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방, 치앙마이
우리 동네에는 없는 카페
생애 두 번째 치앙마이에서 머문 기간은 고작 3박 4일이었다. 만들어야 할 책의 주제는 음식이어도 책 중간중간 관광 명소 소개도 겸해야 했기에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그런데 치앙마이는 여유를 필수로 동반해야 하는 도시임을 이틀째 되던 날 깨달았다. 치앙마이에서 가장 세련된 구역으로 일컬어지는 님만해민의 골목들에는 수많은 카페들과 코워킹 플레이스(노트북 작업에 특화된 카페 같은 공간)들이 있었다. 오늘날 세계 어디든 번화한 도심이라면 카페 거리가 존재하고 그 자체로 대수로울 일은 없다. 그럼에도 치앙마이의 카페들은 특별했다. 물론 지난했던 일정들로 인해 충전이 덜 된 심신의 영향도 무시하진 못하겠다. 더부룩한 속과 무더위 안에서 가장 생각나는 건 아무래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니까.
치앙마이의 카페들은 외관을 과장되게 치장하지 않고도 저만의 개성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모나게 튀는 개성이 아니라 주변과 어우러져 잔잔하게 보여주는 매력이다. 또한 근거리에 있는 커피농장에서 공수한 ‘치앙마이산 커피’를 취급하는 카페들이 많아서 과연 요즘 치앙마이는 도이수텝 트레킹이 아니라 카페 호핑을 즐긴다는 여행자들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었다. 치앙마이에서 한 달 이상 장기적으로 머무는 여행자들의 많은 수가 ‘디지털 노마드족’이다. 카페 손님의 다수가 이들이었다.
치앙마이라는 도시 자체가 타 관광도시 대비 물가가 저렴하고 머무르기에 안정적인 환경이라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카페는 그 조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빠른 무선 인터넷 속도와 오래 앉아 작업하기 좋은 환경은 인터넷만 가능하면 일을 할 수 있는 이방인들을 불러 모은다. 그렇다고 해서 카페가 장기 여행자들만 득실거리는 분위기는 아니다. 치앙마이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치앙마이대학교 학생들과 20~30대 현지인들에게도 카페는 일상의 공간이다.
특히 푸르른 나무들과 초록의 덩굴에 둘러싸인 카페가 숱하게 많은 점은 치앙마이여서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했다. 도심이라 해도 방콕처럼 번잡한 대도시가 아니라 우리나라 소도시 번화가 정도의 분위기인 데다 사철 여름(그 나름의 겨울이 존재는 하지만)이니 카페의 ‘자연주의’ 표방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치앙마이 시내에도 스타벅스와 같은 글로벌 체인 카페들이 군데군데 자리하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치앙마이 스타일의 동네 카페를 선호한다. 특히 최근 몇 년, 여행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치앙마이 한달살기’를 실천하는 이들 중에는 마음에 맞는 카페를 하나 정해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이들도 많다.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즐기는 것이다. 3박 4일 일정의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처지였고 하필 머무는 숙소는 치앙마이에서 가장 붐비는 나이트 바자 근처였다. 나이트 바자도 그 나름의 특색이 있으니 ‘하필’이라는 부사를 쓸 필요까진 없어도 어쨌든 예쁜 카페들이 포진한 치앙마이 서쪽 구역(님만해민, 치앙마이대학 주변, 반캉왓)과는 정반대 방향의 지역이다. 결과적으로는 취재를 위해 몇 곳의 대표적인 카페들만 방문했다.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한 카페들이어서 느긋하게 앉아 있기엔 부담스러운 곳들이었다.
아쉬움은 결국 ‘다음’을 낳는다. 이 도시에서 여행자에게 요구하는 단 한 가지 덕목을 깨달은 마당에 세 번째 치앙마이를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사는 동네엔 작업실 삼아 갈 만한 카페가 마땅치 않다는 점도 세 번째 치앙마이행을 부추겼다. 서울에서 갈만한 카페가 없다는 말은 의외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는 그랬다. 가까운 번화가에는 온통 체인 커피숍이었는데 그중 두 곳의 스타벅스는 연중무휴 모든 시간 만석이었다. 게다가 보통 카페의 생활소음이 오히려 집중도를 높인다는 말들을 하지만 그곳의 소음은 시장 한복판과 다름없었다. 사실 그 모든 이유들을 떠나 매일 카페에 가서 최소 4~5천 원씩 쓰기엔 주머니가 풍족하지 않았다.
