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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Nov 17. 2019

그 모든 것의 균형 (3)

다섯 번째 방, 치앙마이 

세 번째 치앙마이

안성으로 이사를 하고 한 달 만에 치앙마이로 향했다. 이사를 하자마자, 한 달간 머물 숙소를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가장 저렴한 치앙마이행 비행기 티켓을 편도로 샀다. 스스로를 밀어붙이지 않으면 새로운 동네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겨울 한 철을 어영부영 보낼 것 같았다. 두 번째 치앙마이를 떠나며 했던 다짐을 실천하고 싶었다. 돌아오는 겨울에는 치앙마이를 다시 찾겠다고. 가서 어디 한번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을 써보자고. 아예 한 도시에 자리를 잡고 한 달간 머무는 여행은 취재로 있었던 시엠립을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일이 아닌, 여행다운 여행을 하겠다는 포부로 미얀마를 이미 다녀온 바 있지만 미얀마 여행은 도시 간 이동이 잦았고 그 자체를 즐겼기에 짧은 메모 외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일이 아니더라도 뭔가 쓴다는 일 자체가 과업처럼 느껴진 때이기도 했다. 


노트북과 책 두 권, 옷 몇 가지를 챙겨 넣으니 가방 무게는 8kg이었다. 한달살기를 계획하고 꾸린 짐이라기엔 단출했다. 필요한 것들은 현지에서 사기로 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준비 없는 여행이었다. 세 번째 방문이라는 데 의미를 부여하면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이전의 짧은 여행에서 도시가 내게 주었던 편안함을 떠올리면 이번 여행 또한 도시에 어느 정도 의지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비행기 삯을 아끼느라 방콕을 경유하는 비행편을 이용하긴 했어도 처음부터 치앙마이를 목적지로 한, 오롯하게 치앙마이만 여행하는 일정 역시 처음이었다. 도시에게 ‘이번에는 너만 바라볼게’하고 충성을 다짐하듯 주변 도시 여행조차 계획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경험에서 비롯한 도시에 대한 신뢰는 강력했다. 


치앙마이 역시 경주나 시엠립처럼 한 때는 한 나라의 도읍이었다. 13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472년간 란나 왕국의 수도였으니 방콕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더 오랜 세월 왕도로 번영했다. 옛 수도의 흔적은 해자가 둘러싼 정사각의 성곽과 곳곳의 오래된 사원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경주나 시엠립이 풍기는 고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마천루는 아니더라도 태국 제2의 도시답게 번화한 도심과 낮이고 밤이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크고 작은 시장들,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 수많은 호텔들과 레스토랑들은 고도라는 단어와 거리가 있다. 도심 규모는 밤의 도이수텝에 올랐을 때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도시를 밝힌 불빛이 은하수처럼 방대해서 과연 대도시구나 싶어진다. 당연히 차량과 오토바이도 많은데 잘 구축된 도로 사정에 반해 보행자에게는 한없이 불친절한 교통 시스템은 치앙마이의 큰 단점이다. 보행자 신호등은 물론 횡단보도, 도로변 인도 등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골목이 아닌 도로변을 걷는 일은 많이 불편하다. 자전거 타기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당시에 도시 곳곳에 공공자전거가 설치되어 있어 일단 타보기는 했는데 인도가 없는 도로변에 자전거도로가 있을 리 만무하고 자동차와 함께 달리는 일은 너무 위험했다. 허허벌판을 자전거로 달리고 폐허에 앉아 하늘과 대지를 내 것처럼 여기던 시간들의 경주, 시엠립, 바간과는 분명 다른 도시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치앙마이를 간 이유는 분명했다. 균형이었다. 여행과 일상의 그 중간쯤 되는 시간들이 가능한 곳, 자연과 도시의 장점을 고루 갖춘 곳. 물론 경주나 시엠립에 예쁜 카페가 없다고, 시원한 쇼핑몰이 없다고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도시들에서의 시간을 ‘일상’ 같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일부러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간 곳들이었다. 그에 반해 치앙마이는 적어도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일상과 여행을 적절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누군가는 치앙마이를 모호하다고 한다. 왜 관광도시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딱히 랜드마크라 불릴 만한 명소가 없고 도시 자체에서도 대단히 특색을 느낄 수 없다. 나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그 말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치앙마이는 짧게 머물기에 적절한 도시가 아니다. 마치 이곳에 사는 사람인양 오래 머물러야, 이왕이면 아주 게으르게 있어야만 비로소 매력이 느껴지는 도시, 정확하게는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그런 도시다. 


