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교육과정 자율성에 대한 단상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와 교육부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교육자치포럼>이 '현장에 묻고 정책으로 답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지난 1월 9일 세종특별자치시교육원에서 열렸다. 아래 글은 '교육과정 자율권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는 주제로 교육과정 세션에서 발표한 토론문이다.
시도교육청과 교육부가 해야 할 일
요즘 어딜 가나 매일 듣는 말이 이런 겁니다. 분권과 자치, 사회적 합의, 협력적 거버넌스. 그런데 이런 말들은 학교에서 자주 쓰는 말은 아닙니다. 아니, 사실 쓸 필요가 없는 말들이죠. 그러나 뭔가 교육의 변화를 요구하는 말들인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나 계속 귀 기울여보면 결론은 이렇게 끝납니다. 여건을 조성해야한다.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궁금한 것은 이겁니다. 도대체 여건은 언제 조성되는가. 기반은 언제 마련되는가. 여건과 기반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학교의 교육과정 자율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혁신학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천사례를 내놓으면 일반화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과연 일반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뭔가 혼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천사례를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분권과 자치가 어떻게 일반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모든 학생들의 저마다의 재능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분권과 자치 시대의 학교는 저마다의 개성과 장점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자치와 분권의 실천사례들을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특수한 사례들의 일반적 패턴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죠. 그게 바로 분권과 자치, 사회적 합의, 협력적 거버넌스인 것입니다. 그러니 순서가 뒤바뀐 것이죠. 연역의 방식이 아니라 귀납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여전히 반분권 반자치의 망령이 남아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 더는 분권과 자치, 사회적 합의, 협력적 거버넌스가 무엇인지 설명하려 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학교가 이런 단어의 뜻을 모를 수는 있지만 그 개념을 몰라서 실천을 못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미 실천하고 있구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어의 정의와 분류가 아닙니다. 이미 분출하고 있는 자치와 분권의 사례들, 한편으로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고 기반이 마련되지 않아 사그라지고 있는 실천사례들을 관찰하면서 실패의 이유들에 대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어렵게 활짝 피어올랐다가 결국에는 시들고 만 학교들을 보면서 ‘이 학교는 실패했네. 아쉽다. 다른 학교를 찾아보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육청의 정책 홍보를 위해 학교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여건을 조성하고 싶다면, 기반을 마련하고 싶다면 교육청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교의 실패는 곧 교육청의 실패라는 절실함을 가져야 합니다.
학교의 교육과정 자율화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학교가 자율적으로 운영되어 하는 건가요? 가르침에 대한 존중을 옹호하고 배움에 대한 경탄을 회복하기 위함이 아닌가요? 그러기 위해서 학교는 이미 교사들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업무전담팀을 꾸려서 지원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육청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학교가 온전히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업무전담팀을 꾸리면 됩니다. 모든 학교의 교육과정 자율화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시도하고 있는 학교들은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아직 망설이는 학교는 좀 더 기다려주면 됩니다. 학교는 스스로 그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움직입니다.
혁신학교와 일반학교가 똑같은데, 아니 혁신학교가 더 힘들다는 인식이 팽배한데 어떻게 혁신학교가 확산될 수 있겠습니까. 자치와 분권을 위한 초기의 노력이 열정페이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솔직히 교육운동에 뛰어든 수많은 교사들이 참교육의 열정 때문에 희생을 감수한 것 아닙니까. 혁신학교 운동이 벌써 10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젊은 교사들은 선배 교사들의 그런 삶을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 아시죠? 이제는 그런 방식이 더 통하지 않습니다. 이 사회가 학교에 요구하는 것들을 우리 역시 실천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교사들을 격려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더 이상 학교에 떠넘기지 말고 이제 교육청 스스로 자율성의 제도화를 고민해야 합니다.
