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스를 넘어, 5·31 교육개혁을 넘어
참고문헌
하연섭. 2015. 5.31 교육개혁 20년, 한국교육의 오늘과 내일. 교육개발
김형태. 2015. 20년 된 '5.31교육개혁안', 이제는 바꿔야 한다. 오마이뉴스
김재웅. 2016. 5.31교육개혁 그리고 20년. 에듀인뉴스
안병영, 하연섭. 2015. 5·31 교육개혁 그리고 20년. 다산출판사
John White. 2016. 중등 교육과정, 그 역사와 철학. 학지사
5.31 교육개혁을 넘어
흔히 5.31 교육개혁으로 불리는 문민정부 교육개혁방안(’95~ ’97)은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적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 성과물로서, 이후 역대 정권들이 그 이념적 성격이나 정책지향과 관계없이 자신의 교육정책의 근간으로, 또 가장 중요한 준거의 틀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 의미에서 문민정부 교육개혁방안은 지난 20년 간 한국교육의 중심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략) 5.31 교육개혁처럼 과거 정책에 대한 치밀하고 포괄적인 평가 위에서 새로운 정책방안이 설계된 예는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 정권 교체와 더불어 이전 정부 정책과의 단절이 일상화된 우리나라 풍토에서 정책의 기본 방향과 내용이 이후 정부에서 큰 변화 없이 계승된 매우 드문 예이다.
- 하연섭, <5.31 교육개혁 20년, 한국교육의 오늘과 내일>
1995년, 당시 문민정부가 발표한 5.31교육개혁안은 초·중·고에서 대학까지 포괄하는 '교육정책 패키지'로, 자율과 다양성, 세계화를 목표로 23개 분야 120여 개 과제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 현재까지 학교 현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들이다. '교육의 수월성을 신장하기 위하여 각급 학교 운영에 자율과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는 한편, 소외계층과 지역을 위해서는 형평성이 확보되도록 하면서, 체계적인 평가를 통하여 교육의 질이 관리되도록 한다'는 것이 5.31교육개혁안의 추진원칙이었다.
- 김형태, <20년 된 '5.31교육개혁안', 이제는 바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혁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에 언제부턴가 교육개혁이라는 말은 듣기가 쉽지 않다. 교육혁명은 언감생심이다. 누군가는 "혁신, 개혁, 혁명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말보다는 실제로 나타나는 변화가 중요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혁신, 개혁, 혁명이라는 단어의 미묘한 차이 속에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기대값이 알게 모르게 내포되어 있다. 혁신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교육혁신은 일반적으로 학교혁신을 의미한다. 또한 수업혁신은 학교혁신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수업이 혁신이 되어야만 학교가 혁신이 되고 학교가 혁신이 되어야만 교육이 혁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즉 교육혁신은 교사혁신으로 수렴하게 된다. 그것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교육혁신에 대한 논의는 "국가 중심, 공급자 중심에서 시장 중심, 수요자 중심으로 옮겨가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김재웅, 2016)" 5.31 교육개혁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의 첫 교육계 수장이었던 김상곤 전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교육개혁에 대하여 "개혁의 핵심은 특권으로 불평등하고, 경쟁만능으로 서열화되어 있는 불행한 교육체제를 바꾸는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5.31 교육체제의 탈피를 예고했으나, 결론적으로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한때 경기도교육청의 존경받는 교육감으서 경기도의 혁신학교를 전국적 차원의 학교혁신운동으로 이끌었던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최소한 교육부에 - 어쩌면 청와대에 - 중등교육의 혁신을 넘어 사회·문화의 개혁과 교육의 개혁을 입체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역량 또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2022 대학수학능력시험 개편안에 대한 그간의 처리과정을 떠올려 볼 때 이러한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간다.
신임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김상곤 교육부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까? 교육개혁의 불씨를 살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취임사만 놓고 본다면 희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으나 현상유지는 커녕 전보다 더 퇴보하지는 않을봐 우려되기까지 한다. 취임사에서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언하였으나 그것의 실체는 모호하기만 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5.31교육체제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인가? '미래교육위원회'를 통해 "미래인재양성 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국가 주도의 미래와 인재와 양성의 결합은 5.31교육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래교육위원회는 국가교육위원회의 역할도 유명무실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진정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중등 교육과정의 발명
존 화이트John White의 <중등 교육과정, 역사와 철학>의 원제는 The Invention of the Secondary Curriculum, 즉 중등 교육과정의 발명이다. 화이트에 따르면 오늘날의 중등교육은 "발명"된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교육개혁운동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공교육이라고 말하는 현대 중등교육은 라무스-코메니우스로 대표되는 라무스-포스트라무스주의의 산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형태의 교수법에 의해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로 그리고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라무스가 대안으로 찾아낸 교수법은 명확하게 분할될 수 있는 지식의 형식들 안에서 지식의 항목을 논리적으로 조직화하는 새로운 '방법method'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라무스는 새로운 인쇄기술을 활용함으로써 그의 수많은 교과서에서 각 교과의 주요 특성을 한 페이지로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은, 나무 모양의 그림으로서, 대체로 이분법에 의거하여 해당 교과의 가장 추상적인 특성부터 가장 구체적인 특성까지 밝혀 주었다.
