘아이브벤’ 글자가 예술작품으로 박혀있었다. 바로 옆에 있다는 캐스케이드는 우리가 길을 잘못 든 바람에 한참을 우회한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캐스케이드는 건축가이며 도시계획가인 알렉산드르 타마니안이 북쪽의 언덕과 도심을 연결하고자 구상했던 계단형 구조물로 1936년 숨을 거둘 때까지 착공조차 하지 못하고 설계도로만 남아 있던 미완의 유작이다. 러시아 흑해 연안 출신인 타마니안은 러시아에서 건축가로서 명성이 정점을 향해 가던 마흔다섯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이후 반생을 보냈다. 그는 예레반을 비롯해 아르메니아 제2의 토시인 레니나칸(지금의 굼리) 등의 도시계획을 주도했고 예레반의 오페라하우스, 공화국 광장과 주변의 건물을 설계하는 등 아르메니아의 건축사와 도시사에 일획을 그은 인물이다. 


 1970년대 말 예레반의 도시계획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건축가 짐 토로스얀이 타마니안의 유작을 부활시켰다. 타마니안의 원안에 기초해 내부에 공간들을 만들어 잇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으며 전면에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예술품들로 치장된 정원들을 추가했다. 1980년대 말 마침내 착공됐지만 1988년 대지진과 1991년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전쟁 등으로 중단됐다가, 2002년 아르메니아 출신 디아스포라 후손인 미국의 사업가가 재산을 출연해 2009년 마침내 미술관으로 개관을 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주변 공간에는 빈틈없이 예술 작품들이 비치돼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가 너무 세련되고, 화려하고, 특이하고, 창의적이어서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빠른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예술작품들은 실내만이 아니라 실외, 그리고 입구의 공원에도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작품들의 홍수 속에서 한국인의 작품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폐타이어로 만든 조각가 지용호의 <사자2>라고 하는 작품이었다. 

모스코브얀 대로에서 정북을 향한 캐스케이드의 초입에는 타마니안의 대리석상이 서 있었다.

 타마니안이 설계한 오페라 하우스를 거쳐 공화국 광장 근처에 유명한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식당은 이미 만원이었다.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벌써 18시 35분이었다. 하루 종일 반강제적으로 곡기를 끊은 상태라 배가 무척 고팠다. 아르메니아의 대표적인 요리인 라마준과 양고기, 돼지고기 꼬치를 시켰다. 라마준은 화덕피자와 비슷한 음식으로 얇은 도우에 소스, 양파, 잘게 썬 고기 등 각종 재료들을 토핑 하여 만든 요리다. 화이트 와인 1병과 생맥주를 곁들여 허겁지겁 하루의 허기를 달랬다.  


 10분 정도 걸어서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차차의 저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는지, 어제 오후부터 목이 째지듯 아프더니 이제는 콧물이 흐르고 기침이 났다. 잠시 후에 아들이 우리 방으로 건너왔다. 딸이 휴가를 오래 낼 수가 없어서 딸과 아들은 모레 한국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머지 일행들은 내일 다시 조지아 바투미로 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이다. 아들이 한국으로 들어갈 때 가장님의 일부 짐을 가져가기로 했고, 손잡이 부분이 고장 난 가장님의 캐리어도 아들 것과 바꾸기로 했다. 둘은 방안에 온통 짐을 풀어놓고 한동안 티격태격했다. 헤어짐이 실감이 나기도 했고, 딸과 아들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50대 4명이 버텨야 하는 앞으로의 7일이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4명 모두 해외여행에는 베테랑들이고 나이를 합하면 200살이 넘었다. 

 딸과 아들은 내일 밤에 가본다고 해서 50대 4명만 공화국 광장 분수쇼를 보기로 했다. 21시 45분쯤 호텔 로비에서 만나 길 찾기의 달인인 양 동지의 뒤를 따라 어렵지 않게 공화국 광장에 도착했는데, 웬걸 한참 분수쇼가 진행 중이었다. 22시에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환상적으로 진행되던 분수쇼는 5분 만에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다. 또 하겠지 하는 기대는 이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구경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니 광장은 순식간에 텅 비고 말았다. 타마니안이 설계했다는 이 도시의 배꼽인 공화국 광장의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왠지 포근함이 느껴지는 야경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으나 완연한 감기 기운에 맥주 마실 힘도 없어서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조지아 정세와 관련된 온갖 난해하고 철학적인 꿈을 밤새도록 꾸었다. 

작가의 이전글 코카서스 3국 여행기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