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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May 30. 2021

교육을 생태적으로 전환한다는 것

전환 시대의 교육 사유

2018년 인천에서 열린 제48차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총회에서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가 채택되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9주기였던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 World Health Organization가 ‘코로나 팬데믹’을 선언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현재의 교육시스템이 생태적이지 않다는 목소리는 청소년들로부터 나왔다.1) 그리고 이는 서울시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의 ‘교육의 대전환을 위한 비상선언’, 그리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모든 국민이 기후변화 등에 대응하기 위하여 생태전환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시책을 수립ㆍ실시하여야 한다”는 교육기본법 개정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생태전환교육의 의미의 모호성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왜일까? 그 이유에 답하기 위해 근대적 사유의 특징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보자.  


근대적 사유의 세계           


1. 데카르트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방법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식良識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다. (……) 옳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 – 그 능력을 사람들은 양식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이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 은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이성은 (그리스의 철인이나 중세의 성직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사상의 인권선언’으로 불리게 된 이 책에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천명함으로써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근대적 사유의 주체가 탄생하였음을 알렸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유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가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하지 아니하는 어떤 것도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겠다.
둘째, 내가 검토하는 각각의 어려움들을 가능한, 그리고 더 잘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한에서 가급적 세분한다.
셋째, 나의 생각을 질서 있게 인도하기 위하여, 즉 인식하기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쉬운 대상들로부터 출발하여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복잡한 것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넷째, 내가 아무것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전체적인 열거와 일반적인 검열을 실시한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데카르트는 전통적인 지식을 거부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유 체계를 수립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천체론Le monde』에서 “나는 자연이 어떤 여신이라고 생각한다든가 또는 다른 환상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고, 내가 사용하는 자연은 물질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자연은 좌표평면에 하나의 순서쌍으로 표현되는 사물에 불과하다. 자연에 대한 그 어떤 신비주의도 거부하면서 모든 자연은 질서와 측정을 연구하는 수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기계적 세계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되고 뉴턴에 의해 완성된 기계적 세계관은 수많은 현대 사상가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처지에 이르렀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며 예측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잘 들어맞는다. 스마트폰과 네비게이션의 세계. 우리는 여전히 데카르트의 직교 좌표계와 뉴턴의 미적분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2. 라무스와 코메니우스     

  

존 화이트John White는 『중등 교육과정, 역사와 철학The Invention of the Secondary Curriculum』에서 오늘날의 중등교육은 발명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공교육’이라고 말하는 현대 중등교육은 라무스-코메니우스로 대표되는 라무스-포스트라무스주의의 산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형태의 교수법이었다. 그리고 이 발명품은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로 그리고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라무스가 대안으로 찾아낸 교수법은 명확하게 분할될 수 있는 지식의 형식들 안에서 지식의 항목을 논리적으로 조직화하는 새로운 '방법method'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라무스는 새로운 인쇄기술을 활용함으로써 그의 수많은 교과서에서 각 교과의 주요 특성을 한 페이지로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은, 나무 모양의 그림으로서, 대체로 이분법에 의거하여 해당 교과의 가장 추상적인 특성부터 가장 구체적인 특성까지 밝혀 주었다.

- 존 화이트, 『중등 교육과정, 역사와 철학』     

  

특권층이 아닌 학생들에게 특권층이 받고 있던 교육을 전수함으로써 그들이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던 라무스는 학생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광범위한 지식을 빠른 시간 내에 전달할 수 있는 '방법method'을 고안했다. 그의 방법은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했다.  

   

원칙 1. 교과 내용의 항목들은 모두 보편적으로 참이어야 한다(진리의 법칙). 

원칙 2. 그런 항목들은 모두 적절한 범주 속으로 함께 모아져야 한다(교과의 분할). 

원칙 3. 각 교과 안에서 자료가 제시되는 순서는 일반적인 정의로부터 시작하여 특수한 성질들에 도달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교육적 배열).      

