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방, 치앙마이
첫인상은 동네 뒷산
다시 생애 첫 배낭여행의 기억을 더듬는다. 시엠립과 방콕 그리고 그 끝에 치앙마이가 있었다. 강렬했던 시엠립, 정신없던 방콕을 지나 야간열차를 타고 치앙마이의 아침에 닿았을 때의 첫 느낌은 안도감이었다. 치앙마이로 향하는 기차의 창밖은 내내 푸르렀고 여행은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처음의 긴장감 혹은 달뜬 마음은 가라앉았고 이제는 평정심을 갖고 여행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3년 전, 첫 배낭여행의 마지막 도시 치앙마이.
지금은 산중 숙박을 포함한 트레킹 여행자들이 많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치앙마이 여행자들의 필수코스는 고산지대 트레킹이었다. 보통은 2박 3일 코스로 산길을 걷고 고산족을 만나며 산중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었다. 나와 동생 역시 치앙마이의 대표 산인 도이수텝 부근의 트레일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걷다가 코끼리도 타고 폭포도 구경하고 현지 가이드의 설명도 열심히 들었다. 그는 안내보다 홀로 트레킹에 참여한 다른 한국인 여성에게 더 관심이 많은 듯 했지만. 어쨌든 낮에는 열심히 걸었고 밤에는 거의 스러져가는, 언제 세탁했는지 믿을 수 없이 더러운 침구가 놓인 고산족의 집에서 잠도 잤다. 고산족은 방문객들을 위해 악기도 연주하고 춤도 추었는데 첫 해외여행자들의 눈에도 ‘자본주의의 힘’이 느껴지는 연출이라 우리는 이 공연을 보고 얼마를 내야하나 주머니 사정을 헤아리던 기억도 난다. 늦은 밤에는 마을에 돌아다니던 닭을 잡아달라고 촌부에게 부탁해 숯불에 구운 닭을 먹었다. 육질이 어찌나 질기고 거칠었는지 흡사 타이어를 씹는 느낌이라 거의 다 남겼다. 다른 건 잘 기억이 안 나도 치킨이 맛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런저런 작은 추억들이 없지 않았지만 나와 동생이 남긴 트레킹 총평은 “이런 산길이라면 그냥 우리 동네 뒷산을 걸어도 되겠다”였다. 당시 우리는 뭔가 대단히 이색적인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또 뭐가 있었던가. 도시 외곽에 있는 싼캄팽 온천을 갔었다. 시엠립에서 뚝뚝에 데인 다리의 화상이 아물지 않은 채여서 조심스럽게 온천에 몸을 담갔다.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 않았던 선데이마켓에 갔던 기억도 난다. 이런저런 기념품들을 파는 행상들 사이로 난 길바닥에는 분필로 그린 낙서들이 있었다. 태국어와 영어가 어지럽게 쓰인 바닥에 나는 또박또박 한글로 내 이름 석자를 썼다. 곧 지워질 이름이었지만 뭔가 진정한 배낭 여행자로 인정받은 느낌마저 들었다. 동생과 나는 선데이마켓 부근에서 닭다리 요리인줄 알고 주문한 닭발무침을 저녁으로 먹었고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정의 마지막 도시여서 그렇게 평온했나 싶었다. 그런데 12년만에 찾은 ‘두 번째 치앙마이’에서 치앙마이였으므로 평온했음을 알았다.
호텔왕게임에서 가장 비싼 도시
어린 시절, 나는 세계의 수도와 주요도시 이름들을 ‘호텔왕게임’이라는 보드게임을 통해 익혔다. 미국의 모노폴리라는 보드게임을 국내용으로 카피한 게임이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사각형보드의 둘레에는 세계 주요 도시들의 이름이 칸칸이 적혀 있다. 플레이어는 이를 바탕으로 주사위를 던져 말을 이동하며 말이 멈춘 도시를 사고팔고 또 통행료를 주고받는다. 게임은 누군가 파산할 때까지 이어졌다.
말하자면 나는 부동산 투기로 돈이 오가는 게임을 통해 세계 도시들의 이름을 자연스레 외운 것이다. 나는 게임도 젬병이어서 소위 비싼 도시들은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다가 상대방의 땅을 지날 때마다 통행료를 내기 급급했다. 결국은 파산.
