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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Nov 07. 2019

스무 살의 열정, 서른 살의 불안 (1)

세 번째 방, 시엠립 



갑작스러운 비행기 공포증 

인천 발 시엠립 행 보잉 737에 타고 있었다. 곧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기체에선 미세한 진동과 소음이 있었다. 내 자리는 조종실과 가까운 앞쪽이었기 때문에 시선은 조종실의 막힌 벽에 자연스럽게 가 닿았다. 이전 해에 제주도를 들락거리느라 자주 탔던 기종이었다. 중단거리를 오가는 작은 비행기인 만큼 기내가 좁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기분 탓이라기엔 점차 숨 쉬는 것도 벅차게 느껴졌다. 비행기는 아직 지상에 있었지만 완전히 밀폐된 공간에 갇혔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왜 이럴까, 그간 잘 타던 비행기였는데 대체 왜 이런 두려움이 밀려드는 걸까. 순간 내리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절박함이 생겼다. 비행기는 천천히 유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내려달라고 애원하면 내릴 수 있을까, 초조한 나와는 달리 승무원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이륙 전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오랜 지기를 바라봤다. 아마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정말 승무원에게 “내려달라”는 요구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창밖 공항 풍경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늘 혼자였던 여행이었는데 마침 이런 상황에 친구가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에게 내색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천천히 숨을 마시고 내뱉었다. 괜찮아, 괜찮아. 죽지 않아, 걱정하지마. 천천히 움직이던 비행기는 곧 급발진하듯 굉장한 속도로 활주로를 달렸고 이내 부웅 떠올랐다. 가슴을 옥죄는 것만 같았던 증상은 비행기가 고도를 높일수록 점차 완화됐고 충분하게 높은 하늘로 올랐을 때는 완전히 사라졌다. 다행히 경미한 공포증이었다. 사실 이런 증상(아마도 공황장애로 의심되는)은 처음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은 더 침착할 수 있었지만 기내에서 겪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2015년 12월 겨울. 10년 만에 캄보디아 시엠립으로 향하는 비행기였다.




겨울날의 퇴거명령

회사를 나온 시점부터 내 삶은 이전에 생각해 본 적 없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돌이켜보면 언뜻 자연스러운 수순 같기도 하다. 퇴직 후 한 달,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엄마와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인도였고 여러모로 놀라운 명성을 가진 나라답게 엄마와의 여행은 눈물의 대서사시로 마무리되었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모녀 여행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즈음, 그보다 앞서 뜻밖의 기회로 경주 여행안내서를 출간했다. 경주를 그토록 여러 번 오갔지만, 그곳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쓰리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 없던 일이었다. 특정 도시와 나의 인연이 책으로 결실을 맺었음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벅차고 감사한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얼결에 ‘여행작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경주 여행안내서를 출간한 이듬해, 여러 차례 원고를 반려받았던 모녀 인도 여행기도 출간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처럼 출간과 동시에 새로운 책의 기획을 진행했고 아주 자연스럽게 프리랜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한 기간은 꽉 채운 5년.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출근 지옥철과 새벽 택시를 포기하는 대가는 너무나 명료했다. 돈. 책 준비로도 시간은 빠듯했지만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선 단행본 작업 외에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어찌 보면 돈은 덜 벌고 여유를 더 갖는 ‘자발적 가난’의 모양새였지만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선 여유로울 새가 없었다. 월급이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을 찾아서 할 때는 오히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바쁠 때도 많았다. 그래도 좋은 점은 주변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주체성이었다. 거래처가, 회사 사장이, 부장이 시키니까 하는 일, 그러니까 월급쟁이니까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하기 좋은 일’이란 거의 없으며 하달받은 일을 하면서 분명히 그 안에서의 배움과 보람을 얻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프리랜서로 독립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거의 기본값으로 수직관계, 갑을관계에서 오는 강압이 있었고 그에 따른 정신적인 괴로움이 따랐다. 프리랜서라고 해서 그런 부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을 한다, 안한다의 최종 결정권은 내게 있다.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협의에서도 내가 곧 회사의 대표이니 누구보다 의사를 적극적으로 피력할 수 있다. 이는 곧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돈을 주지 않는다. 내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데에는 막중한 책임감이 따른다. 생계가 걸렸으니 대충 할 수도 없다. 