그리하여 나는 치앙마이에서, 일상과 여행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어쩌면 애매하고도 모호한 시간들을 보냈다. 골목을 걷다 그날의 작업실, 그러니까 원고를 쓸 만한 카페를 골라 들어갔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도심을 벗어나 마음껏 걷고 자전거를 탈만한 장소를 찾았다. 치앙마이는 그 균형을 맞추기에 훌륭한 조건의 도시였으므로 다만 나 스스로의 균형만 찾으면 됐다.     


꿈 그리고 낙향 

12월 12일. 한겨울이었지만 한파는 없었고 날씨도 맑았다. 며칠간 미세먼지로 뿌옇던 하늘은 가을처럼 푸르고 청명했다. 동생은 한숨도 자지 못했고 나는 딱 한 시간, 곧 폐기할 침대 위에서 눈을 붙였다. 3개월의 시간 동안 우린 도대체 무엇을 한 걸까, 이사 가기 겨우 나흘 전에 박스 몇 개를 싸 둔 게 전부였다. 무엇을 버리고 가져가야 할지, 싸 둔 짐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도 공간도 없었다. 결국 하루 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짐 싸기는 버리고 묶고 담고를 무한정으로 해도 끝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이사를 못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와 동생은 서로의 짐을 나누어 쌌는데 나에겐 책이, 동생에겐 그릇과 주방기구들이 넘쳐 났다. 9평짜리 집에 그 많은 세간들이 자리 잡고 있었음이 믿기지 않았다. 정리의 기본은 버리는 것이라는데 우리 자매는 안 읽는 책, 안 쓰는 그릇을 차마 버리지 못했다. 거의 3배가 넓어진 집으로 이사를 가니 이제 수납공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합당한 이유도 더해졌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은 뭔가 감회가 남다를 줄 알았지만 이삿짐을 싸느라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른 아침, 연락해둔 이삿짐센터의 1톤 트럭이 도착했다. 기사님은 혀를 찼다. 어떻게 이 작은 집에 이렇게 많은 짐이 있냐며 트럭에 다 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다행히 동생의 친구들이 와서 손을 보탰다. 보탠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 들고 날라줬다. 도움을 청할 이성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는 나였으므로 어찌나 다행이고 고맙고 또 미안했는지 모른다. 기사님도 가담해 차마 다 싸지 못한 짐들을 상자에 쓸어 담았다. 놀랍게도 두어 시간쯤 지났을 때 모든 짐 정리가 끝났다. 과연 트럭에 실릴까 싶었던 그 많은 짐들이 전문가의 손길로 ‘착착착’, 블록으로 쌓여 이동을 기다렸다. 일사천리였다. 


방은 처음 내가 왔을 때처럼 말끔하게 비워졌다. 주인아주머니가 천장의 물 자국을 보고 혀를 찼다. 보기가 흉한데 왜 말을 안했냐고 했다. 나는 뭐라 대답을 하기 망설여져 그냥 웃고 말았다. 몇 시간 후면 다시 사라질 보증금을 건네받았고 수도세, 전기세와 같은 관리비를 정산했다. 아주머니는 이사하는데 보태라며 10만 원을 빼줬다. 

“이사 가서 잘 되길 바래요.”

“고맙습니다.”

나는 꾸벅,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오지 않을 201호를 바라봤다. 동생은 친구들의 차에 타고 나는 트럭 보조석에 앉았다. 아버지뻘 되는 기사님은 서울에 살다가 안성까지 가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라기보다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던진 질문 같았다. 

“방 값이 싸서요.”

“그럼 일은요?”

“저도 제 동생도 프리랜서거든요.” 