  

라무스의 교수법 개혁의 목적은 학생들의 세속적 성공을 돕는 유용한 지식을 전수하는 데 있었다. 라무스가 설계한 수업 일과는 다음과 같다.


라무스의 교수법은 코메니우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는 모든 기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대교수학Great Didactic』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강조했다: ① 구체적인 것으로 들어가기 전 교과의 일반적 개요를 제시할 것, ② 교육과정을 종합적으로 다루어 줄 것, ③ 단일한 방법을 고수하고 불필요한 내용을 제거할 것, ④ 교사가 분명하고 상세하게 지도해 줄 것, ⑤ 시간 낭비가 없도록 효율적으로 조직할 것, ⑥ 적절한 입문용 교과서를 신중하게 선정할 것, ⑦ 습득된 모든 지식을 일상생활에 적용시킬 것 등.

  

화이트 질문은 이것이다. 라무스와 코메니우스의 기획은 유효한가? 즉 처음에 의도했던 특권층이 아닌 학생들에게 특권층이 받고 있던 교육을 전수함으로써 그들이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가? 화이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영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로, 기득권층에 속하는 가정에서는 자기 아이들이 시험을 더 잘 보게 하려고 사립학교나 사교육에 상당한 교육비를 투입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밖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런 이유 때문에 교육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더 성공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

- 존 화이트, 앞의 책     

  

이러한 인식 속에서 화이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교육과정을 그런 방식으로 조직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 수학, 역사, 국어 등에 대한 이해는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교과들에서 어떤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례를 따를 것이 아니라 옹호받을 수 있는 교육목적을 따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화이트는 『중등 교육과정, 역사와 철학』에서 현재의 중등 교육과정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할 그 어떤 정당성도 찾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omnes에게 모든 것omnia을 철저히omnino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라무스/포스트라무스주의 이상의 산물인 근대 중등 교육과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3. 기계적 세계관을 넘어     

  

자연의 질서 속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소명은 인간의 신분, 곧 인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되도록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과 관련된 어떤 직업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부모의 직업을 계승하여 장차 군인, 성직자, 변호사가 될 운명이라고 말하기 전에 자연은 그에게 인간의 삶을 살아가도록 명령한다. 

- 장 자크 루소, 『에밀』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지식을 보급시키고, 사회를 무지한 상태로부터 탈피시키려 했던 계몽주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것을 본분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교육운동이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교육에 의해서 개명될 수 있고, 개명된 인간들이 사회의 오래된 폐단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사회로 진보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교육의 가능성과 교육에 의한 사회개조 및 역사적 진보의 가능성을 확신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사회개조나 역사적 진전의 근원은 인간의 이성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모든 사물을 그들 자신의 이성의 힘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었으며, 이를 통하여 모든 속박으로부터 인간의 이성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철학, 과학, 정치, 경제, 미술, 문학, 사교상의 예법 등을 가르치는 대신 종교나 실제 생활상의 현실은 교육과정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교육 방법은 데카르트와 라무스/코메니우스의 방법론을 계승하였다. 즉, 교육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교과목들은 필요한 한에서 가급적 세분되었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쉬운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복잡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원주의적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물론 그 종착역이 고등교육기관, 즉 대학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즉 근대 대학의 지식 생산 시스템은 데카르트가 터를 잡고 계몽주의자들이 뼈대를 올린 기계적 세계관의 결정판이다. 

  

사실 대학의 모든 논문은“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무한 반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명제는 참인가. 데카르트는 신체와 정신은 상호간의 연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자적인 권리에 따라 별도로 존재하며 독립된 개별적 실체라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신체와 정신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자연을 추상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로 보고, 각 부분들을 쪼개어 분석하는 기계적 세계관에 대하여 전체적 연관성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각 유기체가 그 환경과 맺는 올바른 관계를 무시하게 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계적 세계관(에 근거한 지식 생산 시스템)의 결함은 근대세계에 중대한 위기를 불러 온다고 보았다.      

