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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Aug 26. 2016

수학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묻는 당신에게

삶을 위한 수학교육을 위하여

시와 음악이 우리의 삶에 어떤 쓸모가 있을까?     


시와 음악이 우리의 삶에 어떤 쓸모가 있을까? 문학과 예술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유익을 가져다줄까?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인류가 역사 속에 등장하면서부터 시와 음악은 존재해 왔다. 그러니 시와 음악의 쓸모를 따지려면 '쓸모 있음/없음', 즉 '유용성'이라는 개념의 역사에 대하여 성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쓸모 있음/없음'의 개념에서 가장 동떨어진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이상, <오감도 시제4호>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1  2  3  4  5  6  7  8  9  0 ㆍ

 1  2  3  4  5  6  7  8  9 ㆍ 0

 1  2  3  4  5  6  7  8 ㆍ 9  0

 1  2  3  4  5  6  7 ㆍ 8  9  0

 1  2  3  4  5  6 ㆍ 7  8  9  0

 1  2  3  4  5 ㆍ 6  7  8  9  0

 1  2  3  4 ㆍ 5  6  7  8  9  0

 1  2  3 ㆍ 4  5  6  7  8  9  0

 1  2 ㆍ 3  4  5  6  7  8  9  0

 1 ㆍ 2  3  4  5  6  7  8  9  0

ㆍ 1  2  3  4  5  6  7  8  9  0    

진단 0 : 1     

26.10.1931

이상 책임의사 이 상     


- 이상, <오감도 시제4호>     


이상 책임의사 이상. 마지막까지 언어유희를 즐기고 있는 시인 이상이 생각하기에 환자의 용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다. 1234567890, 123456789, 12345678.9, 1234567.89, … , 1.23456789, 0.123456789. 책임의사 이상의 진단은 다음과 같다.


0 : 1

0/1 = 0


환자는 0, 즉 죽음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환자는 누구인가? 일본제국주의의 폭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중들인가? 아니면 폐결핵 진단을 받은 시인 자신인가?      


존 케이지, <4분 33초>


I
TACET

II
TACET

III
TACET

참고: 이 작품의 제목은 연주 시간을 분·초 단위로 표시한 것입니다. 1952년 8월 29일, 뉴욕 우드스톡에서 연주되었을 때 총 시간은 4분 33초였으며, 세 악장은 각각 33초, 2분 40초, 1분 20초였습니다. 이 작품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는 피아노의 뚜껑을 닫음으로써 공연 시작을, 엶으로써 끝을 나타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어떤 연주자에 의해서든 연주될 수 있으며, 연주 시간의 제한 또한 없습니다.

어윈 크레멘을 위해, 존 케이지


- 존 케이지, <4분 33초>


1952년 8월 29일 뉴욕 주 우드스탁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 1926~1996)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 덮개를 열었다. 몇 분 뒤 그는 덮개를 다시 닫았다. 피아니스트는 그저 덮개를 열었다가 다시 닫고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존 케이지(John Milton Cage Jr., 1912~1992)의 작품 <4분 33초>가 초연된 순간이었다. 이 연주는 당시의 청중들과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지금은 음악의 정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학의 쓸모     


일반적으로 '쓸모'라는 말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유용한가라는 문제제기의 언어로써 사용된다. 그러나 쓸모라는 말을 쓸모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이해해야 한다. 어쩌면 시/음악의 역사란 쓸모의 관점에서 본 시/음악의 변천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한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오랜 논쟁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분명한 것은 이상의 <오감도 시제4호>와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각각 시와 음악에 있어서의 쓸모 있음/없음의 의미를 확장시켰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는 <오감도 시제4호>와  <4분 33초>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무가치한 창작물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시의 사명과 음악의 본질에 대한 빛나는 통찰의 결과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시와 음악에 물었던 것과 동일한 질문을 수학에 적용시켜 보자. 수학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살펴볼 것이 있다. 아래 그림에서 왼쪽 여섯 개의 그림과 오른쪽 여섯 개의 그림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M. M. 봉가드, <봉가드 문제 53>

     

왼쪽 여섯 개의 그림과 오른쪽 여섯 개의 그림은 모두 두 개의 다각형 - 바깥쪽의 큰 다각형과 안쪽의 작은 다각형 – 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동일성을 갖는다. 그러나 차이점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먼저 바깥쪽 다각형을 살펴 보자. 왼쪽 여섯 개의 그림은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으로 이루어진 반면 오른쪽 여섯 개의 그림은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안쪽 다각형을 살펴 보자. 왼쪽 여섯 개의 그림은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으로 이루어진 반면 오른쪽 여섯 개의 그림은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 왼쪽 여섯 개의 그림은 안쪽의 다각형이 바깥쪽의 다각형보다 꼭짓점의 개수가 적고 오른쪽 여섯 개의 그림은 안쪽의 다각형이 바깥쪽의 다각형보다 꼭짓점의 개수가 많다. 즉 내부에 있는 다각형의 꼭짓점의 개수와 외부에 있는 다각형의 꼭짓점의 개수 사이의 대소 관계가 이 둘을 구별하는 기준인 것이다.     