앞에서 가르침에 대한 존중과 배움에 대한 경탄이 학교의 교육과정 자율화가 필요한 이유라고 이야기했는데요, 결국은 학생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국가는 이를 위한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방향을 제시하며 학교는 지역적 맥락을 고려하여 학생들의 삶과 연계된 교육과정을 운영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왜 불가능하죠? 학교의 용기 있는 시도에 대해서 뒷받침해줄 수 있나요? 그리고 그렇게 배운 학생들을 배신하지 않는 입시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나요? 시도교육청과 국가는 이 두 가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문서로서의 제도만 만들어내고 물적 토대는 만들어내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이미 수도 없이 보아왔습니다. 그 전철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경험적 기반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이런 일반적 문제의식 속에서 세 분 발제자들의 원고를 살펴보았습니다. 정광순 선생님께서는 <학교의 교육과정 자율화 기반과 과제> 서두에서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자율화 요구는 자율화해야하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이지, 주체들이 자율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지적이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물론 학교교육과정 자율화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러나 자율화의 주요 주체인 교사가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대로 해봐.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네 책임이야!”라는 신호를 평생 받아오면서 부정적으로 학습되어온 경험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교교육과정 자율화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존중을 옹호하고 배움에 대한 경탄을 북돋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가르침의 위기가 왜 시작되었습니까? 학생들이 배우기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율적인 배움이 필요한 것이고 자율적인 배움은 오직 자율적인 가르침이 존재할 때만 가능한 것이지요.
정광순 선생님께서는 학교의 교육과정은 ‘운동’과 ‘질서’를 오가며 발달한다는 Schubert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교육과정 자율화의 경험적 기반으로서 우리나라 학교교육 운동의 역사를 정리해주셨습니다. 저는 사실 이 부분에 감동을 했는데요. 운동은 이미 충분하다는 겁니다. 경험적 기반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자꾸만 한계를 찾고 문제점을 분석하는 것은 돌다리도 두들기라는 신중함이 될 수도 있지만 추진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광순 선생님께서 “대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수렴하는 것이다”라는 말씀하셨는데요, 작년에 경기도가 혁신교육 10년을 맞이하였고 올해 서울이 10년을 맞이합니다. 10년의 경험 속에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 이미 녹아있습니다. 이런 혁신학교 운동이 학교의 교육과정 자율을 토대가 될 것이며 반대로 학교 교육과정 자율화의 제도적 추진이 혁신학교의 양적, 질적 심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정광순 선생님의 발제문 중에서 Cobb 와 Rallis(2008)가 제시한 ‘학교가 연방이나 주의 정책에 반응하는 5가지 유형’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전문가형, 기회형, 보조형, 군대형, 혼란형의 다섯 가지로 나누고 우리의 논의는 군대형에서 전문가형으로의 전환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지만 사실 현실적으로는 기회형, 보조형, 혼란형이 일반적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하고요. 사실 이러한 유형이 학교에만 해당할까 싶습니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어떠한가요? 학교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교육부와 교육청이 학교의 체질개선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기 보다는 이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 속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학교 교육과정이 국가 교육과정을 우선한다
박휴용 선생님 역시 김대현(2014)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교육과정 거버넌스는 그 의사결정의 대상이 단위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과정이라는 점에서 교육행정에서 말하는 거버넌스와는 질적으로 다르며 학교와 교실 수준에서 자율성 확보가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요, 이 역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와 함께 교육과정 거버넌스를 교육과정 수립 절차에서의 거버넌스와 교육과정 내용체계에서의 거버넌스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는 한 가지가 작동하지 않을 경우 나머지도 작동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교육과정 거버넌스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휴용 선생님의 글에서 인상 깊게 살펴본 부분은 2장 해외 국가교육과정 거버넌스 사례분석입니다. 먼저 호주의 경우 국가와 지역의 역할 분담이 명확하다는 것과 단위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개발된 교육과정들을 주 교육위원회가 모니터링, 검토, 조절, 승인하는 방식으로 교육과정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둘째 영국의 경우에는 국가에서는 교육의 목적과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만 결정하고 시간 배정 및 교수법의 문제는 개별학교에서 결정하도록 한다고 지적하셨는데요 우리나라와 영국의 국가교육과정 개념도에서 그 포함관계가 역순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나라는 전체집합이 국가교육과정인데 비해 영국은 전체집합이 학교교육과정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죠. 