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방, 루앙프라방
마음에 여백을 주는 도시
새벽 내내 내리던 비는 점차 잦아들더니 동틀 무렵이 되자 완전히 그쳤다. 비가 계속 내리면 어쩌지 내심 걱정했던 차였다. 스님들의 탁밧 행렬을 구경하기로 마음먹은 아침이었기 때문이다. 루앙프라방의 탁밧 행렬은 여행자들에게 도시의 가장 큰 볼거리다. 경건한 의식이기에 ‘볼거리’라고 하기엔 다소 무례할 수도 있지만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늦게 가면 몰려든 인파로 인해 탁밧 행렬을 보기 힘들 수도 있다는 얘길 들어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벽의 공기는 맑고 차가웠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빈속을 훑었다. 내 속의 먼지가 후욱 빨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데도 내 발은 점점 더 페달을 힘주어 밟고 있었다. 탁밧 행렬이 시작된다는 왓마이 사원 근처로 가자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행상들과 몇몇 여행자들이 보였다. 나는 자전거를 길가에 세워두고 가만히 고요한 어둠 안에 섰다.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았다. 언제고 경험할 수 있는 새벽이 아니니까. 그 기다림이 헛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어둠은 반드시 걷힐 것이고 불자들은 신성한 아침의 의식을 행할 테니까. 이곳의 이방인들은 잠을 아껴가며 누군가의 일상을 보러 온 이들이었다. 어쩌면 탁밧 보다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 더 인상적인 볼거리 인지도 몰랐다. 사위가 점차 밝아졌다. 이윽고 사원서 열댓 명 가량의 스님들이 한 줄로 빠져나왔다. 공양받을 커다란 통을 어깨에 멘 맨발의 스님들이 거리를 걷기 시작하자 스님들을 기다리던 보살들의 손이 일제히 바빠졌다. 사람들이 소리를 죽였다. 신성한 의식을 존중하는 이방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무릎을 꿇고 앉은 보살들은 스님들의 행렬이 자신의 앞을 지나갈 때마다 준비한 쌀밥을 조금씩 나누어 한 명 한 명의 그릇에 넣었다. 보살들은 공경의 마음을 담아 공양했다. 스님들은 그 마음을 다시 부처님에게 공양할 것이다. 스님들은 공양받은 끼니를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보시하기도 했다. 밥을 나누며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그렇게 돌고, 또 돌아 세상을 이루는구나 싶었다. 경건한 분위기가 감도는 와중에 불현듯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이얼싼’을 외치며 스님들의 행렬에 바짝 붙어 사진을 찍은 중국인 여행자들이었다.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이들이 등장하면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이롭다는 것을 알았다. 일단 생김새로 인해 그들과 ‘한통속’ 취급받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서로가 배려하며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분위기가 일시에 와장창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경건함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을 벗어나 아침 시장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 노천에 펼쳐지는 시장은 소박했지만 건강하고 경쾌하며 또 싱그러웠다. 규모는 작지만 흥미로운 구경거리도 많았다. 거대한 민물고기들과 식용 개구리들, 투박한 모양새의 손두부, 다양한 종류의 국수들, 신선한 토마토와 공심채 등의 야채들…. 아침 시장을 들렀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다 보니 왓마이 사원 골목 뒤로 연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연회장 안쪽에서는 스님들과 몇몇 사람들이 어떤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결혼식이 열릴 모양이었다.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나를 신기하듯 보는 남자에게 “바씨?”하고 물었다. 남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이며 대답했다.
“예스! 바씨!”