이렇게 간단한 대답이라니. 더도 덜도 않은 딱 떨어지는 대답. 기분이 이상했다. 서울에서 살았던 15년의 시간이 군더더기 없이 두 줄로 요약된 느낌이었다. 살을 붙여봤자 말 그대로 군더더기가 되어버리는 그런 서사…. 내가 거쳐 온 작고 허름한 방들, 그 방들을 오가며 근근이 돈을 벌고 그렇고 그런 만남과 갈등을 지나 가끔씩 울고 때때로 웃었던,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시간들…. 서울을 벗어나는 일이 뭐 대수로운 일인가 하면 정말 사사로운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더 넓은 집, 더 저렴한 집을 찾아 서울의 경계를 넘어가는 그 마음이 마냥 시원하진 않았다. 그래, ‘시원 섭섭’이라는 표현은 이때 어울리겠다. 트럭은 어느덧 안성 톨게이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늘은 가을처럼 파랬고 내 머릿속에는 자꾸 조용필의 노래 <꿈>이 맴돌았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치앙마이의 10층 달방 

이사로 정신을 쏙 뺀 나는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 집을 구하는데 더 쏟을 에너지가 없었다. 그 핑계로 에어비앤비를 통해 한국에서 예약을 마치고 들어선 치앙마이의 원룸형 아파트는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10층 전망은 시원하게 탁 트여서 공원이 아닌데도 나무가 우거진 주변 동네와 멀리 대형 쇼핑몰이 있는 번화가 일대가 발아래 있었다. 내가 정의하는 치앙마이의 풍경, 그러니까 ‘자연 반, 도시 반’의 모습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풍경이라 처음 그 모습을 마주하고 웃음까지 나왔다. 인터넷으로 방을 예약할 때만 해도 전망이 이렇게까지 훌륭한 줄은 몰랐다. 아침이면 해가 솟고 밤이면 달이 뜨는 하늘의 일과를 내 키보다 크고 내 두 팔보다 넓은 창밖으로 온전하게 볼 수 있었다. 딱 창문 크기만큼의 하늘이 내 것이었다. 딱 한 달간 내가 가질 수 있는 그 하늘에 해달별이 몽땅 다 들어있었다. 중의적인 의미의 ‘달방’은 현지 물가에 비하면 비싼 축에 속했지만 그래도 서울의 웬만한 월세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여행자로선 꽤 잘 얻은 방이었다. 그 정도 전망에 컨디션을 가진 호텔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월세가 청구될 테니까.    


베란다에는 이틀에 한 번씩 빨래를 널었다. 동향이라 볕이 잘 드는 덕에 한두 시간 만에 바싹 말랐다. 주방이라고 하기엔 싱크대만 하나 달랑 있었지만 1인분의 음식을 해 먹기에는 구색이 갖춰져 있었다. 전기냄비와 전자레인지가 있던 덕에 간단한 음식을 해먹기도 하고 식당서 음식을 포장해와 데워먹기도 자주 했다. 침대는 퀸 사이즈여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해도 공간이 넉넉하게 남았다. 식탁은 내 작업용 테이블이 되었고 납작한 거실용 테이블에는 매일 생화를 사다 유리병에 꽂아두었다. 거실용 테이블 옆에 요가 매트를 깔아 두고 매일 아침 하나의 의식처럼 명상을 하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매트에 누워 아침볕을 온몸으로 쬐다가 그대로 잠드는 날도 있었다. 


화장실은 세면대와 샤워기 모두 잘 갖춰져 있었지만 아파트 복도 쪽이라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샤워를 할 때면 그 소리가 조금 신경 쓰였고 조명이 어두운 점도 아쉬웠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결정적인 단점은 비행기 이륙 소음이었다. 치앙마이 국제공항은 시내와 무척 가까워서 시내(님만해민) 쪽 거주자라면 비행기 소음을 거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아침 6시쯤이면 어김없이 첫 비행기가 거대한 엔진 소음과 함께 떠올랐는데 그 때문에 일찍 잠에서 깬 날이면 아예 베란다로 나가 붉은 여명의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비행기는 10~20분 간격으로 이륙했고 자정쯤 되어서 그날의 이륙도 끝났다. 