대한민국 서울은 보드판의 시작점에 위치한, 적어도 게임에서는 가장 비싼 도시였다.
그러므로 게임 초반에 서울을 사기란 불가능했다. 돈을 웬만큼 모아도 전재산을 끌어 모아야 살 수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일단 사두면 다른 편 플레이어들이 그 지역에 ‘걸렸을 때’ 많은 돈을 받아낼 수 있었다. 통행료와 호텔 비용이 매우 고액이었기 때문에 운 나쁘게 서울에 걸린 플레이어들은 파산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이용 게임에서 ‘파산’이 웬 말인가. 그런데 그 파산을 나는 참 여러 번 경험했다. 한낱 가짜 종이돈이 오가는 게임에서조차 나는 서울을 갖지 못했다.
서울이란 도시는 내게 너무나 아득한 땅이었고 나를 망하게 하는 근원지였다. 서울을 시작으로 내 말이 보드의 끝을 향할수록 도시들은 점점 저렴해졌다. 도시 정렬 순서의 기준은 따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어렴풋하게 짐작은 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만 하더라도 개발도상국이라는 단어 대신 후진국이라는 단어가 보편적이었다. 게다가 얼굴이 가무잡잡한 친구들에게는 ‘아프리카 깜둥이’라는 별명을 스스럼없이 지어주던, 그것이 인종차별이고 얼마나 무지한 언행인지 대부분이 몰랐던 시대였다. 그러니 호텔왕게임에서 보드 끄트머리에 있던 나라들, 특히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생소한 국가들은(심지어 아프리카를 한 나라의 통칭으로 쓰는 일이 빈번했다) 그저 후진국이라서 저렴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학교 선생님들은 우리나라를 중진국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서울은 보드판의 중간쯤 있어야 하겠지만 어쨌거나 게임의 플레이어는 한국인이니 서울은 소위 선진국의 도시들, 그중에서도 가장 앞자리에 자리한 듯 했다. 내가 성인이 되고 오늘날에 이르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대한민국, 그리고 천만도시 서울은 세계적으로 천정부지의 부동산 매매가를 자랑하는 도시가 되었으니 이제는 서울이 보드판 맨 앞에 있다고 해도 그 순서가 어색할 일은 없겠다.
나는 비싼 도시들 대신 내가 자주 소유했던 보드판 끄트머리 세 도시의 이름을 기억한다. 방콕, 카이로, 트리폴리. 그 도시명들은 머릿속에 각인되다시피 해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따금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떠오르곤 했다. 아프리카 대륙은 아직 밟아본 적이 없어 카이로와 트리폴리는 여전히 우주의 어느 행성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방콕은 내가 처음 발을 디딘 해외 도시로 유의미하다. 물론 호텔왕게임이 나의 방콕행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만 2006년 2월, 돈므항 공항에 내렸을 때, 피부로 느꼈던 후텁지근한 공기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서울은 어쩌면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도시였는지 모른다. 15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도 나는 대도시를 부유하는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혹은 철저하게 이방인이 되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울 뿐 아니라 대부분 도시들이 그렇겠지만 도시는 돈을 버는 노동자보다는 돈을 쓰는 여행자에게 갑절 매력적이고 친절하다. 물론 안타깝게도 나는 돈이 없는 여행자였지만. 호텔왕은커녕 월세노예로 살고 있는 나는 그래서 가끔은 ‘여행작가’라는 직업이 다행으로 여겨지곤 한다. 안착하는 도시 없이 평생을 떠돌아다녀도 주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텔왕게임으로 비유하면 나는 통행료도 숙소비용도 너무 비싼 서울에서 참 오래 머물러 있었다. 마음은 여행자였지만 서울에 있는 호텔에선 단 하룻밤도 자본 적이 없었다.