짧은 시간 지속적으로 출간된 여행책들로 나의 직함은 ‘여행작가’였으나 나는 아주 포괄적인 글쓰기를 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펴내는 각종 지역 홍보 책자를 비롯해 학생들의 자기주도학습을 독려하는 지도자료, 효 사상을 주제로 한 이야기책, 예술가 인터뷰집의 윤문과 교정교열에 이르기까지 내가 문장을 만들고 또 만지는 책은 실로 다양했다. 내 가난을 염려해준 이전 직장 선배들 덕분에 회사를 다닐 때처럼 각종 사보 취재도 자주 나갔다. 어느 날은 섬유 원단 공장에서 30년 장기근속한 근로자를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성공한 벤처 기업가를 만나 성공 비결을 묻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냉동 볶음밥 제조 공장, 또 다른 날은 육류 가공 공장을 취재하고 근로자들의 멘트와 그들과 거래를 맺은 기업 관계자의 멘트를 넣어 기사를 작성했다. 그런 기사들의 주제는 주로 ‘상생’이었다. 상부상조니 협력성장이니 하는 단어를 쓸 때마다 헛웃음이 나오는 까닭은 어쩔 수 없이 내 지난 경험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이었다. 상생은 개뿔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한편 두 손은 기계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문제는 또다시 집이었다. 홍제동 단독주택은 혹서기의 찜질방 더위와 혹한기의 시베리아 강추위를 체험할 수 있는 낡은 집이었다. 과연 이 집에 지붕과 벽은 왜 존재하는 걸까 싶을 지경으로 무덥고도 추웠다. 회사를 다닐 때는 낮 동안 집을 비우니 그럭저럭 살만했는데 프리랜서가 된 후 집이 사무실이 되자 주거의 질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선풍기는 한여름 무더위에 더운 바람만 일으킬 뿐이어서 머리에 얼음주머니를 얹고 컴퓨터 작업을 하곤 했다. 곧 얼음이 녹아 그 물이 머리를 적시고 얼굴로 흘러내렸다. 내 눈물도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름은 겨울보다 나은 편이었다. 혹한기에는 추위에 손이 곱아 키보드를 누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입김을 불고 핫팩을 손에 쥐어도 일시적일 뿐이었다. 결국 24시간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켜는 날이 많아졌다. 그나마도 집 근처에 24시간 카페가 없어 지하철로 여섯, 일곱 정거장 떨어진 ‘번화가’로 나가 일을 하고 귀가 때는 기진해진 채 택시를 탔다. 추위는 벚꽃이 만개한 4월까지 이어졌다. 따뜻한 볕과 바람은 봄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었다. 방은 겨울의 냉기를 내내 머금고 있었다. 창 밖으로 벚꽃이 흩날리는데 나는 두툼한 수면양말을 신고도 발이 시렸다. 4월 중순의 그날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늦은 아침이었고 나는 무언가를 쓰고 있었고, 손발은 찼다. 여객선이 침몰했고 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방 안에 있는 나도 이렇게 추운데 바다 위에서 얼마나 추울까…. 그래도 구조되었다니 다행이다…. 우연히도 바로 이전 해, 나는 지인의 소개로 한 교육단체에서 발행하는 책을 만드는 용역을 했다. 고등학생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해 단행본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학생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고되기도 했지만 청소년과 대화할 기회가 없는 나로선 꽤나 새롭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꿈’을 말했다. 아주 진중하고도 간절한 눈빛으로. 그들의 진심을 전해 듣고 나면 내 마음마저 뜨겁게 부푸는 듯했다. 희생자들의 합동 분향소는 또한 우연히도 내가 친구들과 반나절 나들이를 갔던 곳이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워서 나는 여러 번 걷다 서다를 멈췄다. 아니다. 우연이 아니었대도 나는 그렇게 인사했을 것이다. 이제는 따뜻한 곳으로 가라고.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포와 추위를 마주했던, 예쁘고 착한 친구들에게….