봉가드(Mikhail Moiseevich Bongard, 1924~1971)가 만든 열두 개의 상자 그림을 구별하는 것이 수학의 쓸모를 논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수학은 어떤 수학이냐고. 당신이 알고 있는 수학은 수학의 극히 일부분이거나 어쩌면 진짜 수학이 아닐 수도 모른다. 도대체 수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패턴의 우주 속에 살고 있다. 매일 밤마다 별들은 원호를 그리며 하늘 한 쪽에서 떴다가 저편으로 진다. 어지럽게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눈송이들 중에서 정확히 똑같은 모양을 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눈송이는 모두 6겹 대칭이다. (……) 인간 정신과 문화는 이런 숱한 패턴들을 인식하고, 분류하고, 이용하는 정형화된 사고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우리는 그것을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 이언 스튜어트, 《자연의 수학적 본성》     


시와 음악과 마찬가지로 수학 역시 인류가 역사 속에 등장하면서부터 존재해 왔다. 아니, 인간의 탄생과 함께 수학은 시작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패턴을 인식한다. 같다-다르다, 길다-짧다, 많다-적다, 직선과 곡선, 다각형과 원, 각기둥과 원기둥. 이 세상에 ‘가구’라는 사물은 없지만 우리는 가구와 가구가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다. 구슬과 막대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우리는 똑같이 1개, 2개, 3개 …… 라고 ‘수’를 센다. 우리가 시와 노래에서는 찾으려 하지 않는 쓸모 있음/없음이라는 개념을 굳이 수학에서 찾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문학과 예술에서 발견하고자 애쓰는 삶의 의미를 굳이 수학에서 찾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시와 음악을 배우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수학을 배운다. 중세 대학의 학부 과목이었던 자유 7교과 혹은 자유 교양liberal arts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가리킨다. 《호르투스 델리키아룸Hortus deliciarum》을 보면 자유 7교과를 표현한 일곱 명의 여신이 등장한다. 이 중에는 컴퍼스를 들고 있는 기하학의 여신과, 눈금이 표시된 줄자를 들고 있는 산술의 여신이 있다. ‘즐거움의 정원’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이 바로 기하학Geometry과 산술Arithmetic인 것이다.      


Herrad of Landsberg, 《Hortus deliciarum》

     


산술 : 수학의 정수精髓를 다루는 방식     


이안 스튜어트(Ian Stewart, 1945~ )는 《자연의 수학적 본성Nature′s numbers》에서 수를 “수학의 정수로서, 모든 것 속에 스며들어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것을 통해 숱한 분야의 수학이 벼려지고 연마되는 원료”라고 표현한 바 있다.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보다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 계속되는 수 π와 결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허수 i. 성가신 것은 바로 e입니다. e는 영국의 수학자 존 네이피어로 말미암아 ‘네이피어 수Napier′s number’라고 불리게 됩니다. 네이피어 수는 수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π와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한없이 계속되는 무리수입니다. 무한한 우주로부터 π가 e의 품으로 내려앉습니다. 그리고 부끄럼쟁이 i와 악수를 합니다.

그들은 몸을 가까이 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e도 i도 π도 결코 연관성이 없어요. 하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 단 한가지, 더하기를 하면 세상은 바뀝니다. 모순되는 것들이 통일이 되어 0. 요컨대 무로 끌어안게 됩니다.”     

- 고이즈미 타카시,  《박사가 사랑한 수식》    


박사가 사랑한 수식 e^iπ + 1 = 0. <오일러의 공식Euler's formula>이라 불리는 이 유명한 수식에는 단지 다섯 개의 숫자가 나오지만, 이 단순한 수식 속에 장대한 수학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3대 작도 난제 - 임의각의 삼등분의 작도, 원과 같은 넓이를 갖는 정사각형의 작도, 두 배의 부피를 갖는 정육면체의 작도 - 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이 위대한 발견의 순간을 재현하는 일이 분명 쉽지는 않다. 하지만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배움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산술arithmetic은 수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연원이 깊은 분야로, 수의 개념이나 수에 대하여 간단한 계산을 하는 방법, 그 성질이나 계산의 법칙 등의 이론적인 방법을 다루는 학문이다. 산술은 ‘계산하다’라는 뜻인 그리스어 arithmeein 또는 ‘수’를 뜻하는 arithmos에서 유래하였다. 산술은 2개 이상의 수를 결합하는 모든 법칙을 다룬다. 우리가 흔히 사칙연산이라 부르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비롯하여 분수, 비와 비율, 확률, 대수학과 수론이 넓은 범위에서 이에 해당한다.      