바씨는 복을 기원하는 모든 종교적 행사를 의미한다고 여행안내서에서 읽은 바 있었다. 점심 즈음 그곳을 지날 때는 결혼식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로 몹시 북적였다. 잔칫상에는 고기와 떡, 술들이 푸짐하게 올려져 있었고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 남자가 나를 향해 손짓하며 테이블에 앉으라 했지만 웃으며 사양했다. 오늘은 분명 루앙프라방의 모든 이들에게 기쁜 날일 것이다. 내가 기쁜 만큼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왓마이 사원 근처의 노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라오스인들이 아침 식사로 즐겨 먹는 쌀죽 카오삐약 카오를 주문했다. 돼지뼈를 우린 육수로 끓인 따뜻하고 구수한 죽이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온몸이 이완되면서 힘이 풀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새벽부터 호들갑을 떨며 쉼 없이 움직인 여행자였다. 내 옆에 앉은 두 아저씨는 내게 사진을 찍자며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외국인 여성이 노천에서 쌀죽을 먹는 게 신기했던 걸까. 내가 한국인이라 하자 조금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굿’을 연발했다. 당시만 해도 루앙프라방에 한국인 여행자들이 요즘처럼 많지 않았을 때였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말을 거는 열에 아홉의 현지인들은 ‘곤니찌와’를 외쳤다. 아저씨들은 테이블 위의 양념통을 가리키며 죽에 고춧가루를 타면 더 맛있다고 알려 주셨다. 한 스푼을 떠 넣으니 과연 얼큰함과 감칠맛이 돌았다.
밥을 다 먹고 입가심을 한다고 밥값보다 갑절 비싼 커피를 마셨다. 여행자들에게는 ‘루앙프라방의 스타벅스’로 통하는 조마베이커리. 손님의 대부분은 여행자들이었다.
루앙프라방은 도시 이름처럼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절묘한 어울림이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프랑스풍 건물과 의자가 나란히 놓인 야외석이 마련된 카페테리아가 있고 그곳에서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유럽인들이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침 노천 시장과 라오스 전통 양식의 오래된 사원들, 그 안팎을 오가는 스님들의 모습이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 제각기 다른 풍경들은 서로가 뭉근하게 스며 나름의 조화를 이루었다. 조마베이커리에 앉아 있는 동안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마침 조마베이커리 옆에 작은 우체국이 있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언제고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존재함에 감사했다. 한국에서도 떨어져 살기는 매한가지인데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 와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다시 페달을 굴려 골목을, 강변을 달렸다. 문득 경주 사정동 골목이 떠올랐지만 처음 경주에 발을 디뎠을 때의 나와 루앙프라방에 처음 발을 디딘 나는 조금 달랐다. 아니, 나는 나였지만 마음의 배낭이 조금 더 가벼워졌달까. 경주에서는 그 배낭의 무게가 무거워 자주 그 도시에 기대곤 했다. 루앙프라방에선 도시에게 나한테 기대라고 해도 될 만큼 배낭의 무게가 가벼워져 있었다. 씨엥통 사원 창문으로 스미는 오후의 볕을 듬뿍 쏘이고 달콤한 길거리 과일 쉐이크를 마시고 또 페달을 밟았다. 꽃, 사원, 다시 꽃, 사원…. 루앙프라방에 몇 개의 사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그냥 ‘엄청 많다’고 했다. 마치 경주의 고분처럼.
한참 자전거를 타다 또다시 여행자 거리 끄트머리에 있는 카페에 들러 다리를 쉬게 했다. 소다수 한 잔을 시켜놓고 오후의 망중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다가, 찍은 사진을 넘겨 보다가, 또 한참을 앞을 바라보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헤이 웬디! 이럴 줄 알았어. 마주칠 줄 알았다니까!”
닉이었다. 그가 내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졸고 있던 걸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조금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되받았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정말 마주쳤네. 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관광객이 넘치는 곳에서 다시 만나리라 예상하진 못했다. 닉은 그의 사촌 동생 레이첼과 함께였다. 레이첼이 만나자마자 내게 건넨 말은 미국인의 입에서 나오리라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미엇살이에요?”
닉과 레이첼 모두 한국에서 강사 경험이 있었다. 영등포에 살았고 쇼핑 1번지는 ‘타임스퀘어’라 말하는 레이첼. 미국인과 대화를 하는지 한국인과 대화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렇게 셋의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 누군가 지나가면서 또 “헤이!”했다. 메이였다. 그렇게 루앙프라방의 여행자 네 사람이 한 곳에 모였다. 루앙프라방이 내게 준 여백에 또 다른 색깔이 칠해지고 있었다.
