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 애치먼, 「호모 이레알리스-비현실적 인간」을 읽고
함께 읽는 책 No. 37
안드레 애치먼(2023). 『호모 이레알리스-비현실적 인간』
비현실의 시간
살면서 문득 회귀하게 되는 특정한 시간대가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를 떠나보냈지만 아직 어머니는 곁에 계셨던 2006년에서 2010년 사이의 어떤 시간대나 대학을 다녔던 1992년에서 1998년 사이의 어떤 시간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안에서의 어떤 시간대처럼. 특히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두 가지 시간이 있다. 기억이 너무나 강렬하여 그 때의 '나'는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그'처럼 느껴질 정도다.
휴일 아침 여덟 살 소년은 잠에서 깬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강렬한 햇살.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삶의 유한함. 눈물이 흐른다. 암전. 또 하나의 시간. 스물세 살 청년. 아르바이트가 없어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온 날. 어머니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날씨는 화창한데 나는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에 눕는다. 앞으로 이십 년 후 혹은 삼십 년 후 마흔 살이 훌쩍 넘은 나를 상상한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와 끊임없이 조응한다.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해서 비실제적이진 않았으며, 여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끝내 일어나지 않을까봐 두렵고, 때로는 아직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도 하지만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안드레 애치먼의 이 한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호모 이레알리스(Homo Irrealis). 비현실적 인간. 이제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다. 3년 만의 일이다. 하지만 지하철 안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이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3년 전의 비현실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스스로를 현실적/비현실적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현실적 인간에게 시간이 상수인 반면, 비현실적 인간에게 시간은 변수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현재가 미래를 바꾸듯 미래도 과거를 변경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평행우주가 명멸한다. 완성된 텍스트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수많은 컨텍스트들이 생성된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이고 비실재적이다. 미래는 끊임없는 추론과 끊임없는 지연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채비를 갖추고 대기 중이다.
카이로스의 시간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두 가지 시간 개념이 존재했다. 하나는 순차적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k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순환적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는 연대기(chronicle)의 시간이다. 정량화하고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축제와 환상의 시간이다. 그것은 통제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앞뒤로 여기저기서 시작도 끝도 없이 춤을 추는 경계가 없는 시간이다.
호모 이레알리스, 비현실적 인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페르난두 페소아는 “나는 미래가 그립다. 뒤돌아보며 이 모두를 그리워할 미래가 그립다”라고 썼다. 비현실적 인간은 현재라는 텍스트를 창조적으로 오독하는 존재다. 그는 아직 오지 않은, 그저 잠재되어 있는 미래를 그리워하며 비현실적 현실과 현실적 비현실 사이를 참을성 있게 오고 간다. 이 모두를 그리워할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 시간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공간의 이동을 위한 장치가 비현실적 서법이다.
비현실적 서법(非現實的 敍法; irreals mood)은 동사적 서법의 한 범주이며 일어난 적이 없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없거나, 일어나야 하거나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그럴 만한 조짐이 없는 특정 사건을 암시한다. 비현실적 서법은 생각하기는 고사하고 글을 통해 제대로 옮길 수조차 없지만 우리의 삶에 엄연히 존재한다. 예술과 교육의 영역이 대표적이다. 예술가가 ‘현실 세계’에서 보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보듯이, 교육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존재하기를 소망하는 것들의 목록을 역량 혹은 잠재력이라는 개념으로 범주화한다.
“우리가 흔히 주장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현재 시제가 아니라 비현실적 서법으로 보낸다. (…) 우리가 여러 시제와 서법을 단편적으로 오가는 이유는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듯한 이런 표류 속에서 현재 살거나 예전에 살았던 방식이 아니라 그렇게 살려고 했으며 그렇게 살았어야 했던 방식의 삶을 언뜻언뜻 보기 때문이다.”
학교의 시간
다니엘 페낙이 『학교의 슬픔』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공부 못하는-앞날이 없다고 여겨진-학생’들은 학교에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는 것은 한 개의 양파다. 수치스러운 과거와 위협적인 현재와 선고받은 미래라는 바탕 위에 축적된 양파. 수업은 그 짐이 땅바닥에 내려지고 양파 껍질이 벗겨져야만 진정으로 시작될 수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비현실적 시선이다. 일어났을 수도 있었으나 일어난 적 없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비실재적이지 않으며 여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을까 봐 초조하고 때때로 일어나지 않거나 아직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도 하는 단 하나의 시선, 호의적인 말 한마디, 믿음직한 어른의 말 한마디, 분명하고 안정적인 그 한마디면 충분히 그들의 슬픔을 녹여 내고 마음을 가볍게 하여 환대의 시공간으로 초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학교는 아이들을 꽁꽁 얽매고 있는 현실로부터 유예시키는 비현실적 시공간이며, 교사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서 모호함을 숙명처럼 견뎌내야 하는 비현실적 인간이다.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해서 비실제적이진 않았으며, 여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끝내 일어나지 않을까봐 두렵고, 때로는 아직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도 하지만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