“임의의 세제곱수는 다른 두 세제곱수의 합으로 표현될 수 없다. 임의의 네제곱수 역시 다른 두 네제곱수의 합으로 표현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3이상의 지수를 가진 정수는 이와 동일한 지수를 가진 다른 두 수의 합으로 표현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경이로운 방법으로 증명하였으나, 책의 여백이 충분하지 않아 옮기지는 않는다.” 1621년 출간된 《아리스메티카Arithmetica》의 여백에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7~1665)가 위와 같이 주석을 달았을 때, 그는 자신의 메모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게 될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358년이 지난 1995년 엔드류 와일스(Andrew Wiles, 1953~ )에 의해 이 유명한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때까지, <페르마의 정리Fermat′s theorem>는 가장 유명한 수학적 가설 중의 하나였다.


<오일러의 공식>과 <페르마의 정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수식들 속에 존재하는 패턴들을 인식하고, 분류하고, 이용하는 과정을 통하여 정형화된 사고 체계를 만들어간다. 좀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 중학교 3학년 때 배우는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은 이차방정식이라는 수학적 개념이 포함된 인간 사유의 응축된 산물이다.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이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수 a, b, c와 변수 x의 차이를 알아야 하고 유리수와 무리수의 개념을 알아야 하며 기호 +, -, ±, =, √ 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 각각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차방정식의 근을 구하는 것과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의 악보를 읽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이것은 마치 어둠 속에 빛나는 한줄기 아름다운 유성. 밤하늘에 빛나는 별 하나의 아름다움. 들에 핀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 수식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죠. 나 또한 모르는 것 천지. 하지만 박사님은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직감을 갈고 닦아서 풍부한 감성을 키워 주세요. 이 아름다움은 반드시 느낄 수 있습니다.”

- 고이즈미 타카시, 앞의 영화          



기하학 : 서양문명의 요소Elements     


EBS 다큐멘터리《문명과 수학》 2부 〈원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이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그리스 사람들은 이것으로 논쟁했습니다. 물이다. 불이다. 논쟁은 논쟁을 낳았습니다. 말뿐인 논쟁을 하던 그들은 자기들만의 이야기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증명입니다.”


중요한 수학적 과정 중의 하나인 추론과 정당화(증명)는 특정한 시기(기원전 600년~200년경)에 특정한 지역(그리스)에서 특정한 사람들(탈레스에서 시작하여 아르키메데스에 이르는)에 의해 만들어지고 발전했다.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해왔던 수학조차도 사실은 어떤 지역의 사회·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기하학Geometry을 변형·발전시켰다.


기하학은 공간에 있는 도형이나 대상들의 치수, 모양, 상대적 위치 등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로 고대 문명에서 농경과 건축을 위해 기하학을 사용한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Geometry는 ‘땅을 측정하다’라는 뜻인 그리스어 geometrein(geo: 땅, metrein: 측량하다)에서 유래하였다. 기하학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에 의해 크게 발전한다. 이전까지 경험적으로만 사용되던 기하학의 법칙들을 엄정한 논리를 통해 증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 땅을 측정하는 쓸모에 의해 생겨난 기하학에 언뜻 보기에는 쓸모 없어 보이는 철학의 옷을 입혀 재탄생 시킨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어나는 가운데 그리스인들은 증명을 바탕으로 논쟁을 벌였다. 증명이란 가정으로부터 결론이 참임을 이끌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가정이 참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시 가정이 참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결국에는 더 이상 증명할 수 없는 명백해 보이는 가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의심할 여지없이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가정을 수학에서는 공리公理, axiom 라고 한다. 유클리드(Eukleides, B.C. 330~B.C. 275)의 《원론Elements에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의 공리가 나온다.     


공리1. 모든 점에서 다른 점으로 직선을 그을 수 있다.

공리2. 유한한 직선이 있으면, 그것을 얼마든지 길게 늘일 수 있다.

공리3. 임의의 점에서 반지름을 갖는 원을 그릴 수 있다.

공리4. 직각은 모두 서로 같다.

