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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Nov 08. 2019

스무 살의 열정, 서른 살의 불안 (2)

세 번째 방, 시엠립 

어둠과 밝음의 경계 어디쯤 

얼마나 변했을까. 비행기에 탄 직후 일어난 혼자만의 작은 소동 때문에 더 그랬겠지만 시엠립으로 향하는 길에서의 감정은 처음 그때처럼 다소 복잡한 데가 있었다. 빤한 말로 강산이 변했을 시간이 지났고 더구나 여행작가로선 ‘의외’일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으로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패키지여행을 선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본격적으로 시엠립을 취재하기 전에 도시에 대한 핵심적이고 간결한 요약이 필요했다. 내게 시엠립은 꿈처럼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만들겠다는 의욕은 충분했지만 과연 내가 이 도시의 여행안내서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있었고 이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이른바 하이라이트만 쏙쏙 뽑아 보는 여행사의 패키지여행은 주요 목차만으로 책의 내용을 훑어보는 과정과 같기에 취재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앙코르와트가 핵심 볼거리인 시엠립은 오래전부터 여행사의 그룹투어가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다. 소위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선택 관광’을 강요하는 패키지여행의 고질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동일한 일정에서 개별 여행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건 사실이었다. 돈만 내면 교통이든 숙소든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아도 인솔자만 따라다니면 되니 이만큼 편한 여행이 또 없기도 하다. 물론 여행의 자율성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혼자’하는 패키지여행은 아무래도 망설여져서 오랜 지기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이미 경주를 취재할 때부터 나중에 해외 여행안내서를 만든다면 꼭 시엠립을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경주를 갈 적마다, 특히 주춧돌만 남은 공터를 볼 때마다 앙코르와트 일대 유적지들의 풍경이 떠올랐다. 레터킹 테라스 위에서 바라보던 넓은 공터, 거대한 스펑나무 뿌리가 감아버린 정글 속 따프롬 사원, 기둥과 기단 조각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숱한 왕실의 사원들…. 낡고, 오래되고, 또 불완전한 것들이 내게 전하는 완전한 위로는 불가해하다. 경주는 경주고 시엠립은 시엠립이지만 두 도시의 정서는 고도라는 공통점을 차치하더라도 닮은 구석이 많다. 패망의 흔적은 곧 그들 도시의 여백이다. 방치된 인공의 석물들은 처음부터 그리되려고 놓였던 것처럼 그들이 놓인 땅과 아무렇게나 솟아난 잡초, 그리고 바람과 한 몸이 되었다. 길고 화려했던 역사를 품은 왕도였던 만큼 폐허는 광활하다. 


나는 그 폐허에 서서 공터를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복원’이 싫다. 무작정 복원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도조차 남지 않은 유적을 구태여 새것으로 둔갑시키는 복원이 싫다. 갑작스레 무너지고 깨진 것이 아니라면 사라진 것은 사라진 대로, 잃은 것은 잃은 대로 그대로 두면 안 되는 걸까. 폐허를 사랑하는 자의 이기심일까. 


10년 만에 패키지여행으로 찾은 시엠립은, 결과적으로 도시의 여백을 느끼기에는 여러모로 제약이 따랐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제약이 있어서 마주할 수 있던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사실상 그곳이 시엠립이여서라기보다 패키지여행이라는 형태에 의한 결과들이었을 테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했던 첫 배낭여행 때의 오묘했던 기분이 비슷하게 찾아들었다.  


