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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Dec 02. 2019

삶을 위한 교육 #2

학교는 삶의 기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교육자치 시대의 교사: 교사 전문성의 새로운 지평

07. 삶을 위한 교육 #2


왜 교육자치를 말하는가? 누가 교육자치를 말하는가? 교육자치를 말하기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교육자치의 핵심은 가르침과 배움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없는 교육자치는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모든 국민은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육 받을 권리를 가집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그것이 교육자치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육자치는 오직 가르침과 배움의 옹호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학교는 가르침에 대한 존중과 배움에 대한 경탄이 넘쳐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는 교육자치의 구조 속에서 배움과 삶이 선순환하는 지속가능한 사회의 공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학교 자율운영체제를 정점으로 하는 교육과정 거버넌스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교육자치 시대의 교사 전문성이 새로운 상상을 필요로 하는 까닭입니다.

사진출처 : hhttps://urbact.eu/act-local-think-global

* 이 글은 매거진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에 수록한 글 '학교는 삶의 기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를 매거진 <교육자치 시대의 교사>의 흐름에 맞게 수정한 글입니다.




누구를 위한 교육과정인가     


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무엇을 배워야 할지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정하는 일입니다. 인류가 지구라는 터전을 빌어 살아오는 동안 축적한 통찰과 지혜를 보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교육과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교육과정이 고시된 1963년입니다. 제2차 교육과정 총론 중에서 ‘교육과정 구성의 일반목표’를 보면 교육과정을 “학생들이 학교의 지도하에 경험하는 모든 학습 활동의 총화”로 정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육과정의 의미는 매우 다양합니다. 일반적으로 교육과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지난 2015년 9월 23일자로 고시된 2015 개정 교육과정처럼 ‘문서화된 교육과정’입니다. 이때의 교육과정은 교과들의 목록이나 교과별, 학년별 교수 내용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둘째, 학교에서 ‘교육계획’에 따라 일정한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지칭합니다. 이때의 교육과정은 학생의 입장에서는 학습해야 할 내용이고 교사의 입장에서는 가르쳐야 할 내용이 됩니다. 셋째,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는 ‘학습 경험의 총체’를 뜻합니다. 즉,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갖게 되는 의도되고 계획된 경험이 곧 교육과정이라는 것이죠.     


이는 교육과정이 작게는 교실 현장에서, 크게는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국가 교육과정은 학교교육계획에 영향을 끼치고 학교는 개별교사의 ‘수업’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활동을 통해 학생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칩니다. 먼저 국가 수준 교육과정에 제시된 교육과정의 성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을 살펴보면 교육과정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가. 국가 수준의 공통성과 지역, 학교, 개인 수준의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교육과정이다.

나.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신장하기 위한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이다.

다. 학교와 교육청, 지역사회, 교원・학생・학부모가 함께 실현해 가는 교육과정이다.

라. 학교 교육 체제를 교육과정 중심으로 구현하기 위한 교육과정이다.

마. 학교 교육의 질적 수준을 관리하고 개선하기 위한 교육과정이다.       


