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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몽인 Jun 18. 2022

운수가 기묘한 날

서울 삶

어제는 정말 기묘한 날이었다.


일주일간 계속되는 PMS( * 월경 전 증후군) 기간임에도 호르몬을 이기는 의지를 일으켜 오전 헬스장 출석을 성공했다. 적당히 맛있는 밥을 먹고 학원에 가려고 나가던 찰나, 화장실에 들린 게 첫 번째 운수 꼬임이었다.


한 달 전에 분명 전문업체를 불러 뚫었던 변기가 또 막힌 것이다. 내 집이 아닌 룸메이트의 집에 변기를 막아버리면 빨리 뚫는 게 상책이기에 그때 그 기사님을 다시 불렀다.  수압이 약한 변기에는 전문가가 직빵이고 학원에 늦기 싫어 얼른 돈을 내고 해결했다.


학원은 금요일 수업이라 그런지 수강생이 S(a.k.a 윤여정)와 나뿐이었다.

6월 회화 선생님 J는 내가 생각하는 미국인의 정석 (보수적, 아슬아슬한 농담, 총을 좋아함)이라 이전 선생님만큼 애정은 안 가지만 슬랭 같은 현지 영어 표현을 많이 알려줘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분이다.

수강생이 적어서 그런가 이날만큼은 J도 진지하게 자기 의견을 많이 말해서 수업이 재밌었다.


나의 진로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잠깐 있었는데 괜히 작아지고 말하기 어려웠다. 직설적인 J와 현실적인 S 앞이라 나의 몽상가적인 면모를 들킬까 조금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양가적인 마음으로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의견을 듣는 것도 좋아해 이들이 전하는 생각이 충고보단 우려로 느껴져 기분이 괜찮았다.


저녁에 경기도  A시로 넘어가 북 토크 행사에 참여하고 A시에 살고 있는 친구 P의 집에서 하루 묵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지하철을 타기 전에 명동에서 처음으로 명동교자를 먹고 마늘냄새로 지배된 입에 자일리톨을 자근자근 씹으며 강 넘고 산 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가방에 하루 외박을 위한 짐과 긴 대중교통 시간을 고려한 책을 넣었더니 무거웠지만, 4호선에 내가 앉을자리 하나는 찾기 힘들었기에 열심히 이고 갔다.


북토 크는 퍼스널 브랜딩, 사이드잡, 다능인과 같이 요즘 유행하는 트렌디 아이콘에 적합한 작가님의 행사였다. 작가님이 내신 책은 인스타그램의 게시물과 비슷한 글이라 취향에 맞지는 않았으나 사람이 궁금해 찾아갔다. 팬이 많아 보이는 작가님은 진행자 없이 혼자서 1시간가량 자신의 이야기를 막힘없이 쭉 하고 여유롭게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본인이 하고 싶고 궁금한 모든 분야에 있어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게 도전하는 에너지가 전해졌다.


행사를 마치고 한 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친구 집에 도착했다. 4시간 전에 보낸 카톡 메시지를 아직 안 읽고 연거푸 보낸 톡에 답이 없었지만, 방에서 자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친구였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집 앞에 도착해서 전화를 건 순간, 두려움이 찾아왔다.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시간은 밤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음산하고 무서운 동네로 유명한 곳이라 몸에 긴장이 잔뜩 되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꺼진 전화기와 무응답인 호출에 계속해서 있다간 막차까지 끊길 위험에 처해 다시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12시가 넘어서 폰이 켜진 친구는 우리의 약속이 토요일인 줄 알았다고 했다. 친구에게 문제가 생겼던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으나 충전기 좀 들고 다녀라는 충고를 전했다.)


이때의 감정은 그냥 멍했다. 짜증으로 기울기 보단 그냥 멍했다. 화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집까지 가려면 약 2시간 가까이 전철을 타야 했기에 가는 길에 룸메에게 오늘 다시 돌아간다고 연락을 하자  나를 다시 한번 좌절시키는 답이 왔다.

이미 그녀의 애인이 집에 와 있는 것이다.


'나 돌아가게 되었으니 집 보내라'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과 처지이니 하룻밤 묵을 숙소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하철에서 부랴부랴 명동에 있는 한 호스텔을 예약했다.

'이렇게 된 거 혼자 호캉스 한번 즐겨보자!'라는 사고의 전환이 가능한 힘이 없었기에 적당한 가격대에 그냥저냥 한 곳을 예약했다.


밤 11시가 넘어 셀프 체크인을 시도했으나 호스트가 알려준 702호 안에는 큰 택배 물품이 있었고 다시 알려준 703호에는 각종 공사 기계가, 한층 내려간 606호에는 그림 액자가 침대 위에 떨어져 있고 샤워기가 바닥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505호는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게 당연한 건데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조식도 가능하다는 단체 부엌은 리모델링 중인지 사용불가였고 여러 번 방을 옮기는 달밤 운동도 했지만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무념무상


어렵사리 체크인을 끝내고 근처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과자를 사며 칫솔과 치약도 함께 사서 들어왔다. 가격이 싼 만큼 뭐 하나 있는 게 없었던 공간이었고 샤워하다 두드러기 나는가 싶었던 샤워 부스의 물 떼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사용했다. 뭐 언제부터 위생과 깔끔에 큰 일가견이 있었다고..


찝찝한 샤워를 마치고 장거리 애인에게 영상통화를 걸자마자 갑자기

으아아아아 하고 울음이 나와버렸다.

평소에도 감정 동화와 emotion intelligence가 상당히 높은 애인이 맞은편에서 함께 울고 있어 눈물이 뚝 그쳤다.

목을 축여야겠다고 연 냉장고에는 사온 맥주만 있고 물 한병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기묘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짜증 날 순간이 굉장히 많았던 어제였는데 짜증 낼 에너지가 들지 않았다.

그냥 우와.. 되게 이상하네?

기묘하네?


그리고 이제 집에 내려가고 싶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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