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이치는 안에서나 밖에서나 똑같다.
수학이라는 과목은 참 요상한 과목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볼까?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런 질문에 아이들이 생각을 던지고 교사는 그 생각에 대해서 피드백을 해주는 아름다운 광경을 교사라면 누구나 바랄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질문이라는 공부의 치트키를 사용하게 하려면 굉장히 어려운 고난과 역경을 헤쳐가야 한다. 그래도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왠지 조금만 신경쓰고 가르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참 어려운게 수학이라는 과목이다. 마치 게임 승급전에서 한판만 더 하면 승급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코 이길 수 없었던 그 마지막 판 처럼 말이다.
아이들에게 수학 수업중에 생각할 시간을 잠시라도 주려고 노력하지만 현실은 그 시간에 마쳐야 하는 많은 과제와 아이들의 천차만별 수준차에 결국 그 끝은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이 이 과정을 이해한건지 이해하는 척 하는 건지 확인할 길이 없다. 형성평가, 개인별 지도 등 이론적으론 반복해서 지도하고 확인하고 노력하면 학습결손이 줄어들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전은 다르다.
그래서 올해 우리반에는 수학 학력 결손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사명을 가지고 기초학력중에서도 수학 한 과목에 대해서는 기필코 완전학습을 이루어내리라는 각오로 아이들을 가르치려 노력중이었다. 어제까지는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 부터는 교과서부터 조작활동보다는 그림이나 수직선을 활용한 수학적 표현을 통한 문제 풀기 및 문제 만들기 등의 고차원적인 사고가 필요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학습을 하는 것도 기본적인 독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지도가 참 어렵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조작활동을 접목하여 수업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은 모든 선생님들이 안고 있는 고민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준비한 보드게임을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게임의 룰은 해본 아이들도 있는 게임이기에 금방 이해를 하는데 대뜸 그 보드게임에서 사용하는 숫자가 자연수가 아닌 지금 수업하고 있는 분수라고 안내를 하니까 대뜸 나오는 반응이 있다.
아 귀찮아
이걸 언제 다해
하기 싫어
한 아이가 던진 무심한 말에 연쇄적으로 마음의 소리를 내 뱉는 아이들의 모습에 수업의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이 말들은 비수가 되어 수업에 대한 의욕을 갈갈이 찢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웃으며 달래가며 수업을 할 자신이 없어진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수업시간에 해야될 것들만 딱 맞춰서 해야 하는걸까? 하는 고민과 함께 수업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간다. 나와 아이들의 세대차겠거니 생각을 하고 넘어가려 해도 교권과 아이들의 태도 사이에 경계선 어디쯤 내가 서 있어야 할지 가늠이 잘 안된다.
교담수업교실로 가버리라는 일갈을 하곤 교실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데 다른 생각이 들지 않고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이라도 써야 마음이 가라 앉을 것 같아 한글자 한글자 집중해서 쓰고 있다. 글로 쓰다보니 생각이 정리되고 원인이 무엇일까? 하는 자아 성찰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난 욕심쟁이였다.
결국 찾은 나의 결론은 이 서운함의 시작은 욕심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내가 가진 욕심에 부흥해주지 않는 아이들의 태도에 폭발한 것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주 발생하는 그런 문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서운함, 친구들에게 느끼는 서운함, 가족간의 서운함. 그만큼 아이들을 이들과 비슷한 선상에 두고 내가 뭔가를 하려고 했다는 욕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동료 교사들과의 대화중에 이런 말들이 자주 들린다.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해줄 것만 해주고 그외 사고 나지 않을 선에서 자유롭게 풀어주는게 가장 최고의 지도방법이다.
선배 교사들의 많은 지혜가 담긴 이야기다. 그런나 정말 쉽지 않다. 아이들과 거리를 두면 열정이 생기지 않고 열정이 생기지 않으면 아이들 한명 한명을 둘러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적인 과정에 결국 모두를 포기할 순 없다는 결론을 내고만다. 이래서 내가 교직에 아직 있나보다. 결국 나혼자 분노하고 나혼자 반성하고 나혼자 회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