우리는 여행사 이름을 크게 써 붙인 35인승 버스를 타고 시엠립 시내로 진입했다. 버스는 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진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를 달렸다. 그 위에서 흙먼지 날리던 10년 전을 추억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버스 안에는 앞으로 3박 4일을 함께할 사람들이 띄엄띄엄 여유를 두고 앉아 있었다. 초면이었지만 한국인들이 모여 앉은 분위기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나와 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었다. 사람들은 공항에서 비자를 받을 적에 ‘1달러’의 웃돈을 주었네 마네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비자 발급 시 담당 직원이 발급비 30달러 외에 1달러의 돈을 더 요구한다는 얘기였다. 오직 한국인들에게만. 웃돈을 얹어주고 비자를 빨리 받아온 한국인들이 만든 악습에서 비롯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웃돈을 건네지 않은 나는 같은 비행기의 승객들 중 거의 가장 마지막으로 비자를 받은 듯했다. 그 어느 곳보다 엄격한 분위기의 입국장에서 웃돈을 주고 또 요구하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여행은 여러 투어 프로그램들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코스로 진행되었다. 하이라이트인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주요 사원군을 둘러보는 날은 단 하루였고 나머지 날은 시내와 외곽 명소 몇 곳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불어 상황버섯과 라텍스, 천연화장품 등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 한인이 운영하는 몇 곳의 한식 레스토랑을 들렀다. 가이드의 설득에 일정표에는 없지만 ‘해야만 후회 없는’ 선택관광 두어 가지도 했다. 그중에는 시엠립 ‘평양랭면집’ 방문도 있었다.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을 보고 평양냉면과 북한음식 일체를 즐기는 코스였다. 나는 옥경씨를 떠올렸지만 나와 동갑이었던 그녀가 있을 리 만무했다. 10여 년 만에 찾은 식당은 그때의 옥경씨처럼 앳되고 고운 직원들은 많았지만 다소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침 남북관계가 악화한 때였고 여러 여행사에서 북한식당의 방문을 자제하는 중이라고 했다. 공연은 물론 음식까지도 사진 촬영은 엄격하게 불가했다. 카메라의 작동 여부를 감시하는 직원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냉면과 반찬은 입맛에 맞지 않았고 공연은 지나치게 기계적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가이드는 인심을 쓰듯 북한 아가씨와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자신이 아가씨들과 친분이 있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모든 일행이 ‘은미씨’, ‘신영씨’와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섰다. 줄을 서는 나조차도 지금 이 광경이 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 테이블을 전담하던 직원들도 아니었고 마지못해 사진을 찍는,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정서적 교류가 없는 그렇고 그런 남녘의 손님들과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유쾌하진 않을 터였다. 

식당을 나서는 동안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흘러나왔다. 노래마저 건조하게 들렸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를 비롯해 식당 앞 관광버스들이 일사불란하게 식당 어귀를 빠져나갔다.  



패키지여행 둘째 밤에는 선택관광을 하냐 마냐를 놓고 가이드와 손님 간에 고성이 오갔다. 가이드는 일정표에 없는 선택관광을 권유하며 인원이 적기 때문에 누구는 하고 또 누구는 안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이 이견 없이 선택관광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그가 권한 선택관광이란 똔레삽 호수의 수상가옥촌 방문이었다. 마침 건기 직전으로 호수의 물이 마르지 않은 때라 나룻배를 타고 물이 차오른 맹그로브 숲 사이를 돌아볼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은 과장 없는 사실이었다. 한참 물이 마르는 건기에는 호수의 수위가 한참 낮아져서 배를 탈 수도, 숲이 물에 잠긴 특이한 풍경도 볼 수 없다. 가격은 다소 비쌌지만 나와 친구, 그리고 대부분 일행이 선택관광을 찬성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인, 선택인 듯 선택이 아닌 듯 반강제적 일정 외 관광에 불쾌함을 표했고 그것이 그만 싸움으로 번졌다. 줄을 서서 북한 아가씨들과 사진을 찍던 일 이후로 다시 한번 촌극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예견한 일처럼 빤한 구석이 없지 않아서 방관자처럼 그저 그 말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싸움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는 아내를 만류하며 엘리베이터로 끌고 들어간 그녀의 남편에 의해 일단락됐다. 싸움이 난 장소는 일행이 묵던 호텔 로비였다. 주로 그룹관광 여행자들이 묵는 3성급 호텔의 이름은 그 이름도 따뜻한 ‘스마일링’ 호텔이었다. 