모든 날이 건조했다.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건기였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널브러져 있다가 해가 다 져서야 정처 없이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어떤 날은 동도 트기 전에 나가서 산이며 절이며 소풍을 갔다. 그리고 대부분의 날을 카페에서 보냈다. 치앙마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카페들이 있고 정확하진 않겠지만 그중 3분의 1 정도는 카페 안팎으로 아주 진한 초록색의 식물들이 살고 있다. 나는 초록색이 많은 카페에 갔다. 더 많은 초록을 보려고 주로 창가에 앉았다. 그리곤 키보드를 두드리든 아니든 일단 노트북을 켰다. 

‘예술가’로 지원을 받고 왔으니 처음 다짐한 바와 같이 하루에 단 한 줄이라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내가 오고 싶어서, 내가 쓰고 싶어서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 그조차 방만해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삶 전부를 부정하고 싶을 만큼 극으로 치달았던 불만들, 텅 빈 마음으로 꾸역꾸역 시간을 견디던 무기력함, 그리고 추위. 그것들로부터 도망쳤다면 이제는 내가 줄곧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 그것들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내 한쪽으로 치우쳐 왔었다. 덩치에 맞지 않는 짐을 지고도, 어디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와도 무거운 줄도 아픈 줄도 모르고 지냈던 시간들이 이어지는가 하면 마땅히 지어야 할 짐도 벗어두고 어쩌면 누군가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줄도 모르는 채 지냈던 시간들이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바로 그것,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도 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 가지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방치해 버린 시간들. 그 시간들을 이제 더 이상 ‘방’의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하물며 비행기 소음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방은 완벽할 수 없으며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방이 분명했다. 여차하면 나가서 자리 잡을 수 있는 카페는 또 얼마나 많은가. 나는 치앙마이에 ‘균형’을 찾으러 왔다. 


그렇다고 아주 부지런하진 않았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진 않으니까. 다만 부지런하진 못해도 규칙적으로 생활하려 했고 이왕 왔으니 그게 무엇이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내가 정한 나름의 룰은 1. 자전거를 탄다 혹은 걷는다  2. 글을 쓴다 3.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4. 가끔씩 사람들과 만난다. 여기에 나중에 추가된 한 가지가 ‘5. 일주일에 두 번, 유튜브에 영상을 만들어 올린다’였다. 

유튜브 영상이라니. ‘어쩌다가’라고 말하기는 민망하다. 나는 이미 치앙마이로 향하는 공항에서부터 핸드폰 카메라로 영상을 찍고 있었으니까. 동생이 넌지시 “언니도 방송해”라고 했던 말들을 한 귀로 흘렸던 시간이 무색하게, 방구석 여행자였던 무기력한 과거가 무안하게, 나는 누구나 인정하는 ‘관종(관심종자의 줄임말로 남에게 관심받길 원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신조어)’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못지않게 어디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어디에서’ 살아가느냐 보다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고. 그 말은 아마도, 결국은 마음가짐과 태도에 달렸다는 삶의 교훈 같은 것이겠지만 나는 그 말을 긍정하지 못한다. 30년 넘는 생애 동안 그 ‘어디’가 마음가짐과 태도에 속수무책으로 개입했다. 내가 누운 방이 어디냐에 따라 별 일 없이 기분이 좋기도 했고, 별 것 아닌 일에 더욱 처절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후자일 때가 훨씬 많았다. 말은 돌아 결국은 또 마음가짐으로 귀결되는 얘기 같지만 어쨌든 공간은 내 마음보다 위에 있어 지배 권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일찍이 그것을 깨닫고 남들보다 자주 배낭을 싸는 일을 하게 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관련이 없진 않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현재의 나, 여행작가를 업으로 하기까지의 기승전이 될 테니까. 현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나를 어딘가로 밀어냈고 밀려난 나는 그 현실을 벗어나려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탔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경주를, 루앙프라방을, 시엠립을….


넓고 싼 방을 찾아 서울에서 안성으로. 또 한 번, 현실에서 밀려난 내가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이전과 달리 부푼 솜사탕처럼 달떠있었다. 이른바 ‘직립세안’. 서서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안부를 묻는 이들 족족 자랑을 했다. “드디어 내가 선 채로 세수를 하게 됐어!”  

