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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Nov 14. 2019

여행작가의 진짜 여행 (4)

네 번째 방, 바간 

바간에서 만난 다정한 사람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발바닥을 닦았다. 미얀마를 한 문장으로 수식하라면 ‘맨발의 나라’라고 하겠다.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했다. 발이 닿는 곳곳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었기에 여행자들의 발바닥은 언제나 새까맸다. 처음엔 사원을 나올 적마다 발바닥을 닦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엔가 맨발이 익숙해졌고 까만 더께가 앉은 발바닥이 아무렇지 않아 졌다. 물티슈로 발바닥을 긁어내듯 닦고 있으면 하루 종일 걸었던 종아리의 근육이 스르르 이완됐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걷고 보았구나, 괜스레 뿌듯해지기도 했다. 샤워를 하고 깨끗해진 발바닥으로 침구에 몸을 넣으면 이내 잠이 찾아왔다. 바간에서 머물렀던 숙소들의 천장 무늬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 여행이 꽤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망각의 반대편에는 선연한 기억도 있다. 나는 잠시나마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여행자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취재를 목적으로 한 여행에서는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았고 다가오는 사람 또한 드물었다. 잠시 커피 한 잔을 한다고 해서, 밥을 한 끼 먹는다고 해서 대단한 시간적, 경제적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닌데도 많은 시간, 나는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자처했다. 그러나 바간에서만큼은 천장 무늬를 관찰하지 않았듯 ‘혼자’를 고집하지 않았다. 


어느 아침, 조식을 먹다 지도를 펼쳐놓고 하루 계획을 짜는 듯한 건너편 테이블 커플에게 846호 사원을 알려줬다. “여길 아는 여행자들을 드물어. 내가 정말 어렵게 찾아낸 곳이야. 특별히 너희들에게만 알려줄게.” 사실 실망만 하고 돌아온 곳이었지만 나는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양 그들 앞에 당당했다. 의기양양한 내 표정 때문이었을까, 커플은 고맙다며 내게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미얀마에서는 처음으로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온 줄리앙과 모르간 커플은 내가 표시해 준 지도 상의 위치를 찾아갔지만 결국 846호 사원은 발견하진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846호의 일몰이 얼마나 멋진지 설명해주지 못했다. 다만 그곳에서 만난 유튜버들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들이 내 말에 맞장구를 쳐준 덕분에 험담을 덕담처럼 늘어놓으며 열심히 맥주를 마셨다. 벌겋게 달뜬 얼굴이 되어 숙소에 돌아왔을 때, 숙소의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줄리앙은 대담하게 담을 넘어 두 여자를 위해 문을 열어줬다. 그런 밤이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바간에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를 판다는 집에서 조금 양에 차지 않는 식사를 하고 나왔을 때 지도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대는 중년의 남자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한국인이었다. 나는 또 무슨 오지랖이었을까, 그에게 다가가 어디 찾으시는 곳이 있냐고 물었다. 그가 찾는 여행자 골목의 가게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퍽 먼 거리였고 나는 어렴풋이 위치를 아는 그곳까지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아버지보다 한 살이 많으신 분이었고 나는 그의 보폭에 맞춰 자전거를 손으로 끌었다. 이럴 때 자전거는 좀 성가셨다. 바간에는 언제 왔는지, 미얀마 다른 도시들은 어디를 갔었는지 초면의 여행자들이 나눌 수 있는 질문과 대답들이 오갔다. 그 시간 바간의 햇볕은 눈이 따갑도록 지상으로 내리 꽂혔고 그랬으므로 우리는 상대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앞만 보면서 걷고 있었다. 그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함께 다녔던 곳들을 홀로 다시 도는 중이라고 했다. 그 말을 전하는 그의 말투는 처음과 달라진 게 없는데 듣는 나는 뜨거운 김이 목구멍 어딘가에서 올라오는 느낌이어서 몰래 침을 삼켰다. 나는 그가 아내와 어떤 곳들을 갔는지 조금 궁금했지만 따로 묻지 않았고 그도 굳이 아내 얘길 더 이어가진 않았다. 