두 번째 치앙마이
두 번째 역시 방콕 다음 치앙마이였다. 정확히는 방콕에서 파타야, 파타야에서 다시 방콕을 거친 후 태국 최북단의 치앙라이를 들렀다가 마지막으로 치앙마이에 머무는 일정이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태국행이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내 결정이 수반된 여행이었지만 어쨌든 여행 그 자체가 아닌 일로써 방문이었다. 목적은 한 여행사가 펴내는 태국 음식가이드북의 취재와 제작이었다. 20여 일간 태국 내 4개 도시를 돌며 각 지역의 맛집들로 꼽히는 식당들을 돌며 음식 사진을 찍고, 소개 글을 쓰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여행사가 회사의 홍보를 위해 만드는 책이었으므로 내 이름을 걸고 서점에 나가는 책을 만드는 일과는 사뭇 그 과정이 달랐다. 여행사의 협조로 단독 취재 때보다 조금 부담을 덜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부담 없이 허투루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가 염두 해야 할 것은 ‘태국 음식 먹기’가 아니라 ‘남의 돈 먹기’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었다. 태국 음식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똠얌꿍과 팟타이밖에 모르던 내가 온전히 음식을 주제로 한 책을 만들려면 피나는 노력까진 못해도 땀나는 노력은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제한된 시간 동안 여덟, 아홉 끼의 음식을 먹는 강행군을 진행하면서 땀은 물론 눈물도 함께 쏟아냈다. 하필이면 태국의 혹서기인 5월에 방문해 뜨거운 정수리를 식힐 새 없이 이 식당 저 식당을 전전했다.
첫 배낭여행을 할 적, 그러니까 시엠립에서 막 방콕으로 입성했을 당시의 충격은 없었지만 방콕은 여전히 ‘대도시’다운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13년 전 내 모습이 기억난다. 가랑이가 찢어지기 직전인 코끼리 바지에 족히 10년은 더 되었을 허리춤의 전대, 거기에 시엠립의 흙먼지를 뒤집어쓴 운동화까지…. 그때 나는 행색이 부끄러워 당장 새 샌들부터 샀다. 세련된 쇼핑몰들이 모여 있는 시암이나 실롬 지역도 아니고 여행자의 거리 카오산로드에서 그렇게 ‘시골쥐’가 될 줄은 몰랐다. 그때의 위화감을 기억할뿐더러 미식의 도시 방콕에서 내가 방문할 식당 중에는 값비싼 파인다이닝 레스토랑도 여러 곳이어서 나는 일찌감치 가방 안에 높은 굽의 여름 샌들과 적당히 격식 있어 보일 원피스도 한 장 챙겨 넣었다. 이제는 누가 뭐라든 코끼리 바지를 입고 도심을 활보하던 나에겐 복장부터 자유롭지 못한 데가 있었다.
낮에는 현지인들 사이에 끼어 앉아 뜨거운 국수를 땀에 말아 먹었고 밤에는 외국인 손님이 반쯤 채워져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맛을 음미하는 척, 대단한 미식가인 척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속이 더부룩한 채로 호텔 객실에 들어서면, 어째서 도시의 밤은 이리도 울적할까 쉬이 외로워졌다. 더운 날씨에 몸이 고단해서겠지, 에어컨을 켜둔 채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한 겨울의 추위를 느끼며 새벽에 깨기를 여러 번이었다.
한 번은 취재의 일환으로 찾은 한 라이브 바에서, 통기타를 치며 신나게 컨츄리 장르의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내게 조용히 다가와 “돈 비 론리(Don’t be lonely)”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가수의 선량한 마음 덕분에 어쩌면 외로움이 아닐 수도 있던 감정이 정말로 외로움이 되었다. 그날은 방콕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고 다음날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채 찾은 파타야는 피로에 정점을 찍는 데 크게 기여했다. 쇠락한 휴양지의 바닷물은 조금 과장해서 구정물에 가까웠고 일몰 후 ‘워킹 스트리트’라 불리는 거리는 넘쳐나는 ‘스트리트 레이디’들로 정신을 쏙 뺐다. 워킹 스트리트의 호객행위는 그 타깃이 비단 남성만은 아니어서 홀로 걸어가는 내 얼굴 앞으로는 호객꾼들이 들이미는 적나라한 사진들이 수십 번은 더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이 도시에선 어떤 음식을 어떻게 즐겨야 할지 알 수 없는 와중에 내가 먼저 도시에 먹혀버릴 것 같았다. 다행히 어떤 고독과 피로도 전복하지 못한 ‘을’로서의 책임감은 무사히 파타야를 빠져나오도록 했다.