샤워부스는 또 어떤가. 더 이상 변기 위에 물이 튀지 않는다. ‘졸졸졸’이 아니라 ‘촤아’, 시원하게 물을 내뿜는 샤워기 아래서 몸을 닦는다. 사람들이 어째서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는지 알 것 같다. 몸을 훑어간 물은 배수구로 아주 유연하게 흘러든다. 수챗구멍이 막혀서 물이 발등을 덮는 일은 없다. 배수구는 오로지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을 위한 것. 이전처럼 ‘코끼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코끼리, 그러니까 세탁기는 드디어 제 공간을 찾아 베란다에 놓였다. 심지어 양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세탁기 전용 수납공간에. 

몇 년 전, 봉천동으로 이사를 올 때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을 거울 속 내게 했다. 

 “여기에선 글이 잘 써질 것 같아.”

거실은 동생의 스튜디오가 되었다. 동생은 이제 그릇을 깨지 않고, 혹서기만 아니라면 뻘뻘 땀을 흘리며 요리를 하지 않는다. 본인이 직접 수치를 재서 주문한 맞춤용 테이블에서 조명과 대형 모니터 등 방송용 장비를 그럴듯하게 갖추고 방송을 한다. 그로 인해 거실에 소파를 놓는 꿈은 결국 실현하지 못했지만 전혀 불만은 없었다. 동생은 스튜디오와 자신의 개인 침대를 놓은 방을 가졌고 나는 아파트에서 가장 넓으며 가장 안쪽에 자리한 안방을 가졌다. 그러고도 방 하나가 더 남는다. 그곳에 우리의 낡은 옷가지를 정리했고 크리스마스트리라든가 휴대용 가스버너 같은 세간들을 넣어두었다. 


거실 쪽 베란다 밖은 아파트가 정면에 있어 딱히 전망이랄 건 없지만 조금만 고개를 들면 이전 방들에서는 본 적 없던 넓은 하늘이 있다. 두 손을 있는 힘껏 다 펴도 가려지지 않는 그런 하늘. 그래서 흔히 말하는 아파트 조망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진짜 전망은 주방과 동생 방, 옷방이 있는 동쪽에 있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 없이 시원하게 뚫린 전망이다. 눈에서 가장 먼 곳에 겹을 이룬 산들이 온화하게 둘러져 있고 그 아래로 직선으로 뻗은 4차선의 도로가 있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는 고만고만한 집들 몇 채와 임야가 어우러져 있고 조금은 언밸런스하게도 아파트 몇 채, 대형 가구 공장 하나가 불쑥 솟아 있다. 도로는 안성과 평택을 잇고 있어서 차량 통행량이 꽤 되는데 일몰 후 퇴근 시간대에는 줄 이은 차량 불빛이 퍽 도시다운 야경을 만든다. 도농복합도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안성이라는 고장을 딱 한 풍경으로 보여준다면 이 풍경이 아닐는지. 특히 여명으로 물든 새벽의 하늘은 장관이다. 채도를 달리 한 홍시 색으로 물든 하늘에 정신을 뺏기다가 산 위로 얼굴을 내민 해와 눈을 맞춘다. 무려 일출을 볼 수 있는 방, 아니 집이라니. 


매일 아침 그 굉장한 전망을 마주할 때마다, 세면대의 물을 틀 때마다, 샤워기의 따뜻한 물을 온몸으로 맞을 때마다 대상이 없는 감사인사가 절로 나왔다.  


모든 것이 순조롭진 않았다. 이사 직후 우리 자매를 위한(?) 나름의 격한 ‘환영 파티’가 있었다. 천장에 묻힌 가스배관의 어딘가가 노후가 되어 가스가 누출되고 있었으며 이유 없이 천장의 소화기 시설이 터져 새벽에 119 구조대가 출동하는 난리가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 가스공사, 집주인, 세입자(나)의 의견 교환이 며칠간 이루어진 끝에 주방 가스를 아예 철거하고 전기레인지를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하필 내가 치앙마이에 있던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이유 없이 소화기가 터졌다는 당황한 동생의 목소리에 이역만리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119를 부르자” 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지, 모두 좋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이벤트가 벌어질 때마다, 늘 그래 왔듯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액땜이라 생각했다. 더 크게 일어날 수 있었던 사고를 운 좋게 예방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이벤트라 할 만한 일들은 그것까지였다.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으며 ‘막상 이사를 오니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어 지더라’와 같은 얼토당토않는 욕심 같은 건 꿈에서도 품지 않는다. 거짓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대궐 같은 집, 단정한 정원, 탁 트인 전망 같은 공간은 일찍이 내 세계에 존재한 적도, 바란 적도 없었다.       