호기롭게 그에게 길을 알려주겠다고 한 나는 그만 길을 잃고 골목길을 헤맸다. 두 배쯤 시간이 걸려 길을 돌아간 것 같다. 미안하다고 연거푸 말했고 그는 괜찮다고 거듭 강조했다. 겨우 가게를 찾아왔을 때 그는 근처 빵집에 들러 내게 빵 한 봉지를 손에 쥐어줬다. 공짜빵을 받아 든 나는 이제 미안하다는 말보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거푸 했고 그날은 바간에 있던 날 중 ‘죄송하다’는 말과 ‘감사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 날이었다. 그런 낮이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에야와디 강변에 있는 황금 불탑 사원, 부 파야의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해 질 녘을 기다리면서 책을 읽었다. 여행자들은 보이지 않고 현지인들이 이따금 오가며 불공을 드리고 갔다. 지상으로 가까워지는 해는 마치 사라지기 전 혼신의 힘을 다해 볕을 쏟아내는 듯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책을 읽던 내게 누군가 “한국 사람이세요?”하고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억양에서 그가 한국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웃 도시에서 ‘신혼여행’ 삼아 바간에 왔다는 열리였다. 그 옆에는 어색하게 웃고 있는 그의 신부 뜬뜨가 서 있었다. 열리는 경기도 구리에서 2년간 일을 했고 결혼을 위해 미얀마로 돌아왔다. 뜬뜨와 오붓한 시간을 조금 더 보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일을 좀 더 할 예정이라고도 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편의점도 오픈하고 수박밭도 샀으며 결혼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주로 지하에서 일했는데 일하는 내내 몸에 물이 떨어져서 힘들었다고 했다. 그의 한국어는 훌륭했지만 그렇다고 유창한 편은 아니어서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몸을 쓰는 노동은 그 어떤 것이든 수월하지 않다는 걸 알 뿐이다. 그는 내가 읽는 책에 한글이 쓰여 있음을 보고 반가웠다면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나이를 일러준 적도 없는데 열리는 나를 꼬박꼬박 “누나”라고 불렀다. 나는 정말 ‘누나’가 된 듯 남동생을 타이르듯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뜬뜨랑 좋은 시간 보내야지요.” 그들의 신혼여행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로 뜬뜨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하기야 낯선 외국인 여성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새신랑의 모습을 좋아할 신부가 어디 있을까. 


한국어를 하는 미얀마인과의 대화는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외국인과의 대화 또한 처음이었다. 열리 덕분에 부 파야에서의 시간은 더욱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더불어 그날의 일몰은 기대 이상이었다. 뷰 파야의 황금빛 불탑과 금빛으로 변한 에야와디 강이 어우러진 풍경은 이제껏 일몰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파고다들을 헤매고 다닌 노력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누가 보아도 필시 좋은 일이 생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신나게 페달을 밟는 와중에 누군가 뒤에서 클랙슨을 가볍게 울렸다. 오토바이를 탄 열리였다. 신부를 뒤에 태운 그가 “누나! 차 조심하세요, 자전거는 위험해요.” 하고는 함박 웃으며 내 옆을 지나갔다.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늘 내 거처를 물었다. “아직 홍제동에 사는 거야?”, “아직 봉천동에 사는 거야?” 자주 만나는 지인들은 내게 이사 계획을 물었다. “집 옮길 생각 없어?”, “이사하면 뭔가 리프레시가 되지 않을까.”  