  

유용한 지식이란 전문 지식이며, 이것은 이에 속하는 유용한 주제에 정통한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러한 상황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틀에 박힌 정신을 낳는다. 각 전문 분야는 진보하지만, 이 진보는 자신만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전문화되는 것은 추상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틀은 폭넓은 영역을 정신에 제공하지 못하며, 추상은 사전에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는 것을 배제한다. (……) 지식의 전문화가 야기하는 폐단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히 심각하다. 이성의 지도력은 약해지고 지도적 입장에 있는 지식인들은 균형을 상실하게 된다. 상황의 어느 일면만을 보고 좀처럼 양면을 보지 못한다. 요컨대 사회가 전문적인 여러 분야에서는 훌륭하게 기능하고 진보하지만, 전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지니지 못한다. 세부적인 것에 편중된 진보는 통합의 기능이 미약한 데서 오는 갖가지 위험을 증대시킨다.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트, 『과학과 근대세계』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데카르트, 라무스, 그리고 계몽주의자들의 기획은 인간이라는 종을 불평등한 세계의 최상위층에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존과 공생의 대상이 아닌, 개발을 위한 자원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기계적 세계관이 배태한 근대 교육 체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기계가 되어 스스로를 계급화시킨다. 그 시스템 속에서는 인간마저 지능에 따라 계급화된다.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더 특별하게) 존재한다.” 근대 교육 체제의 최상위층에 위치한 대학의 전문화/분업화가 심화될수록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와 교육은 위기를 맞게 된다. 능력주의라는 종교를 정당화하는 대학의 권력과 국제적으로 철저히 식민화된 지식 생산 시스템에 대한 성찰 없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불가능하다. 




전환을 위한 사유   

  

1. 생태적 사유의 탄생     

  

1972년 로마 클럽은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출간한다. 처음으로 ‘탈성장’의 개념을 소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보고서에는 1900년부터 1970년까지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1970년부터 2100년까지의 인구, 식량, 산업생산, 오염 그리고 재생할 수 없는 에너지의 추이를 예측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월드 3〉가 나온다. 메도즈Donella H. Meadows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12가지의 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100년의 미래를 예측했는데, “지금과 같은 추세로 세계 인구와 산업화, 오염, 식량생산, 자원 약탈이 변함없이 지속된다면 지구는 앞으로 100년 안에 성장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인구와 산업의 생산력이 가장 먼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급락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2008년, 호주 연방과학기술연구원의 그레이엄 터너Graham Turner는 1970년부터 2000년까지의 실제 데이터를 『성장의 한계』의 예측 데이터와 비교・검증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실제의 추이와 40년 전의 예측이 거의 일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절망적이게도) 앞으로의 추세 역시 과거의 예측과 상당히 유사할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래프를 보면 2030년을 전후로 하여 대부분의 지표가 하락세로 접어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은 지속 불가능하다.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지구 생태계는 곧 붕괴에 이를 것이다. 


『성장의 한계』와 30년 후 현실의 비교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사유의 전환이 필요하다. 파국을 막기 위한 사유나는 그것을 생태적 사유라고 부르고자 한다. 생태적 사유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살아가는 집으로서의 지구를 지키는 사유이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서 8장 22절)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아주 오래 전부터 비인간 존재들은 지구의 파국을 막기 위해 사유해왔음을 기억하자. 지구 생태계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체’이다. 실제로 대기, 육상 생태계, 해양 생태계의 모든 영역들은 서로 연결되어 한 영역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다른 영역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애쓴다. 이것이 생태적 사유다. 생태적 사유는 지구를 위한 사유이자 지구에 의한 사유이다. 