    


열대나라에도 벚꽃은 피고 가을바람은 불어  

치앙마이가 자전거를 타기 여간 까다로운 도심 환경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나만의(?) 자전거 코스를 발굴해내 자주 페달을 밟았다. 내가 자주 오갔던 자전거 코스는 치앙마이 대학교 후문에서 반캉왓까지의 구간과 치앙마이 대학교 교정 내에 위치한 앙깨우 호수까지의 길이다. 시내 외곽에 있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가야 하는 위앙 꿈깜은 개인적으로 가장 최고로 꼽는 자전거 코스다. 숙소 위치상 모든 코스가 다소 번잡한 대로변 구간을 지나야 했지만 일단 한적한 구간으로 들어서면 자전거 타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한다. 

확실히 건기의 치앙마이는 5월에 방문했던 두 번째 치앙마이에 비해 덜 더웠고 아침, 저녁으로는 꽤 선선해서 자전거 타기에는 최적이었다. 치앙마이의 겨울이 얼마나 선선하냐면 고산족 마을인 키안 쿤창은 벚꽃 명소로 유명한 정도였다. 나는 트럭형 대중교통수단인 빨간색 쏭태우를 타고, 자동차가 일으키는 산길의 흙먼지를 1시간이나 마시고 약간의 멀미를 한 끝에 벚꽃구경을 갔다. 1월의 벚꽃, 열대 나라의 벚꽃은 그 존재만으로 무릉도원처럼 신비로운 데가 있었다. 나의 전화영어 선생님인 필리핀인 해리와 켄트가 한국을 여행한다면 꼭 봄에 가서 생애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벚꽃을 보고 싶다고 했었던 기억이 났다. 치앙마이에서, 열대기후의 국가에서는 벚꽃을 절대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고정관념이 깨졌다. 


게으른 탓에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는 일은 드물었다. 해 질 녘 자전거를 타고 나가 한적한 자리에 해가 저물 때까지 있다가 각종 구이를 파는 노점들이 저녁 장사를 시작할 때쯤 숙소로 페달을 밟았다. 반캉왓까지 달리는 구간에서 자주 퍼져버린 장소가 왓우몽이었다. 보기 드문 석굴 사원으로 나무로 울창한 진입로에는 머리만 남은 부처상이 방치된 듯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이 세상 잉어와 비둘기가 모두 모인 것 같은 번잡하고도(?) 평화로운 연못이 있다. (그만큼 바닥에는 비둘기똥 자국이 엄청났다!) 시내 변두리에 있어서인지 다른 유명 사원들처럼 방문객이 많지 않고 화려함 없이 오래되고 고즈넉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사원이다. 위치와 구조 상 해가 지는 풍경 그 자체를 보기는 어렵지만 해가 이울면서 석양빛으로 물드는 아늑한 사원 앞뜰의 분위기가 참 좋다. 가끔은 왓우몽을 지나쳐 반캉왓까지 곧장 달렸다. 자동차가 오가는 도로를 달리기는 시내와 매한가지였지만 차량 통행량이 월등히 적어서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이 컸다. 예술인 커뮤니티인 반캉왓을 가기 위해 자전거를 타기보다 자전거를 타고 싶어 반캉왓을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반캉왓 주변 식당에 들러 피자나 국수를 먹었다. 반캉왓은 예술가들의 공방과 카페, 레스토랑 등이 한데 모여 있는 작은 단지인데 내가 별도의 워크숍 같은 프로그램을 참여하지 않아서인지 단지 자체에 있어 큰 감흥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도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고 자연친화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치앙마이스러운’ 매력이 있는 명소임은 분명하다. 