Young & Stupid
잠을 양보하며 놀았던 시절이었던 만큼 한동안 숱한 남성들을 만났다. 이제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높은 빈도로 소개팅을 하고 단기간이나마 연애를 했던 시절이었다. 앞으로도 그런 시절은 또 없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를 스쳐 간 이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 내게는 이상형이 없는가 싶을 정도로 성격도 외모도 직업도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었다. 친구의 소개, 직장 선배의 소개, 거래처 직원의 소개, 나이트클럽 부킹, 소개팅 애플리케이션, 드나들던 카페, 심지어 금융상담을 하던 주거래은행의 직원까지 한 2년 정도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데이트를 했다. 그 모든 이들과 본격적으로 연애를 한 건 아니었다. 소위 ‘썸’만 타다 끝난 이도 꽤 있고 서로 호감(혹은 호기심)이 있었지만 결국 어떠한 이유들로 인해, 혹은 이유도 모르고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마치 연애를 목적으로 하는 이성들의 표본을 수집하기로 작정을 한 사람 같았다. 실로 대단한 에너지였는데 한편으로는 그때의 나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무엇 때문인가, 나는 그저 상대방이 내게 갖는 관심을 즐기고 갈구했으므로 그들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상형을 굳이 말하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상대의 어떤 점이 좋고 또 나와 맞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내게 관심이 있다고 하면 일단 만났다. 겉보기에는 굉장히 오픈 마인드형 인간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어쩌면 부정적인 쪽으로) 이면은 수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에 다름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혹은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먼저 호감을 표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의 관심이 아닌, 남이 나에게 갖는 관심만이 중요했다. 어쩌다 보니 사랑을 모르는 ‘관심종자(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인터넷 신조어)’가 되어 있었다. 관심을 바란다고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닐 테니 나름 성공한 관심종자는 아니었을지. 영 앤 스튜핏. 젊고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그랬으므로 오랫동안 지속한, 드라마 속 연인처럼 영원을 약속한 만남은 없었다. 헤어짐의 이유는 표면적으론 조금씩 달랐어도 결론적으로는 같은 이유였다. 상대방이든 나든 서로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한 점이 없어서. 대부분 그렇게 가벼웠다. 단 1년이라도, 그저 사계절만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내게는 참 어려웠다. 어느 순간 우리 부모님을 비롯해 결혼을 한 내 지인들을 보며 경외감마저 들었다. 남은 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함께 보낼 수 있겠다는 확신과 신뢰의 마음을 나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물론 내가 가졌던 모든 만남과 설렜던 순간들이 거짓이라고는 못한다. 사랑은 정의할 수 없는 무형의 에너지일 테니 단순히 그 시간이 짧았다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비록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한데 묶어 복수로 칭하지만 기억은 개개의 것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러니까 당신과 나만의 기억.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한동안 이어지던 이런저런 인연들은 어느 순간엔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성에게 관심을 받고 싶다는 욕망은 해가 거듭될수록 잦아들었다. 여행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차에서 마주친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린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수많은 청춘 여행자들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들만의 ‘비포 선라이즈’를 만든 여행자들도 적지 않다. 여행 중 로맨스는 내게 ‘판타지’로 남은 분야다. 나는 그것이 내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확신할 뿐만 아니라 ‘혼자도 벅찬 여행을 어떻게 둘이 붙어서 하냐’는 여행의 효율을 따진다. 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내게 꽂힐 동정의 시선! 나는 강조한다. 못해서가 아니라 안 해서 라고! (덧붙여 연애와 결혼을 강요하는 오지랖 문화를 앞장서서 청산하고 싶다.)