누가 봐도 집을 옮기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정작 새로운 집을 찾는 노력은 없었다. 마음도 몸도 집과 함께 얼었다. 이유가 없진 않았다. 이제 막 취업한 동생의 직장이 집과 가까운 곳이었고 무엇보다 당장 저렴한 월세를 얻기도 막막했다. 그러던 와중에 집을 반드시 옮겨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한겨울 현관문을 두드린 집주인의 손에는 퇴거명령서가 들려 있었다. 홍제동으로 이사 온 지 3년. 이 정도면 꽤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직업도 바뀌고 애인도 바뀌고, 유승혜라는 사람도 조금은 바뀐 것 같았다. 봄이면 창밖으로 드리운 벚꽃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봄은 짧고 여름과 겨울은 길기만 했다. 무엇보다 이제 겨울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시엠립첫사랑처럼 아프고 아름답게

2006년 2월, 시엠립과 태국의 국경 근처. 네 사람을 태운 승용차는 비포장길을 거칠고 빠르게 달렸다. 흙먼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과연 ‘스피드 택시’라 불릴 만했다. 반대편에서 커다란 트럭들이 지나갈 때마다 아찔했다. 마주 보고 달려오는 자동차들은 일부러 과시하듯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국경을 향하는 길이었으므로 자동차 통행량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로 환경은 한국의 시골길보다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길을 트럭을 타고 지나는 여행자들도 많다고 했다. 경비를 아끼려다 엉덩이가 남아나질 않았다는 후기를 여러 개 읽은 탓에 잡아탄 택시였지만 사고 확률로 따지면 택시가 우위일 듯했다. 두어 시간쯤 달리자 길폭은 좁아졌고 도로 사정은 전혀 나아짐이 없이 오히려 푹 패인 구덩이가 자주 등장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트럭이나 버스로는 확실히 고통스러웠을 길이었다. 길가로 드문드문 허름한 가게들과 남루한 사람들이 보였고 밭인지 공터인지 알 수 없는 들판 위로 깡마른 소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농촌에서 자랐지만  전에 본 적 없이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신기하거나 놀라운 모습은 아니었다. 뭔가 마음이 닳는 것 같은, 이상하고 묘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여정을 마치고 다시 같은 길을 따라 태국으로 돌아갈 때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시엠립이라는 도시와의 질긴 인연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련함처럼 ‘처음’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일 수도 있지만 그리 치부하기에 시엠립은 도시 그 자체의 기운으로 나를 압도했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슬픔인지 피로인지 감정이 뒤엉켜 있는 와중에 택시는 강을 지나는 낡은 다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당장 무너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다리 위였으므로 택시는 그제야 속도를 낮췄다. 갑자기 자동차 앞으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들 무리가 나타났다. 아이들은 팔을 벌려 차를 막아서는 시늉을 하며 창문을 두들겼다. 원달러, 원달러! 일행은 짐짓 당황했지만 아이들에게 돈을 꺼내주는 사람은 없었다. 택시기사도 익숙한 듯 차를 멈추지 않았다. 다시 얼마간 달렸을 때 택시는 갓길에 잠시 멈췄다. 기름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아까 본 아이들 또래와 비슷한 소년 한 명이 기름이 담긴 페트병을 들고 왔다. 그리곤 페트병에 호스를 꽂아 능숙하게 차에 기름을 넣었다. 일행 모두가 이런 ‘주유소’는 처음 본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는 무사히 시엠립에 닿았다. 택시에 탄 승객은 모두 어린 여성들이었다. 스물한 살의 나와 중학교 3학년이던 동생, 그리고 나보다 서너 살이 많은 언니 둘이 있었다. 그들은 캄보디아 국경 포이펫에서 만나 택시를 같이 탄 이들이었다. 비자 발급소가 어딘지 몰라 두리번대던 어리바리한 자매는 한국인 여행자들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첫 해외여행, 그것도 첫 배낭여행이었던 데다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시엠립으로 향하는 우리의 여정은 긴장과 실수의 연속이었다. 그들 덕분에 수월하게 택시를 잡았고 그렇게 육로로 국경을 넘었다. 서울을 출발하고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린 여정이었다. 