교육과정의 성격을 규정할 때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것부터 나열하지 않을까요? 즉, 국가 수준의 공통성과 지역, 학교, 개인 수준의 다양성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어떻게 중심에 둘 수 있을지, 교육청, 학교, 교원뿐만 아니라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의 참여를 어떻게 유도할 수 있을지 이런 것들이 교육과정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고작 학교 교육 체제를 “교육과정 중심으로 구현”하거나 “학교 교육의 질적 수준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주체가 특정 연구 집단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이번 교육과정에서는 교육현장과 소통하는 교육과정 개발을 위해 교육과정 시안 연구진에 참여하는 현장교사의 비율을 40%이상으로 강제하고 교과별 내용 중복 해소 및 교과 간의 이해관계 조정을 위해 각계 인사와 교육과정 전문가, 현장교원 등이 참여하는 ‘국가교육과정각론조정위원회’를 구성·운영하였으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에서 보다시피 그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전문가주의는 교육에 대한 통합적 접근을 가로막습니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 했던가요. 교육개혁이 단순히 대입제도개선이라는 표면적 변화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에서 대입제도가 갖는 심층적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교육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구요? 그건 교육의 문제가 아닙니다. 절망과 추락을 양산하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구조를 직시하지 않는한 그 어떤 교육개혁도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정권의 이해관계를 떠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사회적 교육과정 위원회’를 법제화 하고 이를 통해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한 교육과정을 수립,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육 자치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고 사회적 합의수준마저 낮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역시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위원 구성에서부터 난항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말로만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교육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약속 하에 교육과정 위원회의 구성으로부터 권한과 기능, 시기, 절차 등을 법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의 주체가 교육과정의 수립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헌법적 가치에 기반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로부터 시작하여 체계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교육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구요? 그건 교육의 문제가 아닙니다. 절망과 추락을 양산하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구조를 직시하지 않는한 그 어떤 교육개혁도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교육과정 이전에 삶이 재구성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교육의 주체라 하면 교사, 학생, 학부모를 꼽습니다. 이 중에서도 현실적으로 교육과정의 실행자라고 할 수 있는 교사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교사의 역할이 단순히 교육과정을 전달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면, 최근에는 교육과정을 보다 능동적으로 실행하며, 더 나아가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것까지 교사의 전문성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즉 교사가 교육과정의 재구성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최근에 교육과정에 대한 성찰로부터 교육과정 재구성의 실천사례까지 다양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란 말은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용어입니다.     


학교 교육에서 일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육 계획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현실 사회와 유리된 획일적 경향이 나타난다. 모든 사물이 지역성과 역사성에 규제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 각 지역 사회에 존재하는 학교도 마땅히 그 지역 사회와 밀접 불가분의 관련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각 학교의 교육 목적, 교육 방법, 교육 평가 등이 이러한 지역성을 등한시하고 획일적으로 다루어져 왔기 때문에, 지역 사회의 교육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함을 시정하여 사회에서 요구되는 산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각 지역 사회의 학교는 국가적 기준에 의거하여 각 지역 사회의 실정에 맞는 교육 과정을 재구성하여야 한다.     

- 제2차 교육과정 총론, <교육과정 개정의 취지>     


제2차 교육과정이 고시된 1963년에 이미 “현실 사회와 유리된 획일적 경향”을 우려하면서 “각 지역 사회의 실정에 맞는” 교육 과정의 재구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하면서 기치로 내건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역시 일종의 교육과정의 재구성의 방향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교육과정이 나온 지 50년이 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덟 번의 교육과정 개정이 있었습니다.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주창한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교육과정의 재구성”을 이야기해왔지만 “현실사회와 유리”되지 않은 교육과정은 여전히 요원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어쩌면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란 것이 현재의 교육과정에 대한 긍정 또는 묵인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설정한 게임의 규칙에 대한 의문은 일단 덮어둔 채 주어진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최선의 선택을 하겠다는 발상이 곧 '교육과정의 재구성'인 것은 아닌가요. 혁신학교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배움이 시험과 입시를 위한 지루한 노동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이 실제 삶과 무관한 것은 아니며, 학생들의 자발성을 끌어낸다면 현재의 교육환경에서도 내적 성장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혁신학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공교육의 최전선에서,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험난한 파고 속에서 기꺼이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붇는 이들의 노고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교육 주체들의 자발성은 퇴색되고 성장은 스펙의 다른 말이 되기 일쑤입니다. 학교 현장의 궂은 일들은 모두 ‘비정규직’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성과’라는 괴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대학입시'라는 성과 말이죠. 혁신학교 역시 '성과'라는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이 거대한 낭비의 종착점이자 모든 교육적 에너지의 블랙홀인 대학입시를 피해갈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 것인가? 이렇게 해서 혁신학교의 트랙을 따라 나온 아이들을 기다리는 현실이 청년실업, 비정규직, 극악한 지위경쟁이라면 혁신학교는 결국 또 하나의 희망고문이자 문제의 떠넘기기 곧 ‘폭탄 돌리기 게임’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육불가능의 이야기는 혁신학교가 집중하는 ‘수업과 학교문화’로 수렴되는 ‘배움의 적응’이 아니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가’라는 ‘다른 배움’의 이야기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의 교육 체제를 어떻게 새롭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체제 전환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연관되는 ‘삶의 기술’,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미리 살아가는 ‘연습’의 과정들을 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진입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 이계삼, <혁신학교는 답이 아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가? “청년실업, 비정규직, 극악한 지위경쟁”을 묵인하는 한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는 가져올 수 없습니다. 삶과 배움이 일치하는 교육과정을 논하기에 앞서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삶을 위한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확실한 것은 좋은 삶, 더 나은 삶,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뚜렷한 상이 없다면 삶을 위한 교육 역시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삶을 위한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확실한 것은 좋은 삶, 더 나은 삶,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뚜렷한 상이 없다면 삶을 위한 교육 역시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신계급사회의 도래     