- 존 화이트, <중등 교육과정, 역사와 철학> 30쪽
특권층이 아닌 학생들에게 특권층이 받고 있던 교육을 전수함으로써 그들이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던 라무스는 학생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광범위한 지식을 빠른 시간 내에 전달할 수 있는 '방법method'을 고안했다. 그의 방법은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했는데 첫째, 교과 내용의 항목들은 모두 보편적으로 참이어야 한다(진리의 법칙). 둘째, 그런 항목들은 모두 적절한 범주 속으로 함께 모아져야 한다(교과의 분할). 셋째, 각 교과 안에서 자료가 제시되는 순서는 일반적인 정의로부터 시작하여 특수한 성질들에 도달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교육적 배열). 라무스의 방법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이들은 '강의-개인공부-피드백' 방식을 좋아했고, 교과 주제의 시각적 제시와 체계화된 교과서 혹은 '요약집compendia'에서 효율적 학습의 지름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면서 존 화이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교육과정을 그런 방식으로 조직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 수학, 역사, 국어 등에 대한 이해는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교과들에서 어떤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례를 따를 것이 아니라 옹호받을 수 있는 교육목적을 따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화이트는 기존의 교육과정 체제을 옹호하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현재의 중등 교육과정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명된 것인지 이 책을 통해 살피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현재의 중등 교육과정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할 그 어떤 정당성도 찾을 수 없다. 왜 그런가? 그 단초를 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찾았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로, 기득권층에 속하는 가정에서는 자기 아이들이 시험을 더 잘 보게 하려고 사립학교나 사교육에 상당한 교육비를 투입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밖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런 이유 때문에 교육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더 성공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
- 존 화이트, 앞의 책 15쪽
‘세상의 모든 사람omnes에게 모든 것omnia을 철저히omnino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라무스/포스트라무스주의 이상의 산물인 근대 중등 교육과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를 지금 우리의 상황에 대입해보자. 우리가 현재 중등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배우는 내용은 관례를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과연 옹호받을 수 있는 교육목적을 따르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교육부 고시 제2015-80호 [별책 1]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
이 교육목적을 누가 정했는가, 이것이 여전히 유효한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우리의 교육체제가 이 교육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적합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우리에게 있었는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5.31 교육체제를 넘어서는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쩌면 그것은 초-중-고-대로 이어지는 - 그리고 결국은 교육의 모든 것이 대학입시로 수렴되고 마는 - 전통적인 교육과정을 재검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학가기 위해 공부한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니다. 중등교육은 고등교육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전통적인 교육과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새로운 교육과정을 상상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상상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 옹호받을 수 있는 교육목적에 따라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누가 교육과정을 결정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매우 정치적이다. (앞으로 발족될 국가교육위원회의 구성은 "누가 교육과정을 결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문재인 정부 - 그리고 유은혜 교육부 - 가 어떤 교육철학과 비전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준느 시금석이 될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이들이 5.31 교육체제의 전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위 4.16 교육체제의 실체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촛불은 적폐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국가교육위원회가 안병영과 하연섭이 함께 쓴 <5.31 교육개혁, 그리고 20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안병영은 김영삼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고(1995. 12.∼1997. 8.)와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총리를 역임하였으며(2003. 12.2005. 1.) 하연섭은 안병영의 제자로서 김대중 정부 시절 안병영 교육부총리의 정책보좌관을 역임한 바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 추진한 5.31 교육개혁의 창안 및 집행과정과 그 이후 정부들의 교육개혁에 대한 평가, 그리고 교육정책의 미래 방향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난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교육과정이어야 하는가?" 즉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답변 역시 매우 중요하다. 존 화이트는 교육과정이 "잘 삶이라는 목적"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두 가지 질문을 야기한다. 첫번째는 전통적인 교육과정을 옹호하는 현재의 학교제도가 이 목적에 유효한가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더욱 어려운 질문이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명문대 입학 - 정규직 취업 - 내집 마련이라는 시대정신과 이왕이면 서울 강남에 살고, 이왕이면 땅도 좀 있고, 이왕이면 건물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우리 사회의 - 감춰진,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 민낯을 진솔하게 대면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묻는다. 과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육은 이 질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직한 답변이 되어야 한다. 더이상 어른이 아이들에게, 교사가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더이상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과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육은 이 질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직한 답변이 되어야 한다. 더이상 어른이 아이들에게, 교사가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더이상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