나와 동생은 지금은 없어진 한인 게스트하우스에서 3박 4일을 지냈다. 방안에는 시도 때도 없이 도마뱀이 출몰했지만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발이 달린 뱀은 충분히 귀엽게 봐줄 수 있으니까. (동남아 지역 숙박업소에서 도마뱀은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고 해롭지 않다.) 그렇지만 녹물로는 도저히 샤워와 세수를 할 수 없어 주인에게 방을 바꿔 달라고 했을 때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여긴 캄보디아야”


방을 바꿔줬대도 똑같이 녹물이 나왔을 것이다. 사실 그곳뿐 아니라 당시 시엠립의 상당수 게스트하우스들은 정화 장치가 따로 없어 녹물이 나오는 실정이었다. 그렇다 해도 주인의 대응은 불쾌한 데가 있어서 나와 동생은 주인의 그 말투와 표정을 우리끼리 따라 하며 웃곤 했다. 

우린 뙤약볕 아래서 수많은(지금 돌이켜보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사원을 둘러보았다. 제대로 공부를 해간 것도, 가이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비슈누가 누군지 시바가 누군지도 모른 채 힌두교 사원에 들어갔다. 가져간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척했지만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원들은 그저 검은 돌덩이들로 보였다. 어느 순간 사원보다 그 주변 풍경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물렀다. 정글 혹은 지평선, 조악한 팔찌를 파는 어린아이들, 나무 그늘 아래서 느긋하게 책을 읽는 일부 백인들…. 동생이 배고프다고 할 때 나는 언제 또 올지도 모를 곳에서 음식 타령을 한다며 핀잔을 주었다. 덥고 허기지기는 나도 마찬가지인데 왜 그리 고집을 피웠는지 모를 일이다. 

사원이 모여 있는 유적 지구와 시내를 오가는 데에는 오토바이를 개조해 마차처럼 승객을 태우는 뚝뚝이를 탔다. 뚝뚝이 기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소개해준 롬비볼. 우리는 그를 미스터볼이라고 불렀다. 


새벽 4시 30분, 미스터볼의 뚝뚝을 타고 새벽바람을 맞으며 향한 곳은 앙코르와트. 뚝뚝이는 빠르게 달렸지만 아침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사방이 어두웠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에 비로소 빛이 있었다. 이제껏 본 적 없었던 영롱한 별무리. 새벽별이 그토록 반짝이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천지 분간이 되지 않는 자리에 뚝뚝이가 섰고 미스터볼이 앙코르와트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어둠 속 미지의 세계. 두려움보다 설렘이 컸을까. 뚝뚝이에서 성급하게 내리다 그만 오토바이 배기통에 정강이를 데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뜨거운 통증이 온몸을 전율케했다 

어두워 보이지 않는 상처를 외면하고 어둠에 묻힌 사원으로 들어갔다. 오로지 발의 감각에 의존한 채. 여행자들에게 앙코르와트에서 일출을 본다는 것은 바로 그 사원 앞에서 사원 뒤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본다는 의미다

연꽃 봉우리 형태의 본당 지붕 위로 떠오르는 태양. 그것은 곧 앙코르와트의 상징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사원 앞에서 해를 기다리지 않았다. 3층 성소, 사원 꼭대기를 향해 가파른 계단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원 위에 서 일출을 보기 위해. 

