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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Nov 03. 2019

교육자치가 불가능한 이유

교육자치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교육자치 시대의 교사: 교사 전문성의 새로운 지평

02. 교육자치가 불가능한 이유


왜 교육자치를 말하는가? 누가 교육자치를 말하는가? 교육자치를 말하기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교육자치의 핵심은 가르침과 배움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없는 교육자치는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모든 국민은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육 받을 권리를 가집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그것이 교육자치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육자치는 오직 가르침과 배움의 옹호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학교는 가르침에 대한 존중과 배움에 대한 경탄이 넘쳐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는 교육자치의 구조 속에서 배움과 삶이 선순환하는 지속가능한 사회의 공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학교 자율운영체제를 정점으로 하는 교육과정 거버넌스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교육자치 시대의 교사 전문성이 새로운 상상을 필요로 하는 까닭입니다. 

사진출처 : https://www.edutopia.org/blog/five-ways-increase-teacher-agency-professional-development-anne-obrien




교육자치는 불가능하다


바로 옆의 선생님과도 의견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교무회의도 제대로 진행이 안 되는 것 같고요. 동교과회의도 마찬가지고. 학교자치도 안 되는 상황에서 교육자치가 가능할지 의구심이 듭니다. 지금 드는 생각은 현재 학교에서 하고 있는 모든 업무들은 그대로 하는 가운데 ‘교육자치’ 업무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말로만 교육자치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교육자치를 하면 어떻게 학교의 역할이 바뀐다는 것인지 정부(교육부)에서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교사들 대다수가 학교를 입시기관이라 생각하는데, 변화를 거부하는데... 관두지도 읺으면서, 짤리지도 않으면서... 외부에서는 그렇게 봅니다. 자치란 개념은 교육 “주체”로서의 자각이 필요할텐데 그 과정 없는 이런 논의는 현실과 괴리된 또 그저그런 퍼포먼스에 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치엔 책임이 따르는데 그걸 정말 교사들이 원할까 싶어요. 지금같은 상황에서요. 초중등교육자들이 아무리 뭘 하려 해도 대학이 달라지지 않고, 사회가 달라지지 않으면 불가할테니까요.
(···)


첫 번째 인용문은 지난 8월 교원대학교에서 열린 대한민국교육자치컨퍼런스 자유토론 <교육자치 시대의 교사: 교사 전문성의 새로운 지평>에서 울산의 한 중학교 선생님께서 주신 의견이고, 두 번째 인용문은 <교육자치 시대의 교사>에 대한 저의 첫 번째 글(https://brunch.co.kr/@ysh2084/58)에 대해서 서울의 한 중학교 선생님 - 혁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왔고 지금은 대안수학교과서를 통한 새로운 수학교육운동을 펼치고 있는 - 께서 주신 의견입니다. 한마디로 "교육자치는 시기상조다"라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주장의 속마음에는 학교현장이, 특히 교사들이 교육자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강한 우려가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우려 또는 (좀 더 나아가면) 불신의 시선은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학교 외부의 불신의 시선과 학교 내부의 저항의 동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혼재되어 있어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유명한 논쟁의 복사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번 글에서 "관료적 행정체계라는 것이 정부와 시도교육청에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많은 교사들이 학교의 현실에 대해서 개탄하면서 교육의 불가능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교육 불가능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따지고 들려 치면 현실을 너무 모른다거나 또 다른 일로 귀찮게 하지말라고 외면합니다. 이는 학교가 입시기관화 되어 있으며 획일적인 암기식·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과중심의 전달식 수업이나 줄세우기식 평가에서 탈피하여 삶과 연관된 주제중심 수업 및 발달과 성장을 지원하는 과정중심평가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근거로 비판하는 우리 사회의 이중성과 놀랍게 닮아 있습니다.



여섯 가지 착각


이와 관련하여 정용주(2019)는 2011년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 교사들에  대한 신뢰와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 진보적인 교육정책들이 학교현장에서 어떻게 거부되었는가에 대하여 당시 현장교사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보여준 바 있습니다. 정용주는 (약간은 반어적으로) <'프로' 지식 관료가 평가하는 '아마추어' 진보 교육감의 일 년>이라는 글에서 곽노현 교육감의 ‘여섯 가지 착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1) 


착각 1 : 모든 교사들이 담임 평가권과 학급별 수시 평가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착각 2 : 모든 교사들이 학급 단위의 의미 있는 수학 여행을 희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각 3 : 교사들이 학습 부진 학생은 수업 중에 더 많은 배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믿었다

착각 4 : 모든 교사들이 참여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생각했다

착각 5 : 모든 교사들이 잡무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못 한다고 생각했다

착각 6 : 교사를 관료가 아니라 수업의 전문가라고 착각했다


우리는 흔히 교사는 관료 집단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관료를 생각할 때 교장, 교감, 행정 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버리고 승진의 길로 들어선 부장 교사들만 떠올린다. 이러한 구분법은 교사는 관료제의 외부에 존재하며 매우 자발적이고 자율적이며 전문적인 존재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반영한다. 그러나 교사는 매우 정교한 관료제 시스템을 지탱하는 '특별한 관료'이다.

- 정용주, <교육학의 가장자리> 46~47쪽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벌써 8년 전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과연 우리는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어떻게 반론을 펼칠 수가 있을까요? (정용주의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실 정용주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교사들은 수업의 전문가인 교사로 임용되었지만 공무원이라는 교육 관료로서 삶을 살아가길 강제당하고 있"으며 "결국 우리의 싸움은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교사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 싸움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두에 "왜 교육자치를 말하는가?" "누가 교육자치를 말하는가?"라고 질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사 스스로 선언하고 실천하는 교육자치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율성과 자발성은 국가에, 교육부에, 교육청에 만들어달라고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지만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은 그것이 창조되었을 때와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2)" 존 메이나드 케인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난관은 새로운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낡은 생각을 벗어나는 과정에 있다.3)"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역시 그 고정관념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은
그것이 창조되었을 때와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


정용주(2019). 교육학의 가장자리. 교육공동체 벗.


난관은 새로운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낡은 생각을 벗어나는 과정에 있다.
-존 메이나드 케인스 -




1) 정용주(2019). 『교육학의 가장자리: 교육에 대한 상상에서 파상으로』. 교육공동체 벗. 21~49쪽.


2)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cannot solve our problems with the same thinking we used when we created them.


3) 정용주(2019). 앞의 책.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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