다음날, 가이드는 일정보다 30분 이상 지각했다. 몸이 너무 아파서 응급실에 들렀다가 왔다고 했다. 그의 얼굴은 오랫동안 잠을 못 잔 듯 수척해 보였다. 그로부터 훨씬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한 현지 교민이 들려준 얘기에 어쩔 수 없이 그가 떠올랐다. 교민의 말에 따르면 국경도시 포이펫의 카지노에서 밤새 도박을 하고 다음날 일정을 포기하다시피 하는 일부 여행 가이드들이 있다고 했다. 완벽한 오해일 수 있다. 그런데 이후 내가 패키지여행의 후기를 올린 내 블로그에는 그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 가이드가 돈을 떼먹고 도망갔는데 혹시 여행한 시점이 언제냐”는 낯선 이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이듬해 시엠립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가이드는 다쳤는지 한쪽 다리를 절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퍽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행 당시 그에게 이렇다 할 불만은 없었다. 유적군에 들어갔을 때는 책을 통째로 외운 듯 크메르 제국의 역사를 줄줄이 읊으며 상세한 안내를 했고 무언가를 질문하거나 요청하면 늘 웃는 낯으로 응대했다. 한 번은 나와 친구에게 “이번 팀은 너무 힘드네요”하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의 고객 중에선 그나마 우리 두 사람이 편했던 모양이다.   


나와 친구는 여행 중 두 번의 각서를 썼다. 


여행사가 주관하는 일정 외 개인행동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각서였다. 우리가 이른 새벽 앙코르와트 일출을 보길 원했고 늦은 밤 펍에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두 가지 모두 패키지여행에는 없는 일정이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한 우리는 가이드가 불러준 뚝뚝을 타고 앙코르와트로 향했다. 뚝뚝이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고 하늘을 바라보자 별이 가득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밝은 조도로 빛을 내는 별무리였다. 황홀하다, 아름답다는 수식으로도 부족한 찬란함. 우리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뚝뚝은 달리고 바람은 스치는데 별들은 같은 자리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클래식카를 타고 달리는 오래된 흑백 영화 속 주인공들이 된 느낌이었다. 이윽고 앙코르와트에 도착하자 일출을 보기 위해 잠을 양보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해자 주변에 몰려 있었다. 5시가 되자 사원 출입이 허용되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출 감상의 명당으로 알려진 사원 앞 북쪽의 작은 연못 앞으로 향했다. 연못가의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사람들이 재게 걸었다. 개중에는 카메라 삼각대를 들고뛰는 이들도 있었다. 오래전 나와 동생은 어째서 무리를 따르지 않고 사원에 직접 올라갔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일었다. 

사위는 어두운데 사람이 많아 소란했다. 몇몇이 랜턴을 켜자 그들의 맞은편에 있던 사람들이 불빛을 끄라고 소리 질렀다. 수십 대의 삼각대가 연못가에 펼쳐지고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소리 없는 신경전이 오갔다. 어둠이 조금씩 걷힐수록 소란함은 더해졌고 작은 말다툼이 일기도 했다. 이렇게 번잡스러울 줄 알았더라면 10년 전의 선택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괜스레 화상 흉터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 그러는 동안 하늘은 검푸른 보랏빛으로, 그리고 짙은 홍시색으로 변화했다. 사원의 윤곽은 점차 또렷해져 갔다. 캄보디아 국기 정중앙에 새겨진 앙코르와트 사원의 형체가 내 눈앞에, 가위로 오린 듯 선명하게 드러났다. 처음이지만 익숙한 풍경이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카메라 렌즈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3층 성소 끄트머리에 닿아 있었다. 사원의 등 뒤로 천천히,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사원은 검고 사람들의 얼굴은 빛으로 하얗게 번졌다. 이윽고 온 사위가 밝아졌다. 완연한 아침이었다. 