<비포 선라이즈> 하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여름휴가를 앞두고 회사 근처에 있던 주거래 은행에서 직원과 금융상담을 하고 있었다. ‘휴가 다녀오셨냐’는 질문이 ‘밥 먹었냐’는 빈말처럼 자연스레 오갔다. 그는 일찌감치 오스트리아 빈과 프랑스 파리를 다녀왔다고 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즉각적으로 “비포 시리즈 코스 다녀오셨네요”라는 말을 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그걸 아셨냐”라고 물어서 잠시 당황했다. 실제로 내가 거의 첫 손에 꼽는 로맨스 영화기도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너무 유명한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회사와 은행이 있는 곳에서 도보 10분 거리에는 ‘퓨어아레나’라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갔던 바와 카페 이름을 딴 상호의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있었다. 나는 그 상호에 끌려 그 집에서 식사를 한 적이 꽤 여러 번이었다. 나는 그가 당연히 그곳도 가봤겠지 싶어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퓨어아레나도 가보셨겠어요”라고 했다. 그는 그곳이 어디냐고 되물었다. 영화의 촬영지까지 일부러 찾아갔다는 사람이 카페를 모른다니 의외였다. 나는 그곳의 위치와 메뉴 몇 가지를 그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절대 고객의 정보를 개인적으로 이용할 수 없지만, 그래서 이런 적은 처음이지만 혹시 자신과 ‘퓨어아레나’를 함께 갈 수 있는지 의사를 묻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은행이 아닌 퓨어아레나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리만큼 만남은 건조했다. 마치 영화 동호회의 정기 모임처럼 각자가 좋아하는 대사,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서너 개씩 뽑고는 할 말이 더 없는 사람들 모양으로 멋쩍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낭만적인 <비포 선라이즈>가 더 좋다고 했고 나는 그보다 현실적인 <비포 선셋>이 더 좋다고 했다.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가 나온 후 9년 뒤에 개봉한 작품이다. 실제 시간과 같이 9년 뒤에 재회한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전편의 풋풋함과 설렘 대신 솔직함과 외로움이 섞인 ‘어른의 무게’를 전한다. 우리는 시간 차이를 두고 나온 두 영화의 서로 다른 온도보다 더 큰 간극을 느끼며 밥 한 끼, 맥주 한잔을 하고 헤어졌다. 그게 전부였다.
그 만남 이후 멀지 않은 시기에 영화 <비포 미드나잇>이 개봉했다. <비포 선셋>으로부터 또다시 9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첫 만남으로부터 18년이 지난 두 남녀의 관계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설렘은 추억이 되었고 갈등은 일상이 되었다. 한때 나란히 보폭을 맞춰 걷던 그들에게 이제 ‘함께 걷는 일’은 어색하고 별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러다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등을 돌리지만 그러기엔 함께 지나온 시간이 너무나 찬란했다.
사랑을 했던가, 앞으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때로는 절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때로는 너무 빤해서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해버리는 것. 내게 사랑은 오리무중이다. 20대의 생기를 무기로 바보처럼 춤을 추던 그때가 꿈처럼 아득하다.
춤추자, 이 어둠이 걷힐 때까지
루앙프라방의 인연 중에는 닉과 레이첼, 메이 세 사람 외에도 한국에서 온 중년 부부가 있었다. 당시 한국인 여행자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던 빅트리 카페에서 부부를 만났다. 부모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분들이었다. 라오스의 밥이 찰기 없이 가벼워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두 분께 나는 ‘찹쌀밥’을 한번 드셔보라고 작은 팁을 드렸다. 아주머니는 찹쌀밥을 가리키는 라오스말 ‘카오냐오’를 수첩에 꾹꾹 눌러쓰셨다. 수첩은 마치 시험을 앞두고 만든 암기장처럼 까만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인도차이나반도를 배낭여행 중이라는 두 분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요즘은 많은 중장년층이 패키지여행이 아닌 자유 배낭여행을 선호한다지만 막상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일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쉽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도시 간, 국가 간 이동을 하는 장기여행은 여행이 주는 즐거움과 비례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피로와 긴장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부부를 만날 당시의 나는 길게 한 여행이라고 해봤자 태국과 캄보디아를 보름간 여행한 경험이 전부였다. 게다가 회사에 매여 있다 보니 장기여행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두 분 정말 멋지세요. 그리고 부러워요!”
“아가씨는 아직 젊은걸요. 앞으로 기회가 얼마나 많겠어요.”