얼마 전 "네 얼굴은 C급이고, 수저(가정 형편)는 B급이야."라는 도발적인 헤드라인이 붙은 신문기사가 실렸습니다. "최근 각 방송사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빠진 학생들이 친구들의 외모·성적·끼·집안 사정의 순위를 매겨 학교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1) 


영어 표현 중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 은식기를 사용하던 유럽 귀족층에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대신 유모가 젖을 은수저로 먹이던 풍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몇년 전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 표현이 이제는 청소년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입니다. 집안의 재산 정도에 따라 자신의 처지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로 분류하는 ‘수저 계급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연상되는 이 용어의 등장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2015년 “경쟁이 없다면 선택도 없다”, “사익이 세상을 발전시킨다”, “격차는 자연스러운 것” 등의 문구를 화장실에 내걸어 논란을 일으킨 자유경제원이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이 그의 책 <위대한 탈출>을 통해 “불평등이 성장을 촉진시킨다”고 주장한 것처럼 오역하여 영문 원본을 출판한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로부터 시정요구를 받은 한국경제신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이제는 거리낌 없이 불평등을 주장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쟁과 불평등은 전혀 다른 용어입니다. 경쟁은 필요하지만 기회와 과정과 결과에서 평등이 이루어질 때에만 경쟁은 개인과 사회에 유익한 것이 됩니다. 피가 난무하는 옥타곤에서 가장 원초적인 경쟁을 벌이는 종합격투기 선수들조차도 같은 체급끼리 붙고, 동일한 룰의 적용을 받으며, 비록 시합에서 졌을지라도 대전료를 지급받습니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종합격투기의 세계보다 낫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TV 프로그램 <복면가왕>은 처절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수저의 빛깔을 가리고, 계급장을 떼고 겨뤄보자는 욕망의 투영은 아닐까요. 신자유주의를 넘어 신계급사회가 도래한 것입니다.          



하드코어 인생아     


15,908명, 14,278명, 30,382명. 2014년 한해 학업을 중단한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 수입니다.2) 이 통계 속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들의 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2014년 한 국회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평균 사흘에 한 명 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3) 어린이 행복지수 낮은 순위 1위, 청소년 행복지수 낮은 순위 1위, 학업 시간 많은 순위 1위, 사교육비 높은 국가 1위, 공교육비 민간 부담 1위, 청소년 자살률 1위, 청소년 흡연률 1위.4) 이게 대한민국 학교의 민낯입니다. 행복은 고사하고 부모가 초과 노동에 시달릴 때 학생들은 초과 학업에 시달립니다. 부모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자식에게 쏟아 붇지만 ‘흙수저’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상류층 자제들이 비행기로 유유히 탈조선에 성공할 동안, 흙수저 물고 태어난 서민층 자식들은 한강으로 탈조선합니다.5) 학교의 필요성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냥 참고 다니는 것 아닐까요. 언제까지 이를 외면할 수 있을까요.     


뭐가 의미 있나 뭐가 중요하나 정해진 길로 가는데
축 쳐진 내 어깨 위에 나의 눈물샘 위에     
그냥 살아야지 저냥 살아야지
죽지 못해 사는 오늘
뒷걸음질만 치다가 벌써 벼랑 끝으로     
어차피 인생은 굴러먹다 가는 뜬구름 같은
질퍽대는 땅바닥 지렁이 같은 걸     

- 옥상 달빛, <하드코어 인생아> 중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무슨 얼어 죽을 ‘청춘’인가요. 지금의 흙수저들에게는 청춘이라는 단어 자체가 금물이 되었습니다. 금 수저부터 흙 수저까지 인생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흙 수저들에게 연애, 결혼, 출산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이들에게 인생은 이리저리 굴러먹다 가는 뜬구름 같은 것입니다. 아니, 인생 자체가 금물입니다. “인생은 금물 함부로 태어나지는 마 / 먼저 나온 사람의 말이 / 사랑 없는 재미없는 생을 살거나 /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네.”6)       