첫 번째 방문한 치앙마이의 대표 카페는 리스트레토였다. 세계적인 바리스타 대회에서 수상한 바리스타가 사장인 곳으로 독특하고 섬세한 라테 아트를 선보이는 카페로 유명하다. 치앙마이에 오는 여행자들은 다들 한 번씩 들르는 명소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인데 공간이 넓지 않아 늘 손님들로 북적북적하다. 테이블 자리가 없어 여러 명이 공유하는 긴 테이블에 앉은 나는 라테 한 잔과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해 요리조리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다른 종류의 케이크가 놓인 접시가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스윽 들어왔다.
“이 케이크도 찍어요.”
방콕에서 온 태국인 네이와 그의 어머니였다. 우연한 동석을 계기로 우리는 그 카페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자는 나를 배려해 둘이 하는 대화도 영어로 했다. 방콕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네이는 어머니와 함께 자주 치앙마이에 놀러 온다고 했다. 커피의 도시인 치앙마이에 올 때마다 카페 운영에 많은 도움을 얻는다고. 우리의 수다는 길어졌고 결국 저녁 약속까지 잡아버렸다.
파랑새는 없겠지만 아파트는 탐나서
내가 자란 고향 안성은 수도권이라고는 하나 경기 최남단에 위치하고 대부분이 농토라 도시라는 명칭보다는 시골이라 일컫는 게 더 어울린다. 내가 자랐고 현재도 부모님이 사시는 동네만 해도 임꺽정이 넘나들던 산과 고추밭, 논 등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이다. 너무 덥거나 춥지 않은 때엔 집 앞마당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 나와 동생이 오랜만에 방문하면 부모님은 구워 먹을 소고기를 준비하고 번개탄에 불을 붙였다. 부모님이 오시면 앉을자리조차 마땅치 않은 봉천동에선 상상할 수 없는, 외딴 시골집에서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라고 생각한다.
농촌과 도시. 두 공간의 차이는 빌딩과 논밭이 그려진 낱말카드처럼 명확했으며 내겐 격절된 채 따로 존재하는 세계처럼 여겨지곤 했다. 나처럼 ‘동구 밖 과수원길’이 떠오르는 시골에서 자란 이들이라면 한 번쯤 도시의 삶을 동경해봤을 것이다. 지금이야 젊은 사람들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꿈꾸며 자신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찾는 이들도 많지만 나를 포함한 시골 아이들에게 리틀 포레스트란 동네 뒷산이 아니라 땅 밑으로 지하철이 휘젓고 다니는 빌딩 숲이었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무렵에는 소위 ‘인서울’로 일컬어지는 서울 안 대학 입학에 대한 열망이 더욱 들끓는다. 학벌 사회에서 ‘인서울’이 갖는 의미는 대도시나 시골이나 크게 다르지 않겠으나 시골 아이들에겐 그 이상의 의미, 어떤 ‘문명사회’로의 입문처럼 여겨졌던 것도 사실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적어도 태어나 자라난 곳이 내내 목장이었던 나는 그랬다. 빌딩들이 나란한 대로변을 걷고, 지하철을 타고,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대형 서점을 가는 일반적인 도시인의 일상이 어린 내겐 특별한 이상이었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올 것을 예상하더라도 우선은 가져야 하는 것. 그것을 지금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정의하겠지만 열여덟 살의 나는 그것을 도시의 삶이라고 정의했다.