어떤 대단한 의미를 부여한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단지 정보가 없었고 생각이 짧았던 까닭이었다. 앙코르와트에서의 일출이 유명하다기에 으레 높은 곳을 찾아 올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다면 여러 사람들을 따라 소위 일출 스팟이라 불리는 사원 앞 연못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화상을 입은 나의 다리는 무작정 사원 위를 향하고 있었다.   

신 앞에서 몸을 낮추라는 의미로 가파르고 좁게 만든 계단을 한발한발 엉금엉금 올랐다. 돌이켜생각해보면 정말 위험천만했던 순간이다. 그땐 지금처럼 별도의 나무 계단이 없었을 때라 한해에도 수차례, 낙상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렇게 기어이 올라간 사원의 성소 끄트머리에 앉아 해를 기다렸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그곳엔 나와 함께한 동생 외에도 몇몇의 여행자들이 더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전날 사원의 작은 연못 앞에서, 대다수가 그러하듯 앙코르와트 일출의 상징적인 풍경을 이미 봤는지도 모른다. 앙코르와트의 실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채로 무작정 어둠 속을 걷고 또 기어서 사원 정상까지 오른 이들은 아마도 나와 동생 뿐인지도 모른다. 

밤 사이 차갑게 식은 사암 위에 앉아 해를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이나 추웠다. 다만 화기가 가시지 않은 정강이의 상처만이 화끈거릴 뿐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숲과 평원의 실루엣이 점차 드러나다 어느 순간 환하게 온 사위가 밝아 졌다. 기대했던 풍경이 아니었다. 감동이 덜했던 이유는 단지 화상 때문이 아니었다. 눈앞에 앙코르와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앙코르와트 안에 내가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태양을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그 풍경을 사진으로 사진으로 찍는다 한들 그곳이 앙코르와트인지는 아무도 모를 풍경이었다. 


멀리 봐야 보이는 것, 그래야 더 아름다운 것들을 그땐 몰랐다. 거리 두는 법을 몰라 풍경 안으로, 때론 사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애석하지만 지금도 그럴 때가 많다. 그래서 삶이 곧잘 노곤해지곤 한다. 나의 성급함에, 나의 욕심에 그만 눈이 

먼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치고 걸어가 기어이 나와 풍경을, 나와 당신을 일체(一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곧 실망하고 만다. 내가 찾던 것이 여기에, 그리고 당신에게 없노라고.


한발짝만이라도 물러섰더라면. 단지 마주볼 수 있을만큼의 거리를 두었더라면..... 


 미스터볼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나를 약국 앞에 데려다주었다.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갔다. 화상 흉터는 그 후로 2~3년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했는데 어느 날엔가 보니 더 이상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흉터가 평생 남을까 봐 걱정하던 때가 있었는데, 막상 사라지고 나니 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첫 배낭여행의 훈장처럼 남은 흔적이어서, 그 상처가 그날들을 기억해주는 것만 같아서. 게다가 당시 앙코르와트 사원과 그 주변 사원들에서 찍은 사진들은 카메라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혹은 내가 실수를 한 것인지 메모리카드에서 싹 지워져 있었다. 다행히 보조 카메라로 가져갔던 필름 카메라가 있어 몇 장의 빛 바랜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나와 동생은 ‘앙코르와트의 저주’라도 받은 모양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런데 화상을 입고도, 사진을 죄다 날리고도 기분이 우울하진 않았다. 시엠립, 여기 이곳 앙코르와트에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 도시가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자신에게 오롯하게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밥 먹으러 가자는 동생의 말도 무시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원을 꾸역꾸역 들여다보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것 같다. 