지인들은 나의 거처를 임시적인 공간으로 인식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꽤 자주 집에 대한 불편함을 말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친한 몇몇을 불만으로 도배된 좁은 방으로 기꺼이 초대했다. 최선을 다해 방을 치웠고 나름의 정성을 들인 끼니를 대접했다. 번거로운 일인데 한때 나는 손님 초대를 즐겼다. 내 작고 어수선한 공간에 들어선 이들은 주로 “아늑하네”라고 말하고 등받이도 없는 스툴에 앉아 내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에 무엇인가, 뭉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는 듯했다. 보잘것없는 작은 방이 특별한 게스트하우스로 바뀐 것 같기도 했다. 친한 친구들은 개봉동과 홍제동 그리고 봉천동까지 집을 옮길 적마다 ‘임시 거처’를 찾아주었다. 그들은 작은 화분이나 대용량 베이킹소다, 곽티슈와 같은 전통적인 집들이 선물들을 손에 들고 오기도 했다. 덥고, 춥고, 때론 습한 9평의 방이었지만 소중한 누군가와 하루 정도를 함께 할 때마저 인색하진 않았다. 공간은 충분했고 그 안의 ‘우리’는 따뜻했으니까. 가난을 자랑으로 떠벌려도 아무렇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한참 사춘기였던 중학생 때, 한 번은 담임선생님이 집까지 차로 바래다준 적이 있었다. 나는 축사와 붙어있는 낡은 집이 창피해서 선생님께는 들어오시라는 말도 없이 도망치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먼 걸음 하신 선생님을 그냥 보낸 나를 꾸짖었다. 지금의 나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공황장애로 의심되는 증상을 몇 차례 경험한 이후부터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하는 일은 없었다. 더욱이 동생이 2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서부터는 지인을 부를 여건 또한 되지 않았다. 중학생 때처럼 사는 공간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진 않았지만 기꺼이 누군가를 초대할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다. 결혼과 승진 등으로 거처가 바뀐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아파트 시세나 재테크를 말할 때면 남의 나라 얘기를 듣는 듯 거리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봉천동 집을 처음 보고 “여기선 우리 딸 글이 잘 써질 것 같아”라고 말씀하셨던 엄마는 동생이 돌아온 이후 서울 근교의 임대아파트나 국가에서 지원하는 주택 사업들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인천이나 김포 같은 곳에서 사는 건 어떨까? 서울을 벗어나면 좀 더 넓고 싼 집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동생의 개인방송에선 동생이 요리하면서 접시나 양념통을 떨어뜨려 깨지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동생은 그때마다 머쓱하게 웃으며 “집이 좁아서요”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동생이 특별히 조심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요리를 하기엔 공간이 너무 비좁았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하나 올리기 좁은 공간에서 동생은 컴퓨터와 조명까지 놓고 요리 방송을 했다. 조용히 방송을 챙겨보던 엄마에게 두 딸이 사는 봉천동 집은 더 이상 ‘글이 잘 써질 법한 공간’이 아니라 ‘자꾸만 뭔가가 깨지는 공간’이었다. 


이사를 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동생이 요리 방송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넓은 집에 가야겠지? 소파를 놓을 수 있는 집이라면 예전처럼 누굴 초대해도 불편하진 않겠지? 그러나 어디를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나와 동생의 통장 잔고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조건’의 집을 빌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발 벗고 방을 구하러 나서지 않아도, 부동산 애플리케이션만 봐도 방의 위치와 컨디션에 따른 보증금과 월세의 평균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소파를 놓을 수 있는 여유까진 바라지 않았다. 다만 동생이 더 이상 그릇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의 공간, 동생의 방송 시간에 내가 방해받지 않고 일할 수 있을 만큼의 분리된 공간, 여기에 더해 여름에는 덜 덥고 겨울에는 덜 추운 집이길 바랬다. 우리는 돈이 더 들더라도 따로 사는 편이 나을지, 따로 살 돈을 모아 조금이라도 더 넓은 집을 찾아 그 안에서 각자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할지 갈등했다. 동생은 나보다 더 간절하게 이사를 원했다. 깬 그릇의 숫자만큼, 음식에 꼬인 개미들과 불시에 번개처럼 나타나 섬광처럼 사라지는 바퀴벌레들을 목격한 수만큼. 동생은 따로 사는 편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동생이 그럴 적마다 따로 월세 낼 돈을 합치면 거실이 있는 넓은 집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달랬다. 사실 경제적인 이유보다도 동생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좁은 공간 탓에 각자의 생활에 방해가 된다 해도 동생이 내게 주는 즐거움과 위안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 역시 동생에게 그런 존재였으면 하는 마음에 동생이 각자 살아도 좋겠다는 말을 할 때면 서운함에 선뜻 그러자고 대답하지 못했다.