그리하여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았고’, ‘춥고도 험한’ 서울 ‘여기저기를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기를’ 15년. 안성을 떠나온 이후 다시 안성으로 돌아가 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노년기 은퇴 후 낙향이라면 모를까 아직 현역에 있으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고정관념이겠지만 커리어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안성과 서울은 내게 완벽하게 분리된 서로 다른 세상이었다. 그래 봤자 자동차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나는 이제 완전한 서울시민이었고 안성은 다만 나의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안성이 봉천동 다음 거주지의 후보로 점쳐진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안성에서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오랜 지기는 일찌감치 고향에 정착해 일을 해왔다. 같은 안성 출신이어도 그는 도시 중심부의 아파트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논두렁이 아닌 아파트 놀이터가 익숙했던 친구는 나와는 달리 어린 시절에도 도시에 대한 갈망은 특별히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이 자라온 동네에 애정을 갖고 소소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친구다. 친구의 애향심은 실로 지극해서 내가 간혹 친구를 만나러 안성에 가면 걷기 좋은 길, 예쁜 카페들을 안내해주며 안성이 꽤 살기 좋은 동네임을 설파하곤 했다.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도 내 자신이 안성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는 독립된 주거를 계획하고 안성 시내에 혼자 살만한 집을 물색했는데 정작 친구가 집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바로 나였다. 내 귀에 꽂히듯 날아든 안성의 아파트 월세와 보증금은 놀랍게도 내가 사는 다가구주택의 그것과 동일했다. 서울과 서울이 아닌 지역의 집세는 거의 다른 나라 수준임을 모두가 다 인정하지만 막상 딱 떨어지는 숫자로 접하니 ‘서울은 미쳤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안성이 미치게 저렴하다는 말이 아니라 서울이 미치게 비싸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음은 ‘서울살이의 종지부를 찍는다’는 선전포고 같았다.
아파트라니. 어쩌면 서울에 사는 평생, 내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주거 형태다. 아파트도 그 나름이겠지만 내가 살면서 구경해온 아파트들은 죄다 지금의 봉천동 201호보다 넓고 쾌적했다. 적어도 쭈그려 앉은 채 세수를 해야 하는 아파트는 없었다. 헛간에 살다 다가구 주택을 보면 이보다 윤택한 집이 또 없겠지만 봉천동 201호에 살다 접하는 아파트는 황홀하기까지 했다. 아파트에 살다가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을 보면 또다시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시골뜨기였던 내가 도시를 열망했던 것처럼, 고시원 원룸에 살면서 주택 투룸을 원했던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나는 생이 다 할 때까지 거듭되는 욕망의 확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안다.
나는 안성으로의 이주를 본격적으로 타진했다. 도시 생활이 팍팍해서, 자연을 벗하기 위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으러 내려오는 귀농인들과는 다른 이유였다. 도시는 충분히 내게 친절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 친절의 대가를 지불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과 공원이 있는 동네였으면, 서서 세수를 할 수 있는 세면대가 있는 집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응당 내 노동에 견주어 너무 큰 욕심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예술가일까?
네이는 나와 동갑내기로 치앙마이는 여행과 출장으로 자주 오는 편이라고 했다. 제아무리 북쪽에 있는 치앙마이도 5월은 너무 덥다고 하니 네이 왈 태국은 덥고(Hot), 좀 더 더우며(Hotter), 가장 더운(Hottest) 세 개의 계절이 존재한다면서 웃었다. 우리는 가장 더운 시즌의 치앙마이에서 함께 맥주잔을 부딪쳤다. 네이는 이제껏 태국 일정 중에, 그리고 두 번째 치앙마이에서 처음 만난 태국인 친구였다.
돌이켜보면 굉장히 담백하고 편안하며 ‘치앙마이스러운’ 만남이었다. 나는 해외여행 중 게스트하우스나 트레킹 코스가 아닌 도심에서 말을 거는 이들을 유난히 경계해왔다. 초행자를 그럴듯한 말로 유혹해 바가지를 씌우려는 장사치이거나 불쑥 다가와 ‘하룻밤’을 즐겨보자고 꼬드기는 호색한이 많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여행자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대부분의 낯선 사람들은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네이는 그런 류와는 거리가 먼 친구였다. 만난 장소도 그의 인자한 어머니가 동석한 카페였고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모델이라 해도 믿을 법한 아름다운 여자 친구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정도의 상황과 얄팍한 정보로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위험하고 한편 서글픈 일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스스럼없이 새 친구를 사귈 만큼 호탕하지 않다. 많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다고 할 수 없는 해외여행 경험을 통해 열린 마음 이전에 일단 경계가 먼저라는 교훈을 얻었으니까.
네이와 맥주잔을 기울인 곳은 치앙마이 구도심에 있는 수제 맥주 펍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어느 순간 수제 맥주 펍이 유행처럼 생겨났는데 태국은 여전히 라거 천국이다. 더운 나라다 보니 맑고 청량감 있는 라거가 일찌감치 발달하고 또 인기를 얻어온 터라 에일은 크게 대중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치앙마이에는 치앙마이 라벨을 붙인 향긋한 에일을 주조해 판매하는 펍이 몇 군데 있고 네이와도 그곳에서 만났다. 네이에겐 미안하지만 실은 취재를 동반한 방문이었고 그 집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것도 나였다.