사진도 화상도 사라진 여백에는 좋은 사람들과의 추억이 남았다. 국경도시 포이펫에서부터 시엠립으로 들어가는 택시를 함께 탄 두 대학생 언니 L과 K, 그들 덕분에 알게 된 또 다른 언니 S는 배낭여행이 처음인 우리 자매에게 참 다정했다. 안젤리나 졸리의 방문으로 유명해진 레스토랑 레드 피아노에서 함께 했던 저녁 식사, 낡은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수다, 같이 돌아보던 사원에서의 시간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언니 S는 시엠립을 먼저 떠나면서 우리에게 작은 알람시계를 주고 갔다. 알람이 없어서 혹여 늦게 일어날까 걱정이라는 내 말에 선뜻 내준 카시오의 알람시계다. 내가 첫 해외여행을 하던 때만 해도 구글맵은커녕 스마트폰이 없어서 ‘종이 지도’를 꺼내서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시계를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여행 후 7~8년쯤 지났을 무렵, 나는 퇴근길의 혼잡한 지하철에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하차하는 언니 L을 보았다. 분명 그녀였다. 그녀는 내리고 나는 탔다. 매우 짧은 순간이어서 아는 척조차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길었대도 인사를 건네진 못했을 것 같다. 언니에게 시엠립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마주친 얼굴이 어두웠던 탓에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다고 표현하기가 망설여진다. 다만 언니도 나처럼 이따금 뜨겁고 설렜던 그날을 회상하며 미소지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나는 나를 ‘언니’라 부르는 여행자들과 종종 만나고 또 헤어진다. 오래전 내가 받은 온정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낯설지만 따뜻한 여행자 언니’가 될 수 있을까. 

평양냉면집 북한 아가씨 심옥경 씨도 잊지 못한다. 연일 단체관광객이 밀려드는 식당에 나와 동생의 방문은 그녀에게 꽤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여행 중이냐, 학생이냐 이것저것 친근하게 물어오던 옥경씨. 나와 동갑인 그녀는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건네며 냉면을 ‘깨깨’ 섞어 먹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드럼은 또 어찌나 잘 치던지. 우리 자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밖에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시엠립의 뚝뚝이기사 미스터볼. 어리숙한 내가 곁을 많이 준 까닭에 미스터볼은 나를 많이 좋아했다. 그가 데려간 고요했던 아침의 사원, 반띠에이 쌈레는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원이다. 그는 사원 바닥에 떨어진 짬빠이(플루메리아)를 내게 내밀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은 싱그럽고 향기로웠다. 나는 그 꽃을 종일 귀에 꽂고 다녔다. 그 순박한 청년이 나도 싫진 않았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다던 그 친구의 수첩에 한글 자음과 모음, 그의 이름 ‘롬비볼’을 또박또박 써주었다. 마지막 날에는 그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톤레삽 호수의 보트 유람도 함께 했다. 사흘 동안 운전을 해준 것, 그리고 내게 준 마음이 고마워 나름 팁도 넉넉히 줬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손님’으로서의 최선이었다. 헤어질 때 눈가마저 촉촉해져 있던 그의 슬픈 얼굴이 오랫동안 잔상처럼 남아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온통 단 며칠만 더 머무르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슬픔인지 피로인지 도대체 모를 감정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처음 이곳에 들어설 때처럼.

서너 달쯤 지났을 때 미스터볼에게 메일이 왔다. 내가 많이 보고 싶다는 말, 그리고 자신에게 얼마간의 돈을 빌려달란 말이 적혀있었다. 그 돈이 있어야 한국어 시험을 응시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답장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여행도, 사람도, 그리고 인생도 향기로운 짬빠이 같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때의 나도 모르진 않았다. 시엠립은 내가 그 도시로 들어서는 처음 그 순간부터 빛과 어둠의 양면을 그대로 보여준 곳이었다.      