공리5.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처럼 누구나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로부터 논증을 시작하고 있다는 데에서 바로 그리스인들의, 그리고 유클리드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유클리드의 《원론》이 수학의 역사에서 아직까지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당시 그리스의 수학적 지식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이 후대의 수학, 더 나아가서는 문명의 발전 과정 속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났지만, 〈원론〉은 아직까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이 사회도 우리가 합의한 공리 위에서 출발했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도 원론의 구성방식을 따릅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공리에서 출발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죠. 뉴턴의 프린키피아, 스피노자의 윤리학,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등 많은 책들이 원론의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 EBS 다큐 프라임, 《문명과 수학》 2부 <원론>     


이집트의 수학, 메소포타미아의 수학, 중국의 수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리스의 수학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스는 당시 직접민주주의 사회였다. 토론과 논쟁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기하학은 이와 같은 사회상의 반영인 것이다. 그리스 이래로 기하학의 정신은 서양 문명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런 의미에서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이 수학을 넘어 서양문명의 요소Elements로 자리 잡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만 봐도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리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법이 단순한 나열이 아닌 계열성을 갖고 있고 상위법이 있다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러니 민주주의 사회에서 수학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계산을 익히는 것 이상이다.          



수학 : 배우는 모든 것     


인류 문명과 수학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숨 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듯이,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이미 수학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삶의 방식이나 사고 과정 속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수학은 정말로 ‘배우는 모든 것mathemata’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학mathematics의 어원 mathemata는 배움 또는 지식을 의미하는 mathesis에서 파생한 것이다. ‘다방면에 박학다식한 사람’을 뜻하는 영어 단어 polymath를 봐도 수학의 원래 의미가 수나 연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학문이나 지식,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구체적인 사물이 아닌 추상화된 기호를 이용하여 배우거나 생각함으로써 알게 되는 지식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이 왜 좋으세요"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베토벤의 음악과 피카소의 그림이 왜 좋은지를 묻는 것과 비슷하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에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만 설사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함, 올바름, 아름다움은 교육이 추구해온 오랜 이상이다. 따라서 교육에 있어서 쓸모 있음/없음이라는 문제제기는 언제나 필요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행위는 쓸모있음에서 시작하지만 거의 대부분 쓸모있음을 넘어선다.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보면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뇌의 일부분에 장애가 생긴 박사의 기억력은 고작 80분에 불과하다. 그의 기억은 사고를 당한 1975년에 멈춰 있다. 30년 전에 자신이 발견한 정리는 기억해도, 엊저녁에 뭘 먹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80분일까?


인간의 삶은 길어야 80년이다. 그에 반해 인간 지혜의 고갱이인 수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의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선배들의 지혜를 익히고 거기에 우리의 깨달음을 조금 더 쌓아 올린다. 박사가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접착식 메모지를 붙이고 칠판에 기록을 남기는 것처럼 수학교육자는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노력한다.


박사에게 80분의 시간이 남아 있듯이, 인간에게는 80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 80분 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쓸모 없는 인간이 사랑한 수식은 도대체 어떤 쓸모를 갖는 걸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지혜의 사랑philosophy'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인간의 도전 의식은 수학의 영토를 조금씩 넓혀 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수학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쓸모인 것이다.     


“수학은 인간 사고의 독특한 측면의 반영이다. 그래서 수학의 역사는 다른 모든 역사와 본질에서 다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의 노력이 깃든 거의 모든 분야에는 변화가 있기 마련인데, 그 변화는 수정 그리고/또는 확대로 나타난다. (중략) 위대한 지성인의 한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떨어지는 물체에 대해서 매우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것을 1590년대에 갈릴레오가 바로잡았다. 가장 위대한 고대 내과의사였던 갈렌은 (중략) 해부학과 생리학에서 매우 잘못된 생각을 하였다. 갈렌의 생각은 1543년 베살리우스와 1628년 하비가 바로잡았다. 심지어 가장 위대한 과학자였던 뉴턴조차 빛의 성질, 렌즈의 색지움收色性에 대해서 그릇된 시각을 가졌고 (중략) 대표적 업적인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 이론은 1916년 아인슈타인이 수정하였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수학을 멋지게 만드는지 알 수 있다. 수학에는 심대한 정정은 없고 확장만 있을 뿐이다. 옛 그리스인은 연역법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옳았고, 지금까지 줄곧 옳았다. 유클리드는 불완전했고 그의 업적은 엄청나게 확장되었지만 그릇됨은 없었다. 그가 다룬 모든 정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타당하다. (중략) 인류와 관련된 것 가운데 어느 것도 수학만큼 훌륭한 것은 없다. 수학에서, 오직 그것에서만, 우리는 인간 지성의 꼭대기에 도달하게 된다.”


- 아이작 아시모프,《수학의 역사》서문



* 이 글은 계간《오늘의 교육》26호에 게재한 <수학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냐고 묻는 당신에게>를 수정·보완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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