이는 결국 교육과정 거버넌스의 핵심이 가르칠 내용을 학교가 얼마나 결정할 수 있는가와 관련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셋째, 캐나다의 경우 주별로 교육과정을 개정하기 위한 기술적 분석을 실시하고, 그 현황을 확인하기 위한 핵심 실사 집단을 운영한다는 것이 특징적인데 이와 함께 학교교육의 질적 수준과 책무성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책무성관리국을 설치했다든가 학생들의 학업 장학을 위한 학생장려정책을 병행하고 있다는 점이 정책의 일관성 및 연속성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휴용 선생님께서는 세계 주요국의 국가교육과정 거버넌스 현황을 형평성-수월성 축과 국가(정부)-지역(학교) 축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진 사분면도를 통해 분석하고는, 국가-지역-학교교육과정의 거버넌스를 결정하는 요인 A-B-C-D-E를 제시하면서, 우리 사회가 이 부분을 어떻게 합의해나갈 것이냐에 따라 국가교육과정 거버넌스의 성격이 결정될 것이라고 내다보셨는데요. 일단은 글의 결론이 있어야 하니 국가-지역-학교교육과정의 역할 분배 개괄도와 함께 교육과정 거버넌스를 보완할 중간적 기구 – 예를 들면 국가교육위원회와 같이 - 를 제안하고 계신데요, 결국은 이러한 중간적 기구의 역할과 위상을 얼마만큼 구체화할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사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어떻게 북돋을 것인가
중학교 사례를 중심으로 학교 교육과정 자율권 확대 방안을 제시해 주신 황금주 선생님께서는 학교 교육과정 자율권의 다양한 시도로 창의적 체험활동, 자유학년제, 혁신학교 운영을 말씀하고 계신데요. 특히, 혁신학교 운영 사례를 제시해주신 것은 앞에서 정광순 선생님께서 혁신학교 운동을 교육과정 자율화의 경험적 기반으로 규정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마무리하며 제언해주신 여섯 가지 사항은 이 자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짐단지성의 힘을 발휘하여 성찰의 폭과 깊이를 확대시켜나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광순 선생님께서는 학교의 교육과정 자율과 관련하여 “국가교육과정을 통제에서 개방으로 전환하는 나라들이 대부분 이런 문제를 극복해야 했고, 이런 갈등을 극복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 해결의 실마리를 교사의 교육과정에 대한 자율성과 전문성에서 찾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박휴용 선생님께서는 일선학교의 다양한 교육주체들(교사, 학부모, 학생, 지역공동체 등)이 교육과정의 수립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황금주 선생님께서는 자율화 정책의 성패는 현장에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교사에게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 분 발표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고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교사와 학교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과 눈에 보이지 않는 통제가 아니라 “학교에서 교사가 교육과정에 대한 자율성과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이를 어떻게 회복시켜 주고 성장시켜 줄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제도화 및 정책화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교육과정의 자율을 위한 조건
학교는 이미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혁신학교들을 비롯하여 일부 학교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의 교육과정 자율성에 이미 도달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교육이 교육과정 자율화의 경험적 기반을 이미 갖추고 있음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학교는 교육과정의 실행기관인 동시에 연구기관이 되어야합니다. 이론과 실천이 별개이고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은 교육의 영역에 있어서는 반드시 타파해야 할 거대한 미신입니다. “학교는 교육과정 문제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고, 해방, 참여 및 실천에 관한 성찰과 같은 이상들을 추구하는 교육과정 탐구의 중심지가 되어야 합니다.” 핵심적 가치는 발표자들께서 언급하신 교직의 자율성과 전문성 그리고 학교운영의 형평성과 민주성에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요구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 행동하면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교육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지, 즉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 대규모의 숙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야 합니다. 재정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이데올로기의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학교에 떠넘길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교육과정 자율화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해결해줘야 할 부분입니다. 다음으로 학교를 지원하기 위한 방안입니다. 첫째, 교사들이 교육과정 실행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교육과정을 실행하다보면 반드시 교육과정 자율화의 장애요인이 등장할 것입니다. 이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가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도와줘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력 지원 및 예산 편성의 융통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둘째, 교육과정 자율화의 논의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주장한 연구물들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계속적으로 일선학교의 실행연구에 관여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 핀란드의 교육개혁이 PISA의 결과를 통해 탄력을 받았듯이, 자율화의 모든 과정을 국제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교육과정 자율화에 대한 국내외적 지지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해외 실천가 및 연구자들의 비평을 통해 장기적 관점에서 계속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육개혁 운동에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자신감 있게 도전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