그렇게 일정의 반 이상을 소화하고 마침내 치앙라이에 갔을 때, 그러니까 밤에 도착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도시의 색깔을 좀처럼 짐작할 수 없던 어둠을 거쳐 이른 아침 커튼을 젖혔을 때 주변은 온통 초록이었다.
객실 테라스 바로 앞은 논이었고 그 논을 산이 둘러싸고 있었다. 객실이 1층이었기 때문에 당장 바지를 걷고 논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시골서 자란 나는 ‘라이스필드(논) 뷰’라고 홍보하는 전망이 당최 자랑거리가 될 만한 전망인가 싶을 정도로 익숙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숨통이 트이는 전망임은 분명했다. 13년이 지나도 나는 한결같은 시골쥐였다. 치앙라이는 공항이 있는 도시치고 정말 작은 도시여서 사실 심심한 감이 없지 않았다. 도심 규모만 보면 내가 자란 안성보다도 훨씬 작아서 반나절이면 시내 투어를 마치기에 충분했다. 다만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는 죄다 시내와 떨어진 외곽에 오도카니 자리한 경우가 많아 하루에도 몇 번씩 택시를 불러 타느라 번거로웠다.
이윽고 치앙마이에 도착했을 때, 실은 치앙라이서부터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갈 때에 나는 이미 안도하는 중이었다. 취재에 끝이 그곳에 있었고 오래 전 경험했던 ‘동네 뒷산 같은 익숙함’ 또한 그곳에 있었다. 똑같이 여덟 끼의 식사를 하더라도 그리 거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은 맞아 들었다. 그간의 더부룩함은 위장보다 마음의 체증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북부도시 치앙마이도 5월의 더위는 방콕과 매한가지였으나 그럼에도 좋았던 요인을 꼽자면, 다소 여행안내서 속의 전형적인 표현과 같지만 어쩔 수 없이 자연과 도심의 조화를 말해야 할 것 같다. 13년 만에 다시 찾은 치앙마이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번화했고 과연 태국 제2의 도시라는 수식이 어울렸다. 그럼에도 13년 전 기억 속의 푸릇푸릇한 자연의 기운, 치앙라이에서 마주한 초록의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유서를 남기는 일
한 지인은 해외에 나갈 때마다 유서를 쓴다고 했다. 그리고 집을 나설 때 유서를 방안 잘 보이는 곳에 두고 간다고. 가까운 친구 중에는 객사하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하는 친구도 있다. 나는 생전 유서가 정말 그 기능을 발휘하는, 사후 유서가 될까 봐서 유서의 ‘ㅇ’자도 써본 적이 없다. 같은 이유로 먼 데서 죽어 영구 실종될 것이 두려워 객사란 단어도 입에 올리지 못한다.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있어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실종이 확실한 사망 선고보다 나을까) 못살겠다, 죽겠다 해도 나는 내 생에 갖는 크나큰 애착을 인정한다.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면서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더 행복하고 싶은 욕심.
90년대 후반부터 패키지여행을 즐겨 다니시던 부모님은 이따금 출국 전날, ‘유사시 행동 요령’을 내게 전하시곤 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주변에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은 누구인지, 부모님의 재정 관리와 남겨진 자식으로서의 처신 같은 것들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일러주셨다. 나는 그 말들을 비장한 표정으로 새겨들었다.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한 박준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하물며 작정하고 ‘사후’를 가정한 말이라면…. 나는 그 말들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 도리질했다.
글을 쓰는 내게 있어 유서는 유언보다 더 무겁다. 유서는 보통 그러하듯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과 친구에게 남기는 메시지가 될 확률이 높지만 어떤 단어들을 골라 어떤 문장들을 적어야 할지 실로 막막하다. 멀쩡히 살아서 하는 고민이 죽어서 읽힐 문장들을 염려하는 것이라니 한편으론 헛웃음도 나온다. 하물며 나눠 가지라고 할 재산도 없으니 가난한 글쟁이의 유서는 단지 종이 쪼가리 그 자체로만 유효하다. 그래도 혹여 슬퍼할 사람들에게 정서적 위안을 줄 수 있다면야 쓰임이 아주 없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유서를 쓰지 못한다. 명이 정해져 있대도 우선은 거부. 어쩌다 끼어들 수 있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이 생을 어떻게든 지켜가겠다는 굳건한 의지 표명이라고 해야 할까. 삶에 대한 애착, 미련, 그리고 발악. 그 발악이 발악으로 끝나지 않고 장수하기를. 기왕이면 신체 건강하게 사랑을 주고받으며.