치앙마이에서 밤의 명소 단 한 곳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앙깨우 호수를 첫 손에 꼽겠다. 치앙마이대학교 북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호수는 어떤 인공의 건축물도 없이 든든하게 선 도이수텝을 뒤로하고 고요하고 청량한 자태로 이방인을 맞는다. 캠퍼스가 워낙 넓고 차량 통행량도 높은 까닭에 호수까지 가는 길에는 다소 긴장해야 하지만 일단 호수로 향하는 길목으로 들어서면 이른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훅 두 뺨을 스친다. 산 아래 물가가 그토록 시원할 줄이야. 물론 혹서기에는 제아무리 앙깨우 호수라도 후텁지근함을 피할 수 없겠지만 내가 머물렀던 1월과 3월 사이의 저녁 호수는 산책에 최적화된 날씨였다. 호숫가에는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들과 묵묵히 호수 변을 달리는 사람들, 가만히 앉아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이 주를 이뤘다. 대부분 학생이거나 동네 사람들이다. 완전한 어둠이 드리운 호숫가의 가로등 불빛은 너무 밝지도, 또 너무 어둡지도 않은 희붐한 빛을 뿜어냈다. 가로등 아래 연인들이 뽀뽀를 해도 눈길이 가지 않을 만큼 은은한 빛이었다. 보송한 두 팔을 어루만지며 주변 풍경을 둘러보다, 상념에 빠졌다 망중한을 즐기다 보면 이제는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위앙 꿈깜은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들이 드문, 란나왕국의 초기 도읍지였던 지역이다. 시내 중심에서 10km쯤 떨어져 있고 대단한 볼거리가 있다기보다 폐허로 남은 사원들이 드문드문 자리한 동네여서 방문자가 드물고 어쩌다 패키지 여행객들이 그룹으로 찾는 곳이다. 원형을 잃고 기단과 탑의 일부만을 남긴 사원들은 잡초가 무성한 들판 위에 관리가 되다 만 모습으로 남아 있다. 강의 범람으로 인해 땅에 묻히고 버려지길 여러 번, 1984년에 일부 유적이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한 지역이다. 발굴의 진척이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국에서는 이곳을 관광 명소로 개발하려는 의지가 있던 것 같다. 도중에 예산이 부족했거나 예상만큼 방문자들이 들지 않자 개발을 잠정 중단하고 방치해둔 인상이 역력하다. 가령 화려한 디지털 스크린으로 무장한 위앙꿈깜 박물관이라든가 유적지구 내 주요 사원들 근처에 지은 경비 초소, 화장실, 다목적 건물들이 추측을 뒷받침한다. 박물관은 소리 없이 운영 중이고(난 언제나 ‘나 홀로 방문객’이었다) 나머지 건물들은 흙먼지와 거미줄을 뒤집어쓴 채 스산하게 방치되어 있다. 이따금 안내센터 앞에서 마차나 전용 셔틀을 타고 유적지를 둘러보는 중국인 패키지 여행단이 있었다. 아주 간혹 한국인 그룹도 있었는데 개별 여행자들도 찾지 않는 와중에 그들이라도 이곳의 적막을 깨 주니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사방이 뚫린 셔틀버스를 타고 주요 사원들을 신속하게 한 바퀴 돈 다음 홀연히 사라졌다. 


관광지 개발의 일환으로 만들었을 산물 중엔 자전거 도로가 있었다. 유적지를 지나는 도로 곳곳에 자전거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실제로 도로 위를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은 거의 내가 유일했다. 또한 자전거를 마음 놓고 탈 수 있는, 심지어 타라고 독려하는 동네 또한 치앙마이에서 위앙 꿈깜이 유일했다. 심지어 곳곳이 폐허로 남은 유적지에 인적마저 드문 고즈넉한 분위기라니. 앞서 치앙마이는 오랜 도읍지였음에도 시엠립이나 경주의 폐허가 주는 초월적 분위기는 없다고 적었지만 위앙 꿈깜만은 예외다. 더욱이 처음부터 알고 찾은 곳이 아니라 다른 여행자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곳이어서 더욱 숨은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곳서 자전거를 타고 허물어진 사원들을 가만히 바라보기 위해 일부러 그랩택시를 타고 위앙 꿈깜에 갔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깔끔한 식당에서 반찬 서너가지를 골라 태국식 백반을 먹고 바네사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한다. 카페서 자전거를 빌려 왓 이깡 주변을 돌다가 해 질 녘쯤 웅장한 석탑이 돋보이는 사원 왓 체딜리엄으로 페달을 굴렸다. 금요일이면 사원 앞 광장에서 시장이 열렸다. 우리네 시골 5일장과 다르지 않아서 난전에 오른 각종 야채며 과일, 반찬들, 생선과 고기, 주전부리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석양 아래 붉게 물든 핑강을 바라보다가 그랩택시를 불러 시내로 돌아오면 알찬 여행 끝.      