치앙마이의 가볼만한 카페들을 소개해준 네이 역시 치앙마이에서 수제 맥주 펍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치앙마이가 수도 방콕보다 더 트렌디하고 개성 있는 도시로 느껴진다고 했다. 역시 여행자들과 예술가들이 많이 몰리는 도시답다고. 내가 예술가와 여행자 부류야 방콕에도 넘치지 않냐고 했을 때 그는 치앙마이 예술가들을 ‘진정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왜냐고 물었을 때 네이는 아주 심플하게 말했다.
“여긴 추우니까”
태국의 ‘삼계절’을 알려준 로컬의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에 내 얼굴에 물음표가 새겨졌었나 보다. 네이가 머쓱하게 웃으며 방콕보다는 치앙마이가 시원해서 예술 작업하기는 더 좋을 거라고 했다. 또한 방콕의 비싼 임대료 때문에 작업실을 구하는 데 애를 먹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연대를 맺기 위해 치앙마이로 온다고 했다. 이는 자신과 같이 커피를 좋아하는 카페 운영자나 바리스타에게도 해당된다고. 그러고 보니 치앙마이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치앙마이대학교가 예술학부로 유명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한국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묘사하면서 그 추위가 싫어 겨울만 오면 동남아시아 국가들로의 탈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고 했다. 네이는 이미 겨울의 나라들을 많이 여행했던 터라 추위나 눈에 대한 호기심은 없었다. 다만 더위와 추위가 순환하는 우리나라의 날씨가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노는 국민성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내 추측에는 맞는 말 같다며 굉장히 호응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내내 치앙마이를 주어로 하다가 어느 순간 태국에서의 한류와 일본문화 같은 주제로 넘어가기도 하고 커리어나 결혼에 대한 생각과 같은 무던히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오갔다. 치앙마이가 이번 일정의 마지막 도시고 이틀 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 네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겨울에 치앙마이에 다시 와. 그땐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마치 “밥 한번 먹자”하고 가볍게 던지는 투였다. 도시를 주어로 삼는 가이드북의 글보다는 나를 주어로 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말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자리를 옮겨 시끌시끌한 루프탑 바에 갔다가 같은 말을 두서너 번씩 외치는 상황이 답답해 결국 바를 나왔다.
“이건 치앙마이스럽지 않잖아?”
내가 동의를 구하듯 묻자 네이가 물었다.
“치앙마이스러운 게 뭔데?”
“균형. 도시와 자연의 밸런스.”
우리는 조용하고 후텁지근한 골목을 조금 걷다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네이와 헤어지고 나는 진지하게 ‘세 번째 치앙마이’에 대해 생각했다. 태국에선 가장 추운 지역에 예술가들이 몰린다는 사실에 추위는 상대적이구나 생각하면서 창의성이 뛰어난 북유럽 국가 사람들과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의 대문호들을 떠올렸다.
한편 한국의 추위를 피해 태국에서 가장 추운 도시로 가서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생각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원하는 글을 쓰는 나는 ‘치앙마이의 아티스트’일까, 아니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몇 번의 신춘문예에서 고배를 마시고 함께 습작하던 문우들이 등단을 해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얻을 때 나는 아무래도 예술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단 한 줄의 문장이 내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전율을 느낄 때 과연 예술가란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래야만 나의 숱한 실패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 내게 ‘작가님’이라고 부를 때 ‘그렇게 불려도 될까’, 종종 그 호칭이 어색하다. 작가니까 작가라고 부르는 건데 호칭이 뭐 별거냐 싶지만 내게 작가란 나로선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성역처럼 여긴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적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세 번째 치앙마이’는 예술가가 되어서 갔다. 사실 자금난으로 치앙마이는커녕 서울에서도 머물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예술가들을 위해 매년 창작준비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혹시나 하고 지원했는데 내 이름으로 출간한 여행 서적이 예술 활동으로 인정받아 ‘예술가’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떤 예술 활동을 할 것인지 소상히 적은 계획서가 운 좋게도 심사를 통과해 창작준비지원금을 수혜받기에 이르렀다. 감사했다. 물론 나 자신은 여전히, ‘예술가’로 불리기에 먼 지점에 서 있다고 느끼지만 말이다.