   


흙수저를 위한 교육학     


윤태호의 《미생》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이를 학교에 적용해 볼까요? 학교가 의미 없는 공간이라고요? 학교 밖은 지옥입니다. 헬조선은 과장이 아닙니다. 그나마 학교는 힘겹게나마 무상교육과 무상급식이 실시되고 있는 공간입니다. 형식적으로나마 교육의 기회 균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학교가 보이지 않게 신계급사회를 정당화하는 구실도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를 귀족, 평민, 천민으로 부르는 교실 내 역학관계는 학생 인권이 단순히 교사-학생 간의 문제가 아닌, 좀 더 포괄적인 시각을 갖추어야 함을 암시합니다. 자사고, 국제고, 외고 등 신귀족학교가 등장하고 있는 현실이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소위 명문대학교 진학의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는 현상 역시 학생들에게는 현실을 직시하는 강력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학교는 전쟁터이고 학교 밖은 지옥입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길이 남아 있는 건가요. 저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흙수저를 위한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오해 마세요. 흙수저를 금수저로 만들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흙수저의, 흙수저에 의한, 흙수저를 위한’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수저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않는 한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생태적 삶이란 결국 금이 아닌 흙을 지향하는 삶입니다.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니라, 돈이 없어도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헬조선’을 외치면서도 왜 변화를 꿈꾸지 못하는 걸까요. 그 이유를 박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이민을 토론하거나 이런 데서 태어난 ‘팔자’를 한탄하지, 현대판 동학농민혁명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핵심어로 떠오른 ‘이민’은, 결국 더 부유하고 재분배 제도가 그나마 돌아가는 곳으로 가서 그곳의 시장경쟁-단 한국보다 덜 치열하고 더 공평한 경쟁!-에서 삶의 터를 잡으려는, 사실 극히 보수적인 꿈을 함의한다. (중략) 가장 큰 요인은 ‘성장 신화’의 지속이 아닌가 싶다. 여태까지의 성장 속에서 어느 정도의 생계안정을 이룩한 부모세대의 지원에 힘입어 실업자가 돼도 굶을 일은 없는 많은 젊은이들은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아직까지 경제성장과 각자의 노력이 결국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자기 탓’으로 쉽게 돌린다. 성장이 둔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아직도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모양이다

- 박노자,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어떻게 학교에서 ‘삶의 기술’을 가르칠까     


결국은 어떻게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연관되는 ‘삶의 기술’,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미리 살아가는 ‘연습’의 과정들을 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진입”시킬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육의 생태적 전환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신계급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는 ‘해방적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부동산’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과연 생산하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으며 부가 없어도 품위 있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어떻게 터득할 수 있을까요. 확실한 것은 “이 사회를 연대해서 바꾸지 않는 이상”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넬 나딩스는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에서 개인적 삶, 직업적 삶, 그리고 시민적 삶을 위한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즉 삶의 층위는 다양하며 삶의 기술을 말할 때 그것을 단지 직업적 삶에 국한시켜서는 안 됨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 삶만 강조하다 보면 공동체는 사라지고 자신의 불편과 편의만 호소하는 자폐적 사회가 될 것입니다. 직업적 삶만 강조하다 보면 삶의 모든 가치가 소위 ‘먹고사니즘’에 종속되는 각자도생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 결국 개인적 삶과 직업적 삶은 시민적 삶과 함께 연결될 때만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삶의 기술’을 가르친다는 것은 적어도 이 세 가지의 삶을 함께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해야 합니다. 이제 삶의 기술에 대하여 시사점을 주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신계급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는 ‘해방적 주체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땅을 ‘부동산 아닌 ‘삶의 터전으로 바라볼  있을까요. 과연 생산하지 않고도 성장할  있으며 부가 없어도 품위 있게   있다는 믿음을 받아들일  있을까요? 무엇보다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어떻게 터득할  있을까요. 확실한 것은 “ 사회를 연대해서 바꾸지 않는 이상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기술로서의 변혁적 역량


OECD 2030 학습나침반


OECD 2030 학습나침반을 보면 학생들이 성공적인 삶을 일구고 더 나은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변혁적 역량(Transformative Competencies for 2030)을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① 새로운 가치 창출(creating new value)은 새로운 일자리·비즈니스·서비스의 창출, 지식·통찰·아이디어·기술(techniques)‧전략‧해법의 개발, 그리고 이를 문제해결에 적용하는 것 등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혁신을 의미합니다. 학습자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때에는 현 상태에 의문을 품고, 다른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틀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게 됩니다.


