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의 심리학을 통해서 돌아본 교직 생활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첫발을 들여놓으면 누구나 저마다의 상상과 기대를 안고 첫 출근을 한다. 사람의 성향마다 제각기 다양한 미래를 바라보며 달콤한 상상을 하곤 한다.
“ 애들이 날 너무 좋아하면 어떻게 하지?”
“ 이 직업이 내 천직인가?”
“ 역시 교대 다니면서 배운 내용이 도움이 좀 되네?”
상상 속에서 존재할 법한 미지의 세계와 같은 판타지를 필자도 가지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에 한껏 차려 입고 출근했던 초임 시절 첫해의 추억이 산산이 조각 나는 데 불과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 먹을 수 없는 기안문의 조각들, 애들은 왜 이렇게 말이 많을까? 애들은 다 이런 걸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들의 세계 속엔 난 없었다. 그래도 업무에서는 완벽해 보이려고 계획서와 씨름을 하며 간단한 행사 하나에도 벌벌 떨며 여기저기 조언을 구하러 다니지만, 학교는 다들 바쁘다. 관리자님들 앞에는 퇴근 시간 순환 도로처럼 언제 뚫릴지 모를 정체 구간이 존재한다. 퇴근 시간 전까진 말이다. 공문과 씨름하다 수업 준비라도 하려고 지도서를 펼칠 때쯤 순식간에 사라지는 선배 선생님들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일찍 퇴근하지? 라는 물음표를 항상 머리 위에 달고 다니며 학교에 적응하다 보면 1년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초임의 추억이란 그런 것이었다.
어떤 직종이든 초임의 추억이란 비슷한 것이었다. 군대 시절 신임 장교의 경험도 초임 교사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을 보면 공무원 조직이란 것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된다.
누구나 “나 때는~~~” 이라는 뻔한 수식어로 포장할 수 있는 열정 넘치던 초임 시절이 있다. 없다면 아마 거짓말이 아닐까? 아이들에게는 좋은 선생님으로, 동료 교사와는 함께하면 즐거운 좋은 동료로, 관리자들에게는 인정받는 초임 교사가 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생각된다. 초점이 다를 뿐 누구에게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숨어 있다.
교직에서는 보통 잘 포장된 것들을 관찰하고 배울 점을 찾곤 한다. 잘 포장된 공개 수업을 관찰하며 좌절을 하고 잘 정리된 교실을 둘러보며 무질서한 내 교실에서 반성할 점을 찾는다. 잘 포장된 누군가의 자료를 보며 난 왜 저렇게 못 만들까? 하는 자기 반성을 하면 다행이지만 보통은 “난 저렇게까진 못해”라며 빠른 포기를 하는 게 일상이다.
필자 또한 그러했다. 다만 욕심이 많아서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모든 걸 다 충족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타인의 잘 포장되고 가공된 것들을 쫓기 위해 힘껏 뛰었다. 한 가지에 집중해도 만족할 수 없을 텐데 초임 때는 참 욕심도 많았다. 그렇게 살아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남은 건 후회뿐이었다.
이 글을 통해 초임 선생님들께 필자의 고해성사를 하려고 한다. 주변에서는 그래도 열심히 자신이 맡은 일은 책임지고 하는 선생님이란 소리를 듣곤 하지만 내 교실 속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의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교사로서 치부처럼 느껴질 수 있어 외면해야 했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필자와 다른 성향이라 생각하는 선생님은 뒤로 가기를 누르길 추천한다.
나는 학급을 운영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합리화를 통한 자기 방어를 하곤 한다.
“ 우리 반 아이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이건 할 수 없어.”
“ 이 활동은 사고의 위험이 높아 할 수 없어.”
“ 이 수업에서는 이게 최선이야.”