3개월의 시한부 도시 살이
“기가 막힌다!”
우리는 아파트 최고층 거실 베란다에 서서 한동안 전망을 바라봤다. 동생과 내가 부동산 중개인을 따라 가장 먼저 본 아파트는 안성 시내 변두리에 있는 33층, 34평 아파트였다. 보증금은 봉천동 집보다 조금 높았지만 월세는 비슷했다. 집세며 전망, 아파트 구조까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봉천동 집과 비슷한 가격에 머물 수 있는 집의 규모와 질은 우리 자매에게 궁전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환호하자 집이 금방 나갈 거라는 중개인의 레퍼토리가 이어졌지만 그래도 처음 본 집을 바로 계약할 수 있겠냐며 동생과 나는 일대 아파트들을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근데 우리가 살기엔 너무 넓지 않아? 넓은 만큼 관리비도 많이 나올 텐데.”
“그러게. 너무 커서 채울 가구도 없겠어. 보증금도 살짝 부담이고….”
그렇게 넓은 집을 외치던 우리 자매는 34평 앞에 위축되고 말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더니 ‘적응의 동물’로써 좁은 집에 오래 산 우리는 넓은 집이 어색했다.
예상했지만 ‘안성으로의 이사’를 제안했을 때 동생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웬 시골, 그것도 고향행이냐며 어리둥절했고 광역권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다.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도시에서 유학생활을 한 동생에겐 더욱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동생을 설득했다. 어차피 우리 둘 다 회사에 묶인 몸이 아니며 서울에서의 볼 일이 잦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현재의 지출을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동생은 공감하면서도 조금은 망설이는 눈치였지만 일단 집을 보러 가자는 제안은 수락했다. 그리하여 실제로 발을 들인 안성 변두리의 아파트들은…. 과연 견물생심이었다. 우리는 예닐곱 곳의 아파트를 돌았고 그중 마음에 드는 한 곳을 정했다. 방 3개의 24평형 아파트로 모든 방에 베란다로 이어지는 커다란 창문이 있어 통풍과 채광이 좋은 집이었다. 거실 쪽 전망은 다른 동의 아파트로 다소 갑갑했지만 주방 쪽 전망은 주변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산과 들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후 이사까지는 3개월이 걸렸다.
결과적으로는 처음 우리가 보고 점찍었던 집과는 다른 집으로 갔다. 그래도 같은 아파트 다른 층이었다. 융자 없는 집을 찾느라 그리 됐지만 처음 본 집보다 내부가 훨씬 더 깔끔해서 만족했다. 다른 아파트에 비해 비싼 보증금도 아니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 법의 보호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혹시나 시끄러울 일이 생길까 봐서였다. 또 살고 있던 세입자가 이사를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 봉천동 201호 주인이 요구한 계약상 3개월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하루빨리 방을 빼고 싶었지만 우리를 이을 새로운 세입자가 언제 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급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세입자를 구해 집주인과 계약을 성사시키고 나가거나 더러는 3개월 치의 월세를 미리 내고 나간다고도 했다. 그럴 요량이 되지 않는 나는 동생과 서울 생활을 정리하는 석 달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동생은 일찌감치 새 집에 들일 방송용 테이블과 그릇을 놓을 선반, 저 방에 놓을 1인용 침대 등을 알아봤다. 조립식 가구들의 룩북을 펼쳐보는 동생의 표정은 들떠 있었다. 그릇을 하나 깰 때마다, 잠을 설칠 때마다 머릿속으로 소망하던 그림이었을 것이다. 양 옆으로 그릇을 쌓아놔도 공간이 남는 널찍한 테이블과 마음껏 몸을 뒤척이며 잘 수 있는 침대….
나는 화장실, 아니 욕실을 생각하면 마냥 행복했다. 3개월 후면 나는 서서 세수를 할 수 있다. 샤워부스 안에서 샤워를 할 수 있다. 욕실 배수구로 주방 싱크대에서 배출된 음식물 섞인 하수가 역류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수압이 약해서, 뜨거운 물이 안 나와서 샤워하는 일이 꺼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욕실 안에 코끼리만 한 세탁기를 넣어둘 일도. 욕실을 생각하면 서울 생활의 미련 같은 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들만이 나의 낙향에 놀라고 또 아쉬워했다.