  

생태적 사유는 회복탄력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느 순간까지는 함께 고통을 감수하며 파국을 막기 위해 애쓰지만 티핑 포인트를 넘길 경우 ‘찜통 지구’라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된다.2) ‘지구온난화 1.5℃.’ 그것이 티핑 포인트이다. 지구는 망하지 않는다. 단지 시스템을 바꿀 뿐이다. 그러나 지구가 인류를 새로운 시스템의 일원으로 계속 받아들여 줄지는 미지수다.3)




2. 생태적 사유우리 공동의 미래를 묻다     

  

1987년 4월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는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난 직후였다. 이 보고서는 ‘인간의 생산과 소비를 유지하는 지구 자연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 정책이 지속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 인류 전체의 장래를 위협하는 주요 요소로 ① 대중적인 빈곤 ② 인구 성장 ③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 ④ 환경질의 파괴 등 네 가지를 들었다. 이어 이 같은 위협에 대한 대안으로 ‘미래 세대의 욕구를 제약하지 않으면서도 현세대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개발’이라는 ‘지속 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하였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지속 가능한 발전과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개념의 기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지속 가능한 산림경제의 관점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1713년 폰 카를로비츠가 최초로 이 개념을 사용했을 때는 산림청장이라는 그의 직업에 걸맞게 “벌목량은 새로 심은 나무의 성장에 의해 보충될 수 있을 만큼만 허용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었다.4) 반면에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1971년 스위에 푸넥스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탄생했다. 부의 창출 및 재화의 생산과 자연에 대한 존중이 양립할 수 있다는 전제 속에서 자연의 훼손 및 자원의 약탈적 활용에 대해 경고하는 동시에 사회적 발전의 필요성 역시 중시하는 ‘생태개발ecodevelopmet’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태동하였다.5) 결국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지속가능성에 중점을 두느냐, 발전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두 가지 세력 – 생태적 관점과 경제적 관점 - 으로 나눠지게 된다.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유엔 환경개발회의UNCE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 Development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환경에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고, 여기에서 리우 선언문과 의제 21이 채택되었다. 참가 국가들이 합의한 의제 21은 환경 보전과 경제 개발을 지구적 수준은 물론 국가적・지역적 수준으로 연계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려면 지속 가능성에 기초하여 경제의 성장, 사회의 안정과 통합 및 환경의 보전이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발전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우리는 ‘지속 가능한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의 역량을 훼손하지 않고 현재의 욕구에 잘 대응하는 사회”가 지속가능한 사회이다. 

  

이로부터 20년 뒤인 2012년 6월 같은 장소에서 ‘유엔지속가능발전회의UNCS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Sustainable Development’가 열렸다. 바로 리우+20 정상회의이다. 이 회의에서는‘우리가 원하는 미래The Future We Want’라는 제목의 선언을 채택하여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며 경제 위기, 사회적 불안정, 기후변화, 빈곤퇴치 등 범지구적 문제 해결의 책임을 다시 강조하고 각국의 행동을 촉구했다. 또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중요한 도구로 ‘녹색경제Green Economy’의제를 채택하고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를 설정하는 절차에 합의했다.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 정립 과정


2015년 9월 뉴욕에서 열린 제70차 유엔총회에서는 2015년 만료된 새천년개발목표MDG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의 뒤를 잇는 지속가능발전목표를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이행하기로 결의한다. ‘2030 지속가능발전의제’라고도 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는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것Leave no one behind’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인간, 지구, 번영, 평화, 파트너십이라는 5개 영역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17개 목표와 169개 세부 목표로 제시하였다. 


2030년까지 달성해야 할 17가지 지속가능발전목표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현시점에서 인류가 합의한 생태적 사유에 대한 글로벌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다.


3. 생태시민을 위한 파이데이아      

  

2020년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2030년의 세계’ 설문조사를 통해 세계시민이 마주하게 될 가장 시급한 과제로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손실(67%), 폭력과 갈등(44%), 차별과 불평등(43%), 식량과 물, 주택 부족(42%) 등을 도출하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 및 과학 분야의 국제 협력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 회복, 다양성에 대한 존중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95%의 세계 시민들이 국제 협력의 중요성에 공감했으나 우리 세계가 공동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단지 25% 만이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전 세계적으로 탄소중립과 에너지전환 논의가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시 주춤했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글로벌 경기 회복과 함께 되려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탄소 배출량은 올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인류를 위한 22세기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팬데믹의 어원이 그리스어 ‘판Pan’과 ‘데모스Demos’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연과 문명을 넘나드는 ‘모두’의 의미를 지닌 판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을 대표하는 ‘시민’의 의미를 지닌 데모스가 만나면 곧 ‘생태시민’이 된다. 즉 팬데믹의 유일한 해결책은 생태시민에 의한 생태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생태시민이란 전 지구적 기후위기 상황에 대한 민감성과 책임감을 가지고존엄의 가치를 비인간 생명으로 확장하여 모든 생명체가 지구라는 시스템의 구성원으로서 상호 의존적임을 이해하고 공존의 삶을 실천하는 시민이다.  