봉천동을 떠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엄마 말대로 김포, 인천, 부천 등 서울 근교 도시들의 집들을 검색했지만 서울이 아니라고 해서 집값이 마냥 싼 것만은 아니었다. 소위 역세권, 그러니까 지하철이 닿는 곳들은 봉천동과 같은 월세 조건으로 살만한 집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낡고 좁고 벌레가 출몰하며 천장의 물이 새는 방이라 해도, 옥탑과 반지하층이 아니면서 방을 2개나 갖춘 집은 그 가격대에 흔치 않았다. 생활의 질이 높아지길 바라지만 결과적으로는 돈 없이 좋은 집을 얻으려는 허황한 욕심일까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돈이 없을까. 그간 게을렀고 사치스러웠을까. 스스로 성실한 근로자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은 모두 내 착각이고 실은 방만했던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결국 그 끝은 자책이었다. 그러다가 또 문득 자책하는 스스로를 연민했다. 나는 진정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이제까지의 숱한 여행이 실은 베이스캠프가 불안하고 답답해서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 정확히는 베이스캠프가 아닌 내 마음의 문제였지만 집 밖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위안을 얻은 것 또한 사실이다.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영화 <소공녀>에서 주인공 미소의 대사는 ‘하우스 푸어’의 곤궁한 변명처럼 들릴 것이다. 미소는 청소도우미로 근근하게 생계를 이어가는데 그마저도 벌이가 시원치 않아 결국 살던 단칸방에서 쫓기듯 나와 남의 집을 전전하는 캐릭터다. 그래도 주눅 들지 않고 솔직하고 당당한 성격의 그녀지만 그녀를 향한 지인들의 시선은 동정과 멸시를 지우지 못한다. 주인공의 성격상 ‘여행 중’이라는 말은 처지에 대한 변호가 아닌 진심에 가까웠을 테지만 정작 스크린 밖의 나는 그 대사에 잔뜩 서러워졌다. 미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인 나조차도 미소의 여행을 여행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제동을 떠나올 때도 이렇게 막막했나 싶었다. 어쩌면, 아니 아주 높은 확률로 15년간 살아왔던 대도시 서울을 떠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멀리 봐야 좋은 것  

바간에 머문 대부분 아침에 하늘로 두둥실 떠오른 열기구 무리를 보았다. 인터넷에 바간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이미지는 어스름한 평원과 파고다의 지붕, 그 위로 뜬 열기구가 어우러진 풍경이다. 마치 파고다가 지어질 때부터 열기구가 그 위를 떠다녔던 것처럼 바간 상공의 무리 진 열기구는 도시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미얀마로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열기구를 타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근사한 풍경이 프린팅 된 엽서를 볼 때처럼 나는 언제까지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일 뿐 풍경의 일원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치 멀리서 바라보기 위한 산과 직접 오르는 산이 따로 있는 것처럼. 가령 에펠탑에 직접 올랐을 때, 광활한 파리 전경 속에 에펠탑이 없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과거를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열기구 탑승을 처음 고려한 동기는 양곤의 루프탑 바에서 만난 위니와 그의 딸 재키의 강력한 추천 때문이었다. 호주 출신의 두 사람은 이미 미얀마를 한 바퀴 여행한 후였는데 여행 중 최고의 경험으로 바간의 열기구 탑승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격이 비싸 고민 중’이라는 내게 쐐기를 박듯 ‘300달러의 지출로 다음 날 굶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무조건 타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때까지도, 그들이 그토록 열렬한 찬사를 보내는 와중에도 마음은 열기구 탑승을 하지 않는 쪽으로 굳어 있었다. 다음 날 굶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40분의 유희를 위해 한 달 방값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라 여겨졌다. 