3개월간 봉천동 201호에 방을 보러 온 손님들이 꽤 있었다.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불시에 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집주인 아주머니가 한두 시간 전에 방문 예고를 하기도 했다. 워낙 세간이 많은 집이 되어선 치운다고 치워도 좁고 어수선하긴 매한가지였다. 또 일을 끝내고 저녁에 방문하는 사람도 많아서 동생의 방송 시간과 겹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나 방문자나 난감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방송용 의상인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동생은 황급히 방송을 중단하고 작은 방과 주방 사이, 그 어중간한 공간에 서서 어정쩡한 자세로 이방인들을 맞이했다. 동생은 각종 조리기구와 식재료가 어질러진 작은 방에 이방인들의 시선이 가닿을 때마다 “아, 여기가 좀 복잡해서…. 죄송합니다”라고 구태여 사과를 하곤 했다. 한 번은 내가 그게 죄송할 일이냐고 핀잔을 주자 동생은 자기도 모르게 사과가 나오더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와중에 동생의 ‘스튜디오’가 된 작은 방은 비단 토막 난 생닭뿐만 아니라 한쪽 벽면이 옷으로 가득 차 있고 맞은편에는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냉장고가 있으며 그 나머지 공간을 조명과 컴퓨터, 테이블이 채우고 있었으니 사람 한 명 들어갈 공간은 고사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대혼란을 유발했다. 하필 그 방은 보일러실이자 베란다라 할 수 있는 자투리 공간과 연결되어 있어 방을 보러 온 이들 중 몇몇은 베란다를 확인하기 위해 까치발 자세로 ‘정체불명의 방’을 오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안방 격인 큰 방의 사정이 더 나은 것도 아니었다. 한쪽 벽면은 책으로 빽빽하고 침대, 책상, 화장대까지 덩치 큰 가구 셋이 들어차서 역시 한 두 사람이 서면 더 이상의 여유가 없었다. 방을 보러 온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지못해 들어온 듯 방을 휘 둘러보고 금방 나갔다. 물을 틀어 수압을 확인한다거나 단열 여부 같은 건 묻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들의 관심 밖 집이었다. 산만함이 가장 큰 원인 같았다.
어차피 3개월 후면 봉천동 집의 계약 여부와는 상관없이 짐을 싸겠지만 그래도 집주인 아주머니를 마주칠 때면 공연히 “어서 집이 나가야 할 텐데요”하고 말을 건넸다. 아주머니는 아마도 공실이 되어야 사람이 들 것이라고 대답했다. 처음 내가 봉천동에 왔을 때도 집은 공실이었다. 그랬으므로 퍽 넓어 보였고 한겨울임에도 텅 빈 집에서 감도는 훈훈한 기운은 계약의 큰 동기가 됐다. 이후 약 4년 동안, 집은 나와 동생의 성격, 습관, 취향, 직업, 체취 등이 묻은 사물들을 착실하게 수집해갔다. 그러니 거주를 고려하고 찾아든 이들에게는 산만함도 산만함이지만 오감으로 느껴지는 ‘타인의 아우라’ 없이 집을 보기는 쉽진 않을 것이다. 빈 캔버스에 그려 넣을 나의 사물을 상상하기는 쉬워도 이미 채색이 끝난 캔버스에 내 사물을 덧칠하긴 아무래도 어려울 테니까.
방을 보러 온 사람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얼마 전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을 것 같은 앳된 아가씨, 이제 막 복학을 앞둔 듯한 짧은 머리의 청년, 연변 억양이 강한 아주머니, 주름진 얼굴의 남성과 함께 온, 많아 봐야 20대 후반일 이주 여성도 있었다. 나도 그들도 그간 누웠던 자리를 떠날 준비 중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하거나 표류하느라 지친 심신을 장기간 쉬어갈 수 있는 베이스캠프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가 떠나간 자리에 내가, 내가 떠나온 자리에 누군가가. 그렇게 끊임없이 순환한다. 다시금, 집을 소유한다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고 아마도 나는 머지않은 시기에 짐을 또 꾸릴 것임을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