주변이 환해지자 사람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태양은 그러고도 한참 후에나 사원의 지붕 위로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무엇을 기다렸을까, 또 무엇을 보려 했던 걸까. 우리는 해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저 어둠과 밝음 사이, 그 경계에 서 있었다. 모두가 이방인인 채로.     


마지막 밤, 두 번째 각서를 쓴 우리는 10여 년 전보다 훨씬 번화한 시엠립의 다운타운, 펍스트리트의 한 클럽에서 ‘앙코르 비어’를 배가 터져라 마시고 밤새도록 춤을 췄다. 그리곤 또다시 새벽바람을 맞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우스웠는지 뚝뚝이에 탄 채 배가 아프도록 깔깔 웃어댔다. 온 새벽의 고요를 깨우면서. 우리가 깨우는 것이 어둠인지 밝음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배낭 안의 필수품우황청심환

시엠립행 비행기에서 공포를 경험하기 전, 이와 비슷한 증상이 있었다. 제주 여행안내서를 출간하기 직전, 출판사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이었다. 좌석에 편하게 앉은 상태였고 내부에선 어떤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늦은 밤이었고 승객들의 얼굴은 노곤했다. 나는 무채색의 표정을 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았고 조용한 지하철 내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가슴이 갑갑해졌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일 자체가 버거웠다. 정신 차려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비가 오던 여름날, 동백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선흘리 동백동산 안을 미친 여자처럼 뛰어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여유롭게 시작했고 또 성실하게 진행해온 취재였지만 마감일이 가까워지자 빈틈이 너무 많이 보였다. 제주는 내 그릇에 넘치는 크기와 성격의 섬이었음을 너무 나중에 알았다. 비가 오는 동백숲, 아니 곶자왈은 습하고 어둡고 또 무서웠다. 나는 미아처럼 숲 안을 방황했다. 동백이 없는 동백숲에는 곳곳에 뱀 조심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뱀이 튀어나오기라도 했다면 곧바로 까무러쳤을 것이다. 숲 속 연못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서 만난 아주머니 몇이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그제야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무거운 발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은 땀과 빗물에 젖어있었다. 

“아가씨 혼자 곶자왈 돌아다니면 위험해”