② 갈등과 딜레마 조정(reconciling tensions and dilemmas)은 모순되거나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생각·논리·입장 간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행동의 결과를 단·장기적 관점에서 짚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반대 입장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히되 본인 입장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어 실용적 해결방안 모색이 가능해집니다.


③ 책임의식(taking responsibility)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경험과 교육, 개인적·윤리적·사회적 목표에 비추어 성찰하고 평가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책임의식을 갖춘 학생은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며,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구를 소중히 여기는 강한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량은 반드시 ‘변혁적’ 역량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지구적 차원의 책임의식 속에서 갈등과 딜레마를 조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이 세계를 함께 변혁해내는 일입니다. 이것이 곧 삶의 기술과 연결됩니다. 즉 변혁을 위한 도전과 실천이 교육의 목표가 될 때 삶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삶의 기술로서의 융합적 역량


학생의 전인적/민주시민적 성장을 증진하는 융합적 역량


핀란드 교육위원회에서 국가교육과정 발전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14년부터 2017까지 진행된 국가 핵심 교육과정(National Core Curriculum) 개정 과정에서 코디네이터를 맡은 이르멜리 할리넨Irmeli Halinen은 “학생들이 배움의 즐거움과 의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 하는 것”과 “학생들의 능동적 참여와 지속가능한 웰빙을 향상시키는 것”이 교육과정 개정의 주요 목표라고 말했습니다.7)


할리넨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융합적 접근을 강화하는 것이 교육과정 개정의 또 다른 목표라면서 이러한 접근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과 학교 밖의 삶의 현상들 사이의 관계성과 상호관련성interdependecies을 파악하게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학생들이 서로 다른 과목에서 창출되는 지식과 기술을 배움의 구조와 연결시켜 의미 있는 총체로 만들어낼 수 있게 돕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게 됩니다. 핀란드 국가 핵심 교육과정에서 융합적 역량(transversal competencies)은 지식, 기술, 가치, 태도, 의지로 구성되는 총체이며, 주어진 상황과 맥락에 지식과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융합적 역량은 다음과 같이 7가지 범주로 나누어집니다.


① 배우기 위해 배우고 생각하기 (Thinking and learning to learn)

② 문화적 역량, 상호작용 및 표현 (Cultural competence, interaction and expression)

③ 스스로를 돌보고 삶을 가꾸기 (Taking care of oneself, managing daily life)

④ 다중문해력 (Multiliteracy)

⑤ 디지털 역량 (Digital competence)

⑥ 직업적 삶의 역량과 기업가정신 (Working life competence, entrepeneurship)

⑦ 참여, 개입, 지속가능한 미래 구축 (Participation, involvement, Building a sustainable future)



보통사람들의 전쟁


요즘은 다소 시들해졌지만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뜨겁습니다. 4차 산업혁명 담론의 무기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입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는 ‘팩트’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변화의 예측은 ‘시나리오’이죠. 따라서 시나리오의 내용보다는 시나리오의 주체가 중요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할까요? 아니면 인간의 삶의 질을 더 높여줄까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의 삶’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래를 명목으로 또다시 아이들의 삶을 저당 잡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곳에서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지녀야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사회의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할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미래에는 사라질 직업들의 목록들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8) 사실 이것은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노동비용을 절감하고자 하는 특정 계급의 욕망의 반영일 뿐입니다. 교육이 그들의 시각에 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더 좋은 노동을 창출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극심한 감정노동에 노출되는 각종 안내 서비스들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극한 현장에 로봇이 투입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일자리를 로봇이 대체하게 된다면 로봇세를 통해 기본소득의 세원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의 형태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전쟁》이라는 책을 통해 자유 배당, 보편적 기본소득, 새로운 개념의 화폐로서의 시간 등을 제안한 미국의 혁신운동가 앤드류 양Andrew Yang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노동'(Work)에 대한 개념을 훨씬 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아내가 두 어린 소년과 함께 지금 집에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시장 가치로는 0에 해당하며 직업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녀가 다른 누군가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고용되었다면 그것은 직업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노동'이라는 개념은 시장을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당신은 일자리를 통해 보상을 받지만 일자리가 아니면 보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시장이 인간 노동력을 점점 더 가치 없게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적 통화(Social Currency)'는 우리가 노인을 돌보고, 어린이를 양육하고, 지역 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환경을 개선하는 것과 같은 더 많은 것을 장려하고 싶은 다양하고 긍정적인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이 아이디어는 수년 동안 미국 내의 수백 개 공동체에서 효력을 발휘해온 '타임뱅킹(time banking)'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도움을 제공하는 행동을 인식하고 강화시키는 방법이 필요합니다."9)     