봉천동 작은 방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홍제동 집을 나왔다. 집주인은 충분히 집을 알아볼 여유를 줬지만 한시라도 빨리 추위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마침 동생이 주한 세르비아 대사관의 관저요리사로 일을 떠난 직후였다. 함께 살며 큰 의지가 되었던 동생의 해외 이주로 인해 나는 최소 2년은 혼자 살게 되었다. 혼자 살 집이니 지금보다 작은 집이라도 무조건 단열이 잘 되는 방을 얻겠다는 결심이 섰다. 조건은 간단했다. 월세가 35만원을 넘지 않을 것, 따뜻할 것, 그러나 고시원은 아닐 것. 서울에서 그런 조건의 방이 고를 수 있을 만큼 모여 있는 동네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서울의 동서남북 가장자리 동네들을 두루 둘러보니 내가 원하는 조건의 방들은 신림·봉천 일대에 가장 많았다. 예상한 결과였다. 조금이라도 방세를 아끼려 서울에서 발품을 팔아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또 거쳐 갔을 가능성이 높은 동네일 것이다. 집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내 집’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동네, 저마다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 나그네처럼 잠시 들렀다 가기도 오래 머물다 가기도 하는 동네. 옥탑방과 반지하방, 그리고 세면대가 없는 방이 부지기수인 동네. 조용필의 <꿈>이라는 노래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런 동네. 부동산 중개인을 따라 봉천동 언덕배기를 바지런히 오르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따뜻한 방을 찾았다. 세입자가 한동안 들지 않아 꽤 오랫동안 공실이었던 집이라고 했다. 현관을 열자 한겨울이었는데도 훈훈한 기운이 훅 끼쳤고 오후의 따뜻한 볕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2층인 데다 양옆으로 다른 세대가 있는 ‘끼인 집’이어서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따뜻한 집이라고 했다. 여름에 더울 수도 있겠다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이전 세입자가 그대로 두고 간 벽걸이 에어컨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 에어컨, 쓸 수 있는 거죠?”


주인집 아주머니는 에어컨 리모컨을 들어 보였다. 그럼, 작동 잘 되지. 그렇게 나는 비슷하게 생긴 다가구·다세대 주택이 촘촘하게 모여 있는 봉천동의 국사봉 비탈 동네로 이사했다. 개봉동 시절 이후 생활권은 다시 한강 이남이 되었다. 물론 모두가 아는 바로 그 ‘강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리적 거리보다도 심리적 거리가 훨씬 멀었기 때문에 지하철로 몇 정거장 안 되는 거리라도 포괄적으로 강남이라 지칭하는 지역에 가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잰걸음으로 13분 정도 걸렸다. 어떤 날에는 신림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봉천역에서 내려 걸어오기도 했다. 집을 200m쯤 앞두고는 가파른 언덕을 걸어 올라야 했다. 집에 거의 다다라선 헉헉 숨이 찼다. 오르막길 끄트머리에 다다르면 내가 사는 붉은 벽돌의 다가구 주택과 오래된 아파트 두 동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1971년에 완공한 아파트는 오래되기로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다. 이따금 택시를 타고 귀가를 할 때면 나는 기사님에게 “혹시 복권아파트 아세요? 주택복권할 때 그 복권이요”하고 목적지를 말했다. 아파트를 아는 분들은 꼭 “그 아파트가 아직도 있냐”거나 “오래됐어도 한강 모래를 퍼다 만들어서 참 튼튼하다”는 등의 말들을 덧붙였다. 아파트의 이름을 매일 접한 탓이었는지 나는 그 동네에 살고부터 정기적으로 복권을 사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5,000원어치의 로또 복권 사면 추첨이 있는 토요일 저녁까지 5,000원어치의 설렘을 즐겼다. 1등 당첨을 가정하고 당첨금으로 무엇을 할지 공상하는 즐거움은 하나의 작은 낙이었다. 서울에 자그마한 오피스텔 하나, 고향에 작은 아파트 하나를 사고 지중해와 가까운 도시로 향하는 비행기의 비즈니스석을 구매하고, 부모님도 비즈니스석으로 모셔야지…. 뭐 이런, 빤하지만 아무래도 이번 생은 어려울 것 같은 희망사항들. 다섯 번에 한 번쯤은 5등에 당첨되었다. 나는 당첨금 5,000원을 다시 복권으로 바꿨다. 결과적으로 봉천동을 떠날 때까지 5등 이상의 당첨은 한 번도 된 적이 없으니 이름이 당첨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내가 봉천동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예감’이 좋다고 하셨다. 은희경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이 생각난다면서 글쓰기에 괜찮은 동네 같다고 하셨다. 우연히도 근처에는 아빠가 대학생 때 잠시 살았던 집이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있었다. 아빠는 그 시절을 추억하며 ‘남의 집’ 앞에 섰고 나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 집에 살았던 때의 아빠는 상상이나 하셨을까. 30여 년이 훌쩍 지난날, 자신이 사는 집 앞을 매일 지나다니는, 그때의 당신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린 딸을. 