그렇게 하루를 완전하게 여행하고 돌아온 날은 일상은 내일로 미루고 한낮의 햇볕 냄새를 기억하며 ‘일하지 않았다’는 죄책감 없이 잠들었다.   



따로 또 같이같지만 또 다르게 

이사한 내 방의 모습은 봉천동과 그 이전의 홍제동과 다르지 않다. 한쪽 벽을 책장으로 채우고 창가에 컴퓨터를 올린 책상과 수납장을 뒀다. 그리고 문 옆에 홍제동서부터 쭉 써온 화장대를 두었다. 책상은 동생이 쓰던 것을 이어받았고 새로 산 것은 수납장과 벽에 남은 공간만큼 채워 넣은 좁다란 5단 책장뿐이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침대가 없고 동생이 분방해 나갔을 뿐이었다. 동생은 침대를 따로 마련했지만 나는 바닥에 누워 자는 것도 괜찮았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방의 공간을 확보하는 편이 더 좋았다. 방문에 붙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포스터도 봉천동 때 그대로다. 그러므로 문을 닫으면 수년째 내가 지내왔던 방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 점이 참 좋다. 통장 잔고가 넉넉했다면 예쁘고 튼튼한 새 가구들을 들이고 인테리어에 신경 써서 전과 전혀 다른 ‘작업실’을 갖게 되었을까.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좋다. 딱 방만 도려내어 살짝 사이즈를 키운 다음 전망 좋은 아파트에 통째로 집어넣은 느낌. 대신 창문은 좀 더 커서 하루 종일 볕이 들고 더 이상 천장의 곰팡이도, 바퀴벌레도 없는 공간으로의 이동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방문을 닫으면 온전한 내 세상이다. 나와 동생은 이제 ‘항상 같이’가 아니라 ‘따로 또 같이’의 생활을 하고 있다. 한 방에서 한 침대 생활을 할 때는 당연히 서로를 배려하기 위한 불편함이 따랐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됐다. 물론 한 집에 살기에 완벽한 개인 생활을 누릴 수는 없지만 ‘따로’보다 ‘함께’가 좋아서 한 집에 산다. 그러나 이제 각자의 방을 가진 것만으로도 함께여서 불편할 수 있는 점은 최소화되었다. 여전히 동생이 거실에서 방송을 할 때면 살금살금 움직이지만 이전만큼 서로에게 예민하지 않다. 세탁기를 돌리거나 샤워를 하는 것도 자유롭다. 동생은 가끔씩 자기 방 침대를 놔두고 내 방 이불에 누워 낮잠을 잔다. 예전처럼 나는 내 컴퓨터 앞에서, 동생은 내 뒤에 엎드려 누운 채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동생이 스르르 잠이 든다. 동생이 자는 모습을 보면 서울에 살던 시절 환한 형광등 빛 밑에서 잠자던 동생이 떠오른다. 내가 늦은 새벽까지 글을 쓴다고 불을 켜 두어 늘 미안했다. 서로가 깰까 봐 이불을 뒤척이는 움직임도 조심스러웠다. 개봉동, 홍제동, 봉천동에 이를 때까지 줄곧 그랬다. 늘 불편한 건 아니었다. 때때로 동생의 체온으로 온기가 도는 이불 안에 들어가면 안정감이 찾아오곤 했으니까. 이제 우리는 한 이불을 덮던 시절을 아주 오래된 추억처럼 말한다. 실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님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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