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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Sep 08. 2020

학교는 미래를 파는 가게가 아니다

팬데믹 시대, 미래교육의 전환을 꿈꾼다

함께 읽는 책 No. 24

슬라보예 지젝(2020), 『팬데믹 패닉』

폴 프랭클린(2017), 「The Escape」



팬데믹 패닉


지젝의 <팬데믹 패닉>을 읽고 든 생각. 지젝은 브뤼노 라투르를 인용하면서 “정치학은 물질적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기억난다. 정치란 가치나 신념이 아닌 연관된 사물과 관심사를 둘러싼 사물정치여야 한다는 대목이다. 세월호의 정치학, 코로나의 정치학, 기본소득의 정치학과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추상적인 가치나 신념은 의뭉스럽다. 가치와 신념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너무나 오용되고 있거나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베'가 말하는 '민주화'나 '빤스 목사'가 말하는 '전체주의'가 그런 경우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동일한 단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세월호, 코로나, 기본소득이 주는 함의는 너무나 뚜렷하다. 세월호를 말할 때 세월호가 사람들을 태운 채 바닷 속에 침몰하는 - 동시에 제복은 벗어버린 채 홀로 빠져나온 선장과 승무원들의 - 충격적인 장면과 그 이후에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은 세월호의 정치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다가온다. '세월호'와 '노란 리본'이라는 사물에 대하여 보이는 표정과 몸짓만 보아도 우리는 그가 어떤 정치적 가치와 신념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사물정치라는 개념은 두 가지 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정치의 행위자가 인간을 넘어 인간이 아닌 것들을 포괄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념이라는 것이 구조적으로 접속된 (객관으로서의) 주체와 (객관으로서의) 객체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치의 시공간적 확장을 의미한다. 대상의 확대를 공간적 확장과 연결된다면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이란 시간적 흐름에 대한 감각을 포함한다.  



세상을 파는 기게


<팬데믹 패닉> 서문에 폴 프랭클린의 단편영화 <탈출>이 소개되고 있다(https://vimeo.com/223579794). 15분 분량의, 정말 대단한 영화다. 이 영화는 로버트 셰클리가 1958년에 발표한 단편 SF소설 <세상을 파는 가게>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2007년에 출간된 <최후의 날 그 후>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SF소설집에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다.


폴 프랭클린, <탈출> (https://vimeo.com/223579794)


내용은 이렇다(스포주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가 골목길을 걷는다. 그 끝에 한 가게가 있다. 바로 <세상을 파는 가게>다. 가게 주인은 자기가 무엇을 파는지 일러준다. 손님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내놓으면 정해진 시간 동안 자기의 가장 내밀한 소망대로 살아갈 수 있는 대안 현실로 이동시켜준다는 것.


주인공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가게 주인은 그에게 천천히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주인공은 고민을 거듭하고 아내와 아들이 관련된 사소한 문제들이나 직장에서 정신없이 벌어지는 사건들과 같이 자신의 일상생활에 몰두할 때도 그 상점에 다시 가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늘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마침내 그는 자신을 살며시 깨워서 겪어보니 흡족했는지 묻는 가게 주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어마어마한 반전!!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저 너머로, 눈길이 닿는 저 멀리까지 갈색 회색 검은색 돌무더기밭이 펼쳐져 있다. 지평선까지 사방으로 뻗어 있는 그 벌판은 도시에서 온 뒤틀린 시체들, 여기저기 흩어진 그루터기들, 그리고 한때 사람의 살과 뼈였던 곱고 얀 재로 덮여 있었다."



미래교육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미래교육'이라는 키워드를 대하는 우리들의 상황이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상유지를 하는 것마저 벅찬 상황이다. '획일화된 교육과정과 천편일률적인 교실 속에 갇혀 있는 학생들'이라는 근대교육의 이미지마저도 사라진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 교실에 서른 명의 학생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 함께 모여서 공부를 했었던 적이 있었지." 라는 문장이 회상의 표현이 될까 두렵다.


미래교육의 상이 탈시간적 공간에 갇혀서는 안 된다. 미래학교를 <세상을 파는 가게>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교실을 (특유의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러브하우스처럼 꾸민다고 해서 갑자기 미래학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아이들이 12년 후 고등학교 3학년을 졸업할 때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를 상상하는 미래교육이어야만 한다. 


아니, 그 이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 함은 아이들의 백년의 삶을 고민하라는 의미다. 추상적인 언어는 제도와 만날 때 비로서 날개를 단다.  '대학서열화', '대학등록금', '대학입시제도'라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 '지구 온도 상승 1.5℃ 이하', '탄소발자국 1이하'라는 명확한 목표치를 제시하는 것이 청소년들에게 미래를 부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러브하우스와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간 세상이 온갖 차별과 비루함으로 넘쳐나는 공간이 아니길 바란다. 그건 우리가 꿈꾸는 미래교육이 아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소위 교육을 논하는 사람들이 가장 참된/어려운 문제를 애써 외면한채 거짓된/쉬운 문제만 가지고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남는 것은 현실이 된 악몽 - 악몽이 된 현실 - 뿐일까 두렵다.


슬라보예 지젝(2020), 『팬데믹 패닉』


교육을 백년지대계라 함은 아이들의 백년의 삶을 고민하라는 의미다. 추상적인 언어는 제도와 만날 때 비로서 날개를 단다. '대학서열화', '대학등록금', '대학입시제도'라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 '지구 온도 상승 1.5℃ 이하', '탄소발자국 1이하'라는 명확한 목표치를 제시하는 것이 청소년들에게 미래를 부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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