봉천동 ‘201호’는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물론 단점이 없진 않았다. 내가 처음 집을 봤던 시간인 오후 3~4시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어두운 편이고 방음이 조금 약한 편이었으며 바퀴벌레와 개미가 종종 출몰했다. 또 하나 특이사항이 있다면 한 달에 한 번꼴로 터지는 동네 주민들의 싸움이었다. 주차문제나 아파트 주민위원회 내에서의 문제, 부부싸움이 큰 소리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고 단순 시비나 술주정에 의한 다툼도 적지 않았다. 가끔 경찰이 출동할 만큼 판이 커지기도 했는데 다행히 강력범죄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싸움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창문이나 현관을 열고 싸움을 구경했다. 나도 때때로 구경꾼 중 한 사람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는 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내게 가장 중요한 조건, 겨울에 따뜻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겨울에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방안이 훈훈했다. 예상대로 여름은 좀 더웠는데 낡았어도 작동은 문제없던 벽걸이 에어컨 덕분에 머리에 얼음주머니를 얹는 일은 없었다. 전기세가 좀 나오더라도 매일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씩 시켜 마시며 작업하는 편보다 훨씬 경제적이었다. 식물 가꾸기를 즐기고 길고양이를 돌봐주는 주인아주머니도 좋으신 분이었다. 오래된 3층짜리 다가구 주택을 오르내리는 외부 계단 위에는 언제나 화분들이 푸르렀다.


엄마의 말대로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아늑하고 따뜻한 방. 그 방에서 수백, 아니 수천 페이지의 글을 썼다. 그중 계약하지 않고 쓴 글은 거의 없었다. 생계와 경력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글이 아니면 쓰지 않았다는 의미다. 홍제동에서 봉천동으로 집을 옮긴 후 출간한 책은 제주 여행안내서였다. 홍제동에서 출간한 경주, 강릉, 군산에 이은 네 번째 국내 여행안내서였다. 경주 여행안내서 출간 이후, 여행작가로서 자리를 굳히겠다는 의욕이 단행본 작업에 탄력을 불어넣었다. 경주를 편애했지만 강릉이든 군산이든 해당 도시를 취재할 때는 그 도시들과 연애하듯 완전히 도시에 몰입했다. 그러나 한 도시를 한 권의 책을 통해 안내하는 일은 내가 도시를 알아가는 기쁨과는 별개로 굉장히 고된 작업이다. 산고에 비할 수 있겠냐마는 한 페이지를 더할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이 닳았다. 키보드는 도시를 수식하는 활자를 만들어 가는 한편, 나는 나 자신을 지우고 지우개처럼 닳아져 갔다. 한편 책 판매는 부진했다. 혼자 읽자고 낸 책이 아니었는데 혼자 읽으려고 낸 책처럼 되어버리자 ‘닳아버린 시간’에 대한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주’에 이르러 나는 책을 출간하기도 전에 완전히 번아웃 상태가 되었다. 에메랄드빛 바다, 짙고 깊은 곶자왈, 그냥 봐도 좋고 오르면 더 좋은 오름, 걸어도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올레길…. 그 모든 것이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제주인데 내 마음은 어쩐 일인지 폐허가 되어갔다. 그러자 정말로 폐허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늘 갔던 경주가 아니라 경주보다 더 오래전부터 그리워했던 곳. 


스무 살 즈음의, 참 많은 ‘첫’이 있던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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