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
09시 50분에 호르비랍에 도착했다. 터키 국경 근처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호르비랍에서는 아라라트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곳은 아르메니아에서 아라라트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영산인 아라라트는 노아의 방주가 걸려 머물렀다는 종교적 상상력의 무대이자 아르메니아의 국장(國章)을 장식하고 있기도 하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한창이던 1993년에 터키가 경제봉쇄와 함께 국경까지 폐쇄하면서 아라라트는 더욱 멀어졌지만, 아라라트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들의 태생과 역사가 시작했다고 믿는 곳이다. 아라라트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 평원의 동쪽은 오랫동안 그들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서기 301년 아르메니아의 왕을 움직여 세계 최초의 기독교 왕국으로 바꾼 주역이 호르비랍의 지하 동굴에서 13년 동안 갇혀 있었던 그리고르이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배신과 침범으로 영토의 일부를 빼앗기고 울분에 시달려 백약이 무효한 채 시름시름 앓던 왕을 낫게 한 이가 그리고르였다. 이에 감동한 왕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후 그리고리를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르가 호르비랍의 지하 동굴에 갇히게 된 것은 종교적 이유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왕족이던 그리고르의 아버지는 당시 왕이었던 호스로프2세의 암살 음모에 관여한 혐의로 처형됐는데, 어린 그리고르는 후견인의 도움으로 아르메니아를 벗어나 카파도키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곳에서 기독교인 아르메니아 왕족의 딸과 결혼한 후 사제가 되었다. 티라다테스 2세가 즉위한 후 아르메니아로 돌아왔지만 황제의 명으로 호르비랍의 지하 동굴에 갇혀 13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백 년쯤 지난 후 성인과 계몽자의 칭호를 얻은 그리고르가 갇혔던 이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입구 위에 지금의 교회가 세워졌다.
1시간 정도 구경을 한 후 차는 예레반의 라잔 강 너머 서쪽 언덕에 세워진 학살 기념 공원으로 출발했다. 공원 입구에는 이곳을 방문했던 국가 정상급 인물들이 기념으로 식수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학살 기념관에서 도대체 뭘 기념한다는 것인지 헷갈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1915년 아르메니아인들이 적국인 러시아와 손을 잡을 것을 우려해 저지른 오스만 제국의 강제이주와 학살은 희생자 수가 150만 명을 헤아리는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기록되고 있다. 이때 발생한 대규모 난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야 했다. 터키는 살육이 있었지만 강제 이주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 사건이었지 제노사이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공식적인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1965년 제노사이드 50주년을 맞아 예레반에서 십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24시간 시위를 벌여 소련에 공식적 인정과 위령탑 건설을 요구했다. 이듬해 위령탑이 착공되어 1967년에 완공됐다. 14개의 석판이 원형으로 둘러싼 공간 가운데에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전시실에는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를 증언하는 사진과 도서 등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살해 장면이 담긴 영상도 상영되고 있었다. 너무나 끔찍해서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도대체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제노사이드(genocide)’는 공론의 영역에서 그렇게 낯선 용어가 아니다. 통상적으로는 ‘집단살해’로 번역되고 있다. 한국 외교부 원본 문서 역시 그렇게 번역해서 표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더 협소하게 제노사이드를 ‘인종학살’ 혹은 ‘종족학살’로 이해하기도 한다. 제노사이드가 어원적으로 인종 혹은 종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genos’와 학살을 의미하는 라틴어 ‘cide’의 합성어라는 사실에 주목해서다. 그러나 최근 제노사이드가 집단 성원들에 대한 대량학살 같은 “물리적인 파괴”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삶의 토대 및 사회적 양식에 대한 “사회적 파괴”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
12시 20분경 호텔로 돌아왔다. 짐을 챙겨서 기차역으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이제는 애들과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이번 여행은 딸과 아들을 새롭게 발견한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딸은 몇 번의 실수가 있긴 했지만 이번 여행의 계획부터 실행까지 완벽하게 수행했다. 실수를 해도 당황하지 않고 발 빠르게 대처를 했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도 뛰어났다. 노인네들과의 소통도 원활했고, 분위기도 잘 이끌어나갔다. 여행을 지극히도 싫어하는 아들도 싫은 내색 없이 잘 따라 주었고, 온갖 궂은일도 불평 없이 해냈다. 그동안은 딸 덕분에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는데, 영어 실력도 변변치 않은 50대 4명이 앞으로 일주일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심히 걱정이 됐다. 딸과 아들도 우리들을 못내 걱정스러워했다. 어제부터 이틀 째 같이 다니고 있는 기사와 호텔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이산가족들이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듯 아쉽고 찡한 작별을 했다.
기차역에 가기 전에 식당에 들러 기사랑 같이 점심을 먹으려고 기사에게 기차역 근처의 맛있는 식당으로 데려 달라고 부탁했다. 알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더니 기차역을 지나 제법 멀리 가고 있었다. 우리들이 걱정하니 기차역까지 다시 태워다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기사가 소개해 준 식당은 호젓한 호수 옆에 자리한 운치 있는 식당이었다. 호수 옆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가지고 있는 아르메니아 돈을 다 꺼내서, 기차 안에서 먹을 것을 살 돈만 남기고 그 액수만큼 알아서 음식을 시켜달라고 기사에게 부탁했다. 기사는 빵과 샐러드, 치킨 그리고 맥주와 콜라, 물을 시켰다. 결혼은 했냐고 기사에게 물었더니 3세와 7세 된 딸들의 사진을 수줍게 우리에게 자랑했다. 참 순진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혹시 우리들이 쓰는 말이 일본말이냐고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우리가 아르메니아 말과 조지아 말을 구분 못하듯이, 그도 일본말과 한국말을 구별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14시 05분에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마트에 가서 자두, 사과, 포도를 푸짐하게 샀는데, 겨우 2000드람(한화로 4000원)이었다. 와인과 맥주, 물까지 사서 대합실로 왔다. 15시쯤 기차에 올랐다. 1인당 5만 원을 넘게 지불한 일등석은, 예매할 때 창구 아주머니가 그렇게 일등석이 맞는지 확인에 확인을 하던 그 일등석은, 올 때 탔던 일등석과는 다를 거라고 잔뜩 기대했던 그 대단한 일등석은 올 때랑 똑같았다. 심지어 올 때에는 물 2병과 음료수 2병이 탁자에 놓여 있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 앞으로의 16시간이 걱정돼서 화장실 가려고 남겨둔 돈을 탈탈 털어서 1리터짜리 물 2병과 500미리 물 한 병을 사서 서둘러 기차로 돌아왔다.
21시 50분에 출국 심사를 마치고 출발한 기차는 22시 13분에 입국 심사를 위해 다시 정차했다. 오이와 점심때 먹다 남은 빵, 가장님이 호텔 아침식사 때 가져온 말린 과일 몇 조각을 먹은 후에 감기약을 먹었다. 22시 40분에 공무원 1명이 나타나 여권을 걷어 갔다. 감기약을 먹어 해롱거리고 있는데 검사관이 와서 티켓을 확인하고, 술, 담배를 하냐고 물어봐서 탁자에 한국산 소주 1병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도 “노”라고 대답하니 그냥 갔다. 잠시 후에 기차가 다시 움직였다. 여권은 아직 안 돌아왔다. 기차가 출발했으니 입국 심사가 끝났다고 해야 하나, 여권이 아직 안 돌아왔으니 안 끝났다고 해야 하나? 애매한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병든 닭처럼 졸다가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