바간에 도착한 이후 각기 다른 장소에서 열기구 무리를 보았다. 호텔 객실 창문 밖으로 사탕만 한 크기로 떠오르던 색색의 열기구, 노천에 열린 아침 시장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던 거대한 덩치의 열기구,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호텔의 루프탑 식당 위를 유유히 흐르듯 스치고 간 열기구들…. 그중 제일은 일출을 보기 위해 찾은 둔덕에서 바라본 열기구 무리였다. 해가 뜨고 한참이 지나 하늘을 물들였던 붉은빛은 온 데 없고 오로지 한낮의 청명한 푸름만 있던 아침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피어오른 수십 대의 열기구는 노랑, 초록, 빨강의 풍선 색깔이 고루 섞여 있어 하늘색과의 조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완벽했다. 풍경은 마치 입체 영상으로 구현된 그림책의 한 페이지와도 같았다. 마지막 열기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결국 바간에 머문 지 사흘쯤 지났을 때 무언가에 홀린 듯 열기구 사무소로 갔다. 프로모션 기간이라며 할인을 해준 금액도 우리 돈으로 바꾸면 32만 원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그래, 언제 여길 또 오겠어. 위니 말대로 오늘 예약이 내일의 굶주림으로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다음날 새벽, ‘Balloons Over Bagan’이라는 열기구 업체명이 쓰인 작고 귀여운 버스가 나를 호텔로 데리러 왔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비행장에는 승객들을 위한 새벽 티타임이 열리고 있었다. 커피와 홍차를 손에 든 승객들은 대부분 중장년층의 백인들이었다. 그들 무리 사이에서 나도 어정쩡하게 선 채 차 한 잔을 마셨다. 그런데 뭐랄까, 문득 묘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공들여 세팅한 느낌의 서비스와 분위기 때문일까. 내가 가져본 적 없는 어떤 여유로움의 표정마저 얼굴에 배어 있는 듯했다. 내겐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일행 없이 혼자 온 탑승객이 유독 나밖에 없는 날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에는 여러 개의 열기구 바구니가 보였고 벌룬은 터진 풍선 모양으로 땅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열기구 별로 16명씩 조가 짜여 있었고 조별로 담당 파일럿이 비행 일정과 안전 수칙을 설명했다. 16명은 다시 4명씩 나누어 팀을 이루었다. 바구니 내부가 4개 구획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 없이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었고 마침 3명이 함께 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한 팀이 될 수 있었다.


곧 열기구 업체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벌룬에 열기를 불어넣는 기계를 작동시켰다. 크기가 다를 뿐 풍선에 숨을 불어넣는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러 개의 벌룬이 동시에 덩치를 부풀려 갔다. 소음이 굉장했지만 봉긋하게 형태를 잡아가는 커다란 벌룬들은 그 자체로 이방인들에겐 이색 구경거리였다. 나 역시 수십 개의 대형 열기구들에 둘러싸인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윽고 비행 준비를 마친 벌룬들에 하나, 둘 사람들이 올라탔다. 담당 파일럿은 강경한 목소리로 자신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마음대로 움직여선 안 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열기구 탑승 전까진 극진한 대우를 받는 승객이었다가 탑승 후에는 흡사 전투기에 올라탄 군인이 된 것 같았다. 기구가 떠오를 때까지 잠시 쭈그려 앉아 있어야 했는데 머리 위로는 벌룬 안의 공기를 데우는 불이 활활 타올랐고 16명이 꽉 찬 바구니 안 공간은 넉넉지 않아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지상에서 열기구를 바라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열기구의 현실(?) 속에 내가 있었다. 일어나도 된다는 파일럿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와 사람들은 바구니 밖으로 일제히 고개를 내밀었다. 발아래로 다른 열기구들의 ‘정수리’가 보였다. 나를 싣고 온 버스와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작아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매직’이고 ‘드림’이며 ‘어메이징’하며 ‘뷰티풀’하다는 감탄이 튀어나왔다. 나도 나지막이 감탄했지만 이상할 만큼 큰 감흥이 없었다.  