  

따라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생태시민을 양성하는 사회․정치적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교육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그리스어로 ‘교육’을 의미하는 ‘파이데이아paideia’는 모든 제도의 총체적 네트워크인 폴리스를 교육자로 인식했다. 아테네에서 교육은 특정 시간 동안 특정 장소에서 인생의 특정 시기에 수행되는 분리된 활동이 아니었다. 교육은 곧 사회의 목적이었다. 도시가 사람들을 교육했다.6) 아테네 시민들이 파이데이아에 의해 교육되었듯이 생태시민을 위한 생태적 파이데이아가 필요하다. 

  

유네스코에서는 1972년 발간한 『존재하기 위한 학습 ‐ 교육 세계의 오늘과 내일Learning to Be ‐ the World of Education Today and Tomorrow』을 통해 근대 교육 체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 속에서 교육도시cité éducatif라는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여기서  ‘도시’는 상호연결성 속에서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을 포괄하는 공간에 대한 은유다. 물론 이것이 세상 전체를 거대한 교실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7) 학교를 교육을 위한 고유의 시공간으로 보호하면서, 동시에 ‘슬기로운 지구 생활’을 위한 배움이 전 생애에 걸친 시간과 공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4. 생태적 파이데이아를 위한 교수학적 원리     

  

생태적 파이데이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에 대한 전환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가르침과 배움은 이분법적으로 분할되지 않는다. 학생의 발달은 연령으로 구획되지 않으며 교육은 평생의 과업이 된다. 배움의 공간은 확장되며 학교의 의미는 재정의된다. 브렌트 데이비스는 교수행위의 개념을 우주의 본성에 따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지식의 원천에 따라 그노시스/에피스테메와 간주관성/간객관성으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인식론의 관점에서 신비주의/종교, 합리주의/경험주의,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복잡성 과학/생태주의로 나누고 있다.8)



중요한 것은 이 계보도가 프랙탈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각 부분의 교수행위는 전체와 닮은꼴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교사의 가르침에는 그/그녀가 지향하는 중심 교수행위가 있지만 항상 단일한 것은 아니며 다양한 교수행위가 혼재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브렌트 데이비스의 구분에 따라 간단히 살펴보자.    

 

가. 형이상학적 뿌리

[그노시스]

  1) 신비주의 
  ☞ 가르침이란 이끌어내는 것이다(educating)
  (의미) 사람은 원래 지식을 갖고 태어나지만 충분히 현실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가르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태초부터 그 존재에 얽혀 있는, 그곳에 이미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2) 종교 
  ☞ 가르침이란 훈련시키는 것이다(disciplining)
  (의미) 가르침은 소명의식을 필요로 한다. 교육이란 약속된 땅을 찾아가는 것, 즉 이미 만들어진 진리의 체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자는 권위가 있어야 하며 그만큼 가르침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에피스테메]

  3) 합리주의
  ☞ 가르침이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instructing; lecturing)
  (의미) 타당한 지식은 논리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르침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내용들을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들부터 점점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 순서로 교육과정에 담아 잘 설계된 교수법에 의해 구조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4) 경험주의
  ☞ 가르침은 진단하고 교정하는 것이다(diagnosing; remediating)
  (의미) 교육은 (가급적 많은) 미성숙한 아이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정상적인 발달단계가 설정되고 연령 적합도에 따라 교육내용들이 배열된다. 가르침은 평균적인 기준에 따른 진단과 처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     