젊을 땐 젊은 게 좋은 줄 모르고 그저 제 앞의 사정만 걱정하기 바쁘다. 문득 앞으로도 계속 마감에 쫓기며 회사생활을 하고 여유자금을 어렵사리 만들어 길어야 일주일쯤 여행을 하겠구나 생각하니 조금 우울했다. 과연 그 ‘기회’라는 게 언제쯤 올지 아득했다. 그러자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고 또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미래는커녕 내일을 계산하는 것도 벅찼다. 월세를 내고 학자금을 갚고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만도 빠듯한 생활이었으니까. 그러니 사실상 루앙프라방행도 사실 적잖은 지출과 부담이 있었다. 그랬으므로 루앙프라방에서의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고 매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인연은 잠깐의 마주침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찹쌀밥’과 ‘돼지고기구이’를 주문해 두 분과 함께 식사를 했고 다음 날 루앙프라방 근교의 꽝시 폭포와 빡우 동굴도 함께 갔다. 부모와 자식 같은 모습이었지만 베테랑 여행자는 두 분이었기에 내가 그분들에게 얻는 정보와 도움이 많았다. 꽝시 폭포를 가기 위해 잠시 산길을 오를 때에, 나는 두 분의 뒤를 가만히 따랐다.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떠올렸고 또한 내가 부모님 나이가 되었을 즈음을 상상했다.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야지, 나이가 들어서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여행해야지, 그즈음에는 내게도 함께 걷는 동반자가 있을까.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윽고 옥빛의 폭포와 풀장처럼 넓은 계곡이 눈앞에 등장했다. 어떻게 저런 빛깔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청아한 물빛은 마치 요정들이 모여 있을 것 같은 동화 속 세계 같았다. 일부 여행자들이 옷을 훌훌 벗고 하늘처럼 푸른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와 부부는 그저 차가운 물 안에 발을 담그고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빛을, 물감을 푼 듯 영롱한 계곡을, 사람들의 달뜬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우연히 카페 앞에서 만났던 닉과 레이첼, 그리고 메이와는 뷔페식 노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이것도 다 인연인데 밥이나 한 끼 하자’가 어느덧 2차, 3차까지 이어졌다. 간단하게 술을 마신 장소는 라오스의 전통의상 패션쇼가 열리는 야외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에는 할로윈데이를 맞아 할로윈을 연상시키는 갖가지 오너먼트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레스토랑에 와서야 이 밤이 할로윈데이인줄 알았다. 호박과 마녀, 해골 장식이 주렁주렁 걸린 마당 한 켠에서의 전통의상 패션쇼는 다소 어색한 조화였지만 그런 것들이 수다 삼매경에 빠진 네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칵테일을 두세 잔쯤 마셨을까. 메이가 우리가 마신 술값을 모두 계산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을 즐기지 않는다고 했던 그녀였던지라 미안한 마음이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하자 도리어 닉이 한국말로 “괜찮아요”라고 했다. 한국의 비정상적인 교육열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만큼 세상사에 관심이 많고 몽족과 어울렸던 며칠간의 시간을 추억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메이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러고 보면 세 사람 모두 한국에 대한 적잖은 관심이 있었던 덕분에 내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떠난 후 남은 셋은 레이첼이 새로 사귄 라오스 친구를 따라 루앙프라방 유일의 나이트클럽에 갔다. 손님의 반절은 외국인, 반절은 현지인들로 보이는 대형 클럽이었다. 고막이 따갑도록 울려댄 노래는 트웨이원의 ‘Go Away’. 그곳에 그 노래를 알만한 한국인 손님은 어쩐지 나밖에 없는 것 같았고 나는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내 걱정 말고 Go Away, 더 멋진 사람 만날게, 널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슬픔은 지금 뿐이야 boy~’ 우리는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또 노래를 불렀다. 공교롭게도 모두에게 루앙프라방의 마지막 밤이었다.
“우리 내일 공항 갈 수 있을까?”
“글쎄, 못 가면 여기 살지 뭐!”
술에 취한 닉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You are so beautiful!” 그 말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묵던 호텔의 리셉션 직원인 라오스 아가씨 켁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승혜, 넌 수줍음이 많은 것 같아. Don’t be shy, Because you are beautiful!” 모두가 나더러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이 천국 같은 곳에서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어둠이 걷힐 때까지 춤을 춰도 괜찮을 것 같았다. 깔깔 웃는 나를 영문 모를 눈으로 쳐다보는 닉에게 대답했다.
“I know, I’m so beauti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