내가 탄 열기구는 선두였다. 일찌감치 그 점이 아쉬워 조금 김이 샜다. 선두였기 때문에 뒤늦게 출발한 다른 열기구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열기구 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사방이 트였다 해도 내 시야까지 트인 건 아니었다. 내 양쪽, 뒤쪽으로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두 눈의 가장자리를 가린 경주마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시야를 확보했을 뿐이었다. 물론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바간의 풍경은 특별했다. 내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다녔던 흙먼지 이는 낡은 도시는 상공서 보니 정돈이 잘 된 말쑥한 모습이었다. 순하게 흐르는 에야와디 강과 오밀조밀 모여 있는 집들, 직선으로 거리를 구획한 신도심 뉴바간, 드넓은 황무지와 나무들로 둘러싸인 경작지…. 돌이켜보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풍경에 실망한 적은 없었다. 어딘가에 끊임없이 걸려 넘어지고 요리조리 사람과 자동차들을 피해 다니기 바쁜, 그러니까 ‘전방주시’가 제대로 되지 않는 나로선 지극히 제한적인 시야를 의도적으로 넓힐 수 있는 방법은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유일하다. 하물며 움직이기까지 하는 하늘 위 전망대에 올라탔으니 어디 가서 자랑해도 욕먹을 경험은 아니었다.   

  

열기구는 강 유역을 따라 움직이다가 파고다들이 모인 유적지구 쪽으로 향했다. 시엠립에서 경비행기를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인지 유적군의 한 복판 위를 비행하진 않았다. 열기구의 고도는 기류에 따라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했는데 유적군에 가까워졌을 때는 대형 파고다들의 전면부를 볼 수 있을 만큼 내려갔다. 그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다른 열기구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그러나 연무가 짙게 껴서 파고다도 열기구들도 겨우 윤곽만 보였다. 때마침 해가 구름과 연무 사이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지만 뿌연 대기는 당최 나아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맑았더라면 엽서 속에서 봤던 풍경을 비슷하게 볼 수도 있겠다는 아쉬움이 일었다. 그러나 아쉬워할 시간도 잠시, 유적군에 접근했던 열기구는 빠르게 하강했다. 선두에 있던 열기구를 탔으니 착륙도 빨랐다. 아니, 벌써 한 시간이 다 지났다고? 시간을 대략 따져보니 온전히 상공을 날았던 시간은 약 40분 정도였다. 허무가 밀려왔다. 탑승객들은 다시 전원 쭈그려 앉은 자세를 했고 열기구는 별다른 충격 없이 부드럽게 강 유역 백사장에 안착했다. ‘가성비’가 별로라는 생각을 했다. 요즘은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도를 일컫는 말로 ‘가심비’를 말하기도 한다던데 가성비도 가심비도 도통 좋은 줄을 모르겠는 비행이었다. 



머릿속에는 방값에 준하는 40분의 비행값이 자꾸만 떠오르고 나는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걸어 업체 직원들이 인도하는 다과회장으로 향했다. 야외에 조그맣게 마련된 테이블 위에는 방금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온 승객들을 위한 ‘기념 샴페인’과 몇 가지의 빵과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파일럿은 우리에게 ‘안전하게 비행을 마친 것을 축하한다’는 수료증도 나눠줬다. 보람과 희열은 없고 허무만 남았다. 비행 전 새벽 티타임도, 비행 후 수료식(?)도 영 달갑지 않았다.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과장된 연출처럼 느껴져서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파일럿은 열기구에서 벌룬에 매달은 상공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2만 원에 판매한다는 영업 멘트도 덧붙였다. 한번 호구 된 거, 두 번 호구 못돼주랴. 값비싼 비행, 사진으로나마 남기자는 마음으로 호탕하게 사진도 구매했다. 인화해 주는 방식이 아니라 웹하드의 비밀번호를 받고 사진 데이터를 받는 방식이었다. 나중에 숙소에서 확인해보니 사진은 꽤 여러 장 찍혀 있었고 나는 모든 사진에서 함께 탑승한 그 누구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감흥이 없고 허무함만 있었다는 소감이 무색하게 내 얼굴은 놀이공원 대관람차를 탄 아이처럼 천진했다. 사진에서라도 행복해 보이면 됐다, 사진만큼은 잘 샀다며 아쉬움을 떨쳐냈다. 