나. 형이하학적 뿌리

[간주관성]

  5) 구조주의
  ☞ 가르침은 촉진시키는/본을 보이는 것이다(facilitating; modeling)
  (의미) 학습은 지식을 전수받거나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학습자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을 변경시키는 것이다. 또한 학습자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결코 고정되거나 완성되지 않는 자신의 세상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인지 주체이다. 따라서 가르침은 배움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교수-학습은 학생이 교사의 의도를 따라가면서 교사가 학생의 학습과정을 조율하는 상호 안무와 같다.

  6) 후기구조주의
  ☞ 가르침은 해방/전복시키는 것이다(emancipating; empowering)
  (의미) 진리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다. 따라서 지식은 문화적으로 우세한 해석과 선호의 습관을 구현하고 실행하는 지배적인 일련의 정체성들을 마스터하는 것이다. 서양의 지식이 동양의 지식보다 권위를 갖고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남성의 지식이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여성의 지식보다 선호된다. 가르침은 ‘정상성’에 도전하는 것이며, 지식의 감춰진 권력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간객관성]

  7) 복잡성 과학
  ☞ 가르침은 틀을 짜는/판을 벌이는 것이다(structuring; framing)
  (의미) 우리 모두는 행위자들agents의 집합체이며, 일관된 단위체이고 동시에 다른 창발된 단위체들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가르친다는 것은 개인적 지식과 집단적 지식의 생산, 개인적 정체성과 집단적 형태의 진화, 그리고 개인적 행위와 집단적 가능성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8) 생태주의
  ☞ 가르침은 대화하는/경청하는 것이다(conversing; caring)
  (의미) 앎과 함과 삶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기술이 아니라 교사의 태도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삶과 배움도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가르침/배움은 삶의 현장에 마음을 다해 참여하는 것이다.     


5. 교육빌린 행성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A Borrowed Planet - Inherited from our ancestors. On loan from our children. by Alisa Singer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생태적으로 성숙한 시민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 속에서 생태적인 삶의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다. 우리는 ‘빌린 행성’을 잠시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과거의 생명들로부터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생명들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다. 생태적 파이데이아에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상은 어제의 세상과 다르다. 우리는 점점 더 생태적으로 지혜로워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르침과 배움은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영역을 탐색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나가는 재귀적 과정이다. 교실은 재생산 또는 복제가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가능성의 공간을 확장하는 일이며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일에 가깝다. 이런 틀 안에서 교육이란 이미 존재하는 진리에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분화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개인 단위에서 지구 단위에 이른다. 교육은 그 의미에 진중히 참여하는 것이다.9) 



1) 청소년기후행동, 「우리의 요구」


2) 이현정(2022). 기후정의의 정치적 주체 되기. 창작과 비평 195호. 32-48쪽.


3) 2022년 5월 호주 국가기후복원센터에서 정책보고서 「기후 도미노 : 중대한 기후 시스템들이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위험신호」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온난화가 평균 1.2°C에 불과할 때에도 여러 거대한 지구 시스템들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으며, 예상보다 더 빠르게 연쇄작용이 닥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출처: https://ecosophialab.com/)


4) 오르트빈 렌, 안냐 크나우스, 한스 카스텐 홀츠(2000). 지속 가능한 미래로의 길. 『아젠다 21』 생각의 나무.


5) 로이크 쇼보(2011). 『지속 가능한 발전』 현실문화.


6) 국제교육발전위원회(1972). 존재하기 위한 학습: 교육 세계의 오늘과 내일. 유네스코한국위원회.


7) UNESCO(2021). 『함께 그려보는 우리의 미래 – 교육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 유네스코한국위원회. 


8) 브렌트 데이비스(2014). 구성주의를 넘어선 복잡성 교육과 생태주의 교육의 계보학. 씨아이알.


9) 브렌트 데이비스, 레베카 루스 케플러, 데니스 수마라(2017). 마음과 학습.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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