연못 위로는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만들어지고 또 지워지고 있었다. 빗방울 하나가 못의 표면에 떨어지면 딱 연잎 크기만 한 파문이 일었다. 방금 전까지 광인처럼 숲 속을 뛰어다니던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제주에서 만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어째서 숨이 가쁜 와중에 비 오던 날의 동백숲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갑작스러운 증상의 원인을 그날에서 찾고 싶었던 걸까. 무섭고도 비참했지만 얄밉도록 아름다웠던 그날을. 결국 나는 역에서 내려 24시간 약국을 찾았다. 그리고 우황청심환 반쪽을 베물었다. 실제로 약효가 있는지 플라시보 효과인지 나는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어쩌면 그 약국서 집까지의 거리가 멀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쓴 입을 다시며 걸었다.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지만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봉천동 작은 방은 아늑한 보금자리였다. 현관문을 열면 사계절 더운 기운이 훅 끼쳐 왔다. 겨울에는 집보다 훈훈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이렇게 따뜻할 수 있는 방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홍제동에서부터 가져온 중고 침대는 창가에 놓았다. 봄, 여름, 가을에는 늘 그 창문을 열어두었다. 침대에 누우면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얼굴을 쓰윽 스쳤다. 오후 4~5시쯤이면 창으로 든 볕이 얼굴을 데웠다. 하루 중 가장 풍부한 빛이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좋은 느낌만 들어오진 않았다. 담배 연기, 짜증이 묻은 날카로운 목소리, 가래침 뱉는 소리, 우렁찬 오토바이의 배기음, 남녀의 통정소리 같은 것들이 이따금 작은 방으로 흘러들었다. 볕이 있을 땐 오래 눕지 못했다. 몸을 일으키면 정면에 보이는 것은 컴퓨터였다. 나는 그것을 켜고 무언가를 써야 했다. 쓰지 않는다 해도 컴퓨터가 켜져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홍제동 시절처럼 노트북을 들고 24시간 카페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니 참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침대에서 컴퓨터까지의 거리가 행성 간처럼 멀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굳이 생활 소음 때문이 아니라도 한낮에는 마음먹은 대로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해가 지고 나서야, 아니 자정이 넘어서야 문장을 쓰는 속도가 붙었다. 새벽에는 고양이들이 울고 쓰레기 수거차가 다녀갔지만 일을 방해하는 소음을 만들진 않았다. 나의 문장들은 한동안 제주도에 머물다가 또 한동안은 시엠립에 머물렀다. 봉천동이 새벽 1시일 적에 글자들은 중산간의 오름들을 오르기도 하고 가파도나 마라도와 같은 멀고 외딴섬을 돌아보기도 했다. 봉천동이 새벽 3시일 적에 문장들은 바푸온 사원의 와불을 바라보기도 하고 똔레삽 수상마을의 어부들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어떤 새벽에는 너 다섯 곳의 명소들을 돌기도 하도 또 어떤 새벽에는 단 한 곳의 명소도 다 돌아보지 못한 채 다음 새벽을 기약했다.


어느 날이었나, 아마도 장마가 지난여름이었을 것이다. 침대에 눕자 누운 자리에서 곧바로 시선이 닿는 천장에 노르스름한 얼룩이 져 있었다. 빗물이 샌 걸까. 얼룩은 점차 커졌다. 야구공만 했던 얼룩이 하루가 지나자 배구공만 해졌고 또 하루가 지나자 농구공만 해졌다. 이러다 천장 전체가 얼룩으로 뒤덮이는 건 아닐까


주인아주머니에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룩은 농구공에서 더 커지지 않았다. 얼룩은 창고 안에서 삭아버린 고지도 같기도, 여러 밤의 눈물이 말라붙은 베개의 눈물 자국 같기도 했다. 침대에 누우면 자연스럽게 천장의 얼룩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얼룩은 한밤에도 잘 보였다. 가깝진 않지만 멀찍이 떨어진 골목 모퉁이에 설치된 가로등 불빛은 창문으로 들어와 천장의 얼룩을 어슴푸레 비추었다. 나는 그 얼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아주 나중에 그 집을 나올 때, 주인아주머니는 왜 진작 천장의 얼룩을 말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렇게 보기 싫은 걸 왜 가만 두었냐고” 혀를 찼다. 


그러니까 모든 게 그즈음이었다. 지하철, 비행기에서의 두려움도, 나가기만 하면 갈등이 생기는 인간관계 문제도, 뚜렷한 원인도 없이 너덜너덜 해져버린 심신도, 그 모든 두려움과 슬픔들이 얼룩이 생길 즈음부터 물밀 듯 밀려왔다. 무엇이 그리 나를 지치게 만드냐 묻는다면 나는 딱히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배탈이 종종 났지만 밥은 잘 먹었다. 악몽을 종종 꾸었지만 잠도 잘 잤다. 슬픔의 원인은 모호했다. 스물몇 살 때처럼 우울함의 원인을 직장 상사에게서, 연인에게서, 통장 잔고에서 확실하게 찾을 수 있다면 답답함이 덜 할까. 5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방에서 여행을 말하는 일이 내게 너무 벅찬 일인 걸까. 서른 살을 훌쩍 넘긴 나의 오늘과 내일은 새벽처럼 모호하기만 했다. 이때부터 나는 우황청심환을 여러 개 사서 가방에 넣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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