김영하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에서 작가가 소개한 에피소드 중에는 일본의 한 코미디언이 비싼 포르셰를 사고는 친구에게 운전을 맡긴 채 자신은 택시를 타고 친구가 모는 차를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택시 기사에게 앞서 가는 자동차가 자신의 포르셰라며 자랑을 하자 어이없어하며 왜 택시를 탔냐고 묻는 기사에게 그는 ‘내 차에 타면 내가 안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1인칭의 여행에서 나는 별 수 없이 열기구에 탄 내가 아니라 열기구를 바라보던 내가 더 좋았다. 솔직히 열기구에 탄 내 모습을 보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열기구에서 타서 바라본 풍경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열기구 비행시간이 짧아서 더 그랬다. 거기에 소외감 일지 위화감 일지 시종 떨쳐내지 못했던 어색한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나는 오래전 부모님이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를 타시고 “돈이 아까웠다”라고 했던 불만을 똑같이 반복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위니와 재키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분명 나와 똑같은 비행 루트로 열기구를 탔겠지만 나와는 다른 경험을 했을 것이다. 더 짜릿한 풍경을 봤을 것이고 둘이어서 더욱 흥이 났을 것이다.

다음날 나는 새로 옮긴 뉴바간의 중급 호텔 루프탑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비행하는 열기구들을 바라보았다. 체크인을 할 때, 자신을 뷰마마라고 소개한 직원은 “열기구를 보려면 일찍 아침식사를 해야 할 거야”라고 당부했다. 열기구를 볼 수 있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꺼내는 걸 보면 아침식사보다 열기구 구경이 먼저인 투숙객들이 많구나 싶었다. 뷰마마는 프런트만 보는 게 아니라 아침 식사도 만들어줬다. 그가 내민, ‘한국인’이라서 특별하게 매콤하게 끓인 야채 수프와 볶음밥은 바간에서 먹은 아침 식사 중 가장 맛있었다. 그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전날에는 내가 탔었던 열기구들을 하나, 둘 헤아렸다. 변함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열기구에 탔을 때 내려다보던 광활한 대지의 모습보다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 그 위의 열기구들의 풍경이 어쩐지 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타보고 싶지 않니? 

뷰마마가 물었다. 

아니, 나는 그냥 바라보는 게 좋아. 

내 대답은 진심이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기가 유난히 힘겨울 때 나는 항상 ‘유체이탈’을 시도한다. 내 모습을 3인칭의 시점에서 보면 마음의 고통이 아주 조금이나마 줄어들기 때문이다. 분명 내게 일어난 일이지만 나를 어떤 소설의 캐릭터라고 생각하고 관조적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가 ‘그럴 수도 있지’하고 이해되기도 한다. 심지어 웃기기까지 할 때도 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이때 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말처럼 쉽진 않다. 


나는 다소 고지식하고 지나치게 심각해질 때가 많아서 그것이 일이든 사람 관계든 일단 뛰어들고 그 속에서 한바탕 지지고 볶을 때가 더 많다. 그것도 남들은 모르게 혼자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한참 진을 빼고 나서야 내가 너무 함몰되어 있었나, 객관적이지 못했나 후회한다. 그러면서 친구들이 어떤 고민을 말할 때에는 ‘한 발짝 물러나서 너 자신을 관조적으로 보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는, 정작 스스로는 잘하지 못하는 솔루션을 내민다.    


다시 내 삶을, 그리고 여행을 돌아봤다. 조금만 물러서서, 조금만 멀리서 바라봐도 좋을 것 같다고 바간의 열기구들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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