OECD 2030 학습나침반에서 말하는 변혁적 역량은 –  그리고 핀란드 국가 핵심 교육과정이 말하는 융합적 역량도 마찬가지로 – 인류애에 기반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좋은 삶(Well-being)을 단지 상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창출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학교는 문서로서의 교육과정이 묘사하는 교육의 이상과 학생들의 실제적 삶의 불일치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는 문서로서의 교육과정이 묘사하는 교육의 이상과 학생들의 실제적 삶의 불일치를 극복할  있어야 합니다.


앤드루 양, <보통 사람들의 전쟁> 과 성미산학교, <마을 학교>


굳이 대학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거나 대학에 가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면, 자립 기술을 익혀야 한다. (사실 대학에 가든 안 가든 자립 기술을 익히는 것은 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 열심히 텃밭도 가꾸고, 양계도 하고, 가구도 만들고, 친구들과 함께 집도 지으면서 살면 된다. 또 공간이든, 자동차든, 책이든 필요한 것은 나누며 살면 된다. 이렇게만 해도 자본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다. 물론 자립하고 공유해도 돈이 필요한데(우리가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전문 기술이 있어야 한다. 풍부한 ‘마을살이’에는 아주 많은 일들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마을에서 해 오던 일도 있고, ‘생태적 전환’에 필요한 새로운 일도 있다. (예를 들면, 에너지 설계사 같은 것.) 어쩌면 자본이 잠식한 일을 다시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을에서 양복점을 여는 게 가능할 것인가?) 물론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하나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단골이 되는 ‘마을 경제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또 하나는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존중받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박복선, <K시를 걸으며>     


취업만이 유일한 살 길이 아닌 세상에서는 대학 진학률 역시 정상적으로 하락할 것입니다. 대학을 가기 위해 필요했던 지식은 삶의 기술을 익히기 위한 지식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박복선에게 있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곧 마을 경제망을 만들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고, 그러한 기술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과연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연관되는 ‘삶의 기술’,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미리 살아가는 ‘연습’의 과정들을 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진입시킬 수 있을까요? 어쩌면 박복선의 말대로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삶이 좋은 삶이라는 넓은 동의를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와 새로운 철학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이 일은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쳐야/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가르쳐야/배워야 할 것인가.

왜 가르쳐야/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1) 김지연(2017). "네 얼굴은 C급, 너네 집안은 B급" 조선일보 2017년 7월 11일자. http://v.media.daum.net/v/20170711030730830?f=m&from=mtop 


2) 교육부(2014). 2014 교육기본통계.


3) 배재정(2014). 2010년 1월~2014년 9월 초·중·고 자살 현황.


4) 이혁규(2014). 한국의 교육 생태계. 교육공동체벗 / 통계청(2017). 2017년 청소년 통계.


5) 전중환(2015). 왜 헬조선이 문제인가. 경향신문 2015년 9월 22일자.


6) 언니네 이발관. 인생은 금물. https://youtu.be/1FRasj9RoRE


7) Irmeli Halinen(2018). The new educational curriculum in finland. Improving the Quality of Childhood in Europe · Volume 7 (pp. 75-89).


8) 어떤 전문가들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직업 중의 80%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사라질 직업을 예측하는 것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 창조될 직업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9) 손서락(2019). 모두의 1시간이 평등한 '타임뱅크'를 아십니까? 프레시안 2019년 7월 10일자.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4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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