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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Oct 29. 2019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남은 인생도 고단할 테니까

프롤로그

10년 넘게 홀로 여행하면서, 예상치 못한 여행작가의 삶을 살면서 가장 치열하게 여행했던 곳은 다름 아닌 내 방이었다. 극심하게 덥거나 추웠고 벌레가 들끓거나 하수가 역류했다.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녀처럼 베개에 머릴 대면 눈물을 흘리는 밤들이 이어졌다.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나는 지금 낯선 도시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룸에 있다고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읊조렸다. 여행을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고.


누워서 보이는 내 방 천장 무늬가 지긋지긋해질 때, 문득 누운 자리가 몹시 낯설게 느껴질 때, 그러니까 ‘내 방 여행’의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정신적 위안이 되어줄 새로운 '방'을 찾아 나섰다.

아플 때마다 버스를, 비행기를 탔다는 도식이 진부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울적할 때마다 무작정 걸었던 내가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음처럼 어수선한 방에서, 그리고 대도시 서울에서 잠시나마 도망쳐 나오는 것, 해서 오래된 도시의 골목을 헤매고 낯선 억양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남이 내어준 1인분의 식사를 맛있게 먹는 것. 비일상적인 하루 끝에 마주한 천장의 무늬가 내 방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에 묘하게 설레는 것. 그게 내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이제껏 그래 왔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내 발이 가닿은 곳은 주춧돌과 기단만 남은 고도(古都)였다. 그곳에는 공터나 폐허가 있다. 빈 땅을 찾은 이가 혹시나 적적할까 봐서 옛사람들이 깎아 만든 주춧돌, 석탑, 석불, 비석 같은 오래된 돌들이 또한 존재한다. 내가 살아온 시간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긴 시간 속에 햇볕과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온 오래된 대지와 그 위의 고물들. 그 숱한 폐허들에서 나는 안도했고 위로를 얻었다.


일상이 지긋지긋해서 떠난 비일상의 장소가 내가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한 모습으로 이어진 영속의 공간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지긋지긋’하게 참고 견딘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장소가 아니었을는지.


내가 머물렀던 방들은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거나 허물어질 예정이다. 언젠가 나 역시 세상에 온 적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겠지. 다만 내가 한 때 밟고 선 주춧돌은 내내 그 자리에 남아 있길 희망한다. 이제껏 수백 년,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왔으니 그보다 더 오래 존재하길 바란다. 낡고 오래된 것을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나 같은 사람, 또 거기 가서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천년 전 사원의 돌기둥 앞에서, 궁궐의 주춧돌 위에서 가볍게 읊조리는 것이다. ‘겨우 백 년이나 살까 싶은 내 고민이 다 무어라고!’

나는 허허로운 벌판, 낡은 인공의 석물들이 야생초처럼 규칙 없이 놓인 그 자리를 ‘방’으로 여겼다. 벌러덩 누우면 천장의 조잡한 벽지 무늬가 아닌, 뻥 뚫린 하늘이 보이는 그 폐허를.


이 이야기는 내가 스쳐간 방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방에 누워했던 고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오래된 도시들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가난한 여행 기록이다. 마음에 담아두고도 남루하고 시시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굳이 쓰길 망설였다. 여행이 넘쳐나는 시대에 나는 어떤 문장으로 내 지난 여행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여행작가로 일을 하면서 ‘나’라는 주어 없이 특정 도시를 주어로 한 문장들을 주로 써왔다. 모나지 않은 문장들. 정보 확인과 모두의 취향을 고려한 여행들은 빤하지만 안정적이었다. 그렇게 '편하게' 여행도 하고 글도 쓰는데 ‘나’를 잃는 것 같은 느낌이 왕왕 찾아왔다. 새벽,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특히 그랬다.


결국 또 방이 문제였다.


이윽고 '나'를 주어로 한 문장들을 써나갔다. 지난 10년 간 내가 살았던 방들, 그 방들을 벗어나 머물었던 잠시간의 방들에 대하여. 내게 방은 그 자체의 의미로서 방이며 때론 벽도 천장도 없이 우주처럼 광활한 정신적 공간이다. 물론 좁고 남루했던 나의 공간이 결국 방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확장시켰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방이 싫어서, ‘방 탈출’을 꿈꾸다가 결국 내가 몸을 누이는 공간은 모두 내 방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병원을 개조한 개봉동 고시원 방, 재개발로 쫓겨나듯 나온 홍제동 다가구 주택, 곰팡이와 바퀴벌레가 자꾸만 증식하던 봉천동 다가구 주택을 거쳤다. 그러는 동안 경주, 루앙프라방, 씨엠립, 바간, 치앙마이를 드나들었다. 패망한 왕조의 도시에서 벽도 천장도 허물어진 절터와 우두커니 공터를 지키는 석불 석탑 주변을 맴돌았다. 거기에 ‘낡고 오래된 내 방’이 또 하나 있었다. 그때의 방은 방일까, 무덤일까*.

*마지막 문장 / 이은규, <애도의 습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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