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 우리를 물들인 차별과 혐오의 성문화, 교육의 역할을 찾다
교육정책토론회
차별과 혐오의 성문화, 교육의 역할을 찾다
차별과 혐오를 넘어: 학교는 성평등과 성권리를 체화하는 ‘교복 입은 시민’을 키워낼 수 있을까?
‘디지털 시대의 차별과 혐오의 성문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은 SNS라는 사이버 공간을 통해 차별과 혐오가 공진화하고 재창조 된다는데 있습니다. 이에 반해 학교의 시간과 공간은 여전히 선형적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평등 정책이 만들어지더라도 교육과정에 삽입하고 공문을 통해 학교로 내려 보내는 방식으로는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없습니다.
서울시교육청 목소희 전문관님께 ‘성평등성, 성권리를 체화하는 민주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와 사회의 역할’에 대해서 제안해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여전히 4차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한 인재육성이 더불어 살아가는 민주시민 양성보다 훨씬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게 학교만의 문제일까요? 학교는 사회의 거울입니다. 학교에 확산되는 차별과 혐오의 성문화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기성세대의 적폐와 구조적으로 동조화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평등과 성권리를 학교와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실제로 산출해내지 않고서는 이를 체화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역할을 묻는다면? 사실 현재의 학교 시스템 내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근본적인 교육체제의 변화를 가정한 상태에서 몇 가지 생각해볼 지점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교육과정에 대한 고민
먼저 교육과정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과정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2015 개정 교육과정처럼 ‘문서화된 교육과정’입니다. 이때의 교육과정은 교과들의 목록이나 교과별, 학년별 교수 내용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둘째, 학교에서 ‘교육계획’에 따라 일정한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지칭합니다. 이때의 교육과정은 학생의 입장에서는 학습해야 할 내용이고 교사의 입장에서는 가르쳐야 할 내용이 됩니다. 셋째,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는 ‘학습 경험의 총체’를 뜻합니다. 즉,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갖게 되는 의도되고 계획된 경험이 곧 교육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정리가 다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해숙 선생님께서 쓰신 <초중등학교 양성평등교육 활성화 방안>과 같은 보고서에 교육과정에서 성평등이 어떻게 다뤄져야 할지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서화된 교육과정이나 학교교육계획의 변화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간과되어온 학습경험의 총체로서의 교육과정, 즉 잠재적 교육과정에 대한 주의 깊은 접근이 필요합니다. 즉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재생산되는 차별과 혐오의 성문화에 대한 구성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육에 있어서의 구성주의는 실제 세계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통하여 학습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구성주의 인식론에 바탕을 둔 수업은 ①학습자로 하여금 경험을 통하여 개인적 반성활동을 하게하고, ②그 반성 활동을 통하여 나름대로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개발하도록 하며, ③나아가 사회적 통념이나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자신의 지식을 검증하고 그 결과에 터하여 지속적으로 지식을 변형, 생성해 나가도록 돕습니다.
교육과정은 교무실에서 목표나 계획의 일람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실의 일상 속에서 나날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실제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학습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지식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성평등 교육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2016년 5월 17일 ‘강남 살인사건’에 대한 공감과 애도의 행동 –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발언을 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든 교실 뒤편에 추모의 공간을 마련하든 – 은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러한 행동을 통해 실제로 세계는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수행평가에서 수행이 뭔가요? 영어로 퍼포먼스입니다. 그런데 퍼포먼스는 어떤 현장성을 갖는 느낌이 남아있는 반면 수행이라는 말은 그렇지 않죠. 거기에다가 평가라는 말이 붙은 순간 그냥 교실 속에서 벌어지는 시험의 한 종류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적어도 성평등교육에서는 평가가 아닌 수행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봅니다. 수행이라는 말의 수행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프로젝트 수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로젝트에 방점이 찍히려면 교실 밖, 더 나아가 학교 밖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계를 넘어선 배움이 필요합니다.
학생자치에 대한 고민
잠재적 교육과정의 중요성 인식과 교육에 대한 구성주의적 접근은 필연적으로 학생을 어떻게 교육의 주체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혁신적인 성평등 교육과정이 제시되더라도 그것이 관리와 훈육이라는 교수주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 성평등 교육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평등성, 성권리를 체화하는 민주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정말로 시민으로서의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시교육청의 ‘교복 입은 시민’ 프로젝트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 학교정책과 교원정책만 있고 학생정책은 없을까요? 교육복지라는 시혜적 입장이 아닌, 학생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정책으로서의 학생정책. 이것이 너무 허황된 생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학생인권조례를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제5조(차별받지 않을 권리) ① 학생은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병력, 징계,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제6조(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① 학생은 체벌, 따돌림, 집단괴롭힘, 성폭력 등 모든 물리적 및 언어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 ② 학생은 특정 집단이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에 기초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설하는 행위나 모욕,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 ③ 교육감,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체벌, 따돌림, 집단괴롭힘, 성폭력 등 모든 물리적 및 언어적 폭력을 방지하여야 한다.
제18조(자치활동의 권리)① 학생은 동아리, 학생회 및 그 밖에 학생자치조직의 구성, 소집, 운영, 활동 등 자치적인 활동을 할 권리를 가진다.②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학생자치조직의 구성과 소집 및 운영 등 학생자치활동의 자율과 독립을 보장하고 학생자치활동에 필요한 행·재정적 지원을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후략)
제20조(정책결정에 참여할 권리)① 학생은 학교의 운영 및 서울특별시교육청(이하 "교육청"이라 한다)의 교육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후략)
학교는 사회와 분리된 공간이 아닙니다. 학교는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학교 자체가 하나의 사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차별과 혐오의 문화에 대하여 발언하고 개입하는 행동은 그 자체로 학교를 차별과 혐오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며,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혐오에 대하여 학생들이 단순히 학습자가 아닌 당사자로서 접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를 개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교사의 역할에 대한 고민
이러한 성평등교육 패러다임의 변화가 교사의 역할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차별과 혐오의 시대에 교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째, 교사는 성인지적 관점에서 반성적 실천가가 되어야 합니다. 성평등 교육만큼 ‘정의로운 차등’이 고려되어야 할 영역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는 교사의 교육적 판단과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교사의 반성적 실천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둘째, 교육에 있어서의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실력 있는 인재양성’이라는 국가주의적 시각을 넘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기결정권을 갖는 주체적 인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셋째, 성인지적 관점에서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의 양육과 돌봄에 있어서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이것이 고용문제나 저출산 문제와는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사는 학교와 학교 밖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와 사회는 구조적으로 동조화되어 있습니다. 즉 학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사회의 문제에 입장을 갖고 발언하는 것이 곧 지식을 생성하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교사는 학교 내의 학습 공동체의 연결 뿐만 아니라 학교를 지원할 수 있는 다양한 학교 밖 자원과 학교를 연결하고 이를 통해 성평등성과 성권리의 체화의 장을 실질적으로 마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은 성평등 교육정책 연속토론회 “디지털시대 우리를 물들인 차별과 혐오의 성문화, 교육의 역할을 찾다” 정책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학교는 사회와 분리된 공간이 아닙니다. 학교는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학교 자체가 하나의 사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차별과 혐오의 문화에 대하여 발언하고 개입하는 행동은 그 자체로 학교를 차별과 혐오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며,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혐오에 대하여 학생들이 단순히 학습자가 아닌 당사자로서 접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를 개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