긴 여행을 떠날 때, 동생에게 이따금 장난처럼 말하곤 한다. 혹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통장에 있는 돈은 반은 네가 갖고 남은 반은 부모님 여행 자금으로 쓰라고.
큰돈도 아닌데 그걸 또 반으로 나눠 쓰라고 당부하고 둘이 써서 좁은 집이지 한 사람한텐 딱 알맞는 공간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 딴에는 오래전 부모님이 내게 했듯 동생에게 하는 말인데 동생의 표정은 이내 어그러지며 “그런 말 하지마”한다. 입장 바꿔 동생이 내게 그랬어도 나 역시 비슷한 반응을 했을 것이다. 물론 좁은 집에서 서로의 공간을 분할해 아옹다옹 살아가는 상황에서 룸메이트의 장기 부재는 살짝 반갑기도 하다. 가령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을 때 친구들을 초대하는 마음이랄까.
동생이 유럽에 머물러 혼자 2년을 살 때 나는 긴 여행을 앞둘 때마다 대대적인 방 청소를 했다. 마침 여행안내서 취재 때문에 수시로 캄보디아를 드나들던 시기였다. 청소의 이유는 오랜만에 방에 들어올 내 자신을 위함이라기보다 혹시나, 어쩌면, 아주 낮은 가능성으로 들어올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의식해서였다. 내 여정이 무한정으로 늘어지거나 다신 돌아오지 못한다면 다른 누군가는 내 체취가 남아있는 방에 들어와서 내 손길이 닿았던 수많은 사물들을 마주할 것이다. 주인이 부재한 방에서 그 방의 냄새, 사물들, 청결 상태 같은 것들이 주인을 대신 설명할 것이다. 가뜩이나 내 방은 세간이 많아 어수선한데 너저분하고 더럽기까지 하다면 나라는 사람 또한 ‘어수선하고 너저분하며 더러운’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오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그런 이미지까지 얻는 것을 바라진 않는다. 그래서 출국 전날은 짐을 싸느라 분주하지 않고 방을 청소하느라 바쁘다. 한결 깨끗해진 방을 보면 비로소 내가 여행을 가는구나 실감이 났다.
황정은 작가의 소설 <디디의 우산>에는 등장인물이 하는 말 중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채 수십 년만에 발견된 유럽의 방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전쟁 때문에, 혹은 다른 사연으로 인해 방 주인은 홀연 사라지고 반세기도 더 전에 주인이 썼을 사물들만 남은 방. 차를 마신 흔적이 그대로 남은 탁자나 불 꺼진 난로 앞으로 내던져진 장화 같은 사물이 남겨진 방. 상상하면 신비롭고 처연하다. 비록 방치된 기간은 훨씬 짧을지언정 정글이나 사막에서 우연히 발견된 고대 유적처럼 영영 박제시켜 남겨두어야 할 것만 같은 방이다.
한편 봉천동 다가구주택 201호 세입자의 빈방은 어떨까. 방치되는 기간은 길어야 1~2년, 아니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다. 집주인의 입장에서 어떤 연락도 닿지 않은 채 월세는 밀리고 있다면? 물건들은 전부 수거되고 금세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올 것이다. 짐작하건대 전 세입자와 경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1인 주거자일 것이다. 이전 세입자, 그러니까 내가 남긴 흔적이라면 벽지 위 벌레들을 눌러 죽인 사체 자국 정도가 전부겠지.
그러니 방에 남겨진 유서 한 장의 효력이란 벌레 사체 자국만 못할 수도 있겠다. 그 존재 여부도 알려지지 않은 채, 온갖 잡동사니들에 휩쓸려 일찌감치 소각장 행이 될 터. 에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죽은 다음에야 그게 다 무어라고. 그러므로 나는 다음 여행도 안전에 만전을 기하며 ‘혹시나’와 ‘만에 하나’가 없는 무사 귀가를 꿈꾼다. 궁극적으로는 무병장수 후 ‘자연사’를. (그러나 그것이 ‘고독사’라면 역시 썩 만족스러운 결말은 아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