이솝 우화에 나온 여우가 포도를 먹고 싶어 하지만 키가 모자라 딸 수가 없어 먹을 수 없는 포도를 쳐다보면서 “ 저 포도는 아직 익지 않아서 시어서 안 먹어.”라며 스스로 합리화를 하는 행동을 나는 매일 반복하며 살아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여건으로 인한 합리화는 봐줄 만하지만 나의 준비 부족으로 인한 수업 내용 결손, 평가 누락, 계획에 없던 활동 변경 등 합리화의 결과물은 봐주기 힘들 지경이었다. 특히 초임 시절 술자리를 좋아했던 나는 모임이 있는 다음날은 예체능 및 창의적 체험 활동으로 시간표를 채우며 나름의 위안으로 삼는 내 행동이 정당하다고 열을 올렸지만, 그마저도 여의 찮으면 평가 신공을 사용하며 합리화를 완성하곤 했다. 겉으론 절대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모든 것들도 사람 사는 세상의 일부분이라는 식의 합리화는 내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쉬웠다. 앞으로도 난 모자란 수업 준비에 합리화라는 마법을 부여할지 모른다.
초임 시절 수업 준비를 열심히 했다. 아니 열심히 했다고 믿었다. 인디스쿨의 방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내려받고 풀어보고 맘에 드는 것을 추려서 정리한 후 수업 하면 내가 참 교사가 된 것처럼 뿌듯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공고해질수록 아이스크림이나 기타 수업 자료들을 쓰는 선생님들을 수업 준비도 안 하는 나태한 교사로 마음속 낙인을 찍는 마음마저 가슴 한쪽에 스멀스멀 피어났다. 때론 급하게 내려받은 자료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수업을 하는데 수업이 물 흐르듯이 잘 되면 내가 잘나서 그런 마냥 기고만장해지곤 했다. 그것이 교사의 능력이라 생각했다. 이런 믿음을 배신하는 아이들을 난 용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는 내 수업 시간에 불량한 태도를 보이는 너희를 난 인정할 수 없다.”
“ 화려한 PPT로 무장한 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너희들은 원래 수업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다.”
수업의 핵심은 학습 목표 달성을 위한 적절한 활동과 피드백 그리고 관심 유지 정도의 동기 유발이란 것을 깨닫는데 대략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요즘 수업 자료로 만들어져 공유되는 질 좋은 것들은 넘치다 못해 검색하기도 어려울 만큼 비슷한 것들이 많다. 모든 수업에 다 챙기려는 욕심보다 수업의 흐름에 대한 이해에 시간을 투자해야 함을 깨닫는 데 꽤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수많은 활동 자료와 수업 PPT들을 일일이 내 수업 스타일에 맞춰 편집하고 꿰어 맞추는 데 들인 공을 내용의 이해와 학생의 실제 학습 활동에 대한 고민에 쏟았다면 방황의 시간은 좀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괜스레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속상한 마음에 호통을 쳤던 그 순간들이 후회로 남아 있다. 나의 준비 부족을 아이들의 무관심으로 투사하던 나의 과거 모습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를 푼다. 관리자라는 존재는 그 뺨을 때리는 존재일 경우가 왕왕 있다. 교무실에서 분 한 줄기 바람이 우리 교실에서는 태풍으로 변한다.
선배 선생님에게 뭔가 작은 것 하나라도 배워보려는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을 연발하며 언제든지 일거리만 주면 당장에 해내겠다는 표정으로 교무실을 드나들었던 시절이었다. 승진을 앞둔 준 관리자에 해당하는 당시 교무부장 선생님의 도와 달라는 말 한마디에 약 2주 간의 저녁 시간을 비워두고 초과 근무를 해가며 일을 도왔던 적이 있다. 그 일이 마무리된 후 우연히 교무실을 지나는데 교감, 교장 선생님께 보고하는 대화 소리에 내 손은 부르르 떨렸다.
“ 그 일은 000 선생님이 파일 정리를 실수하는 바람에 일이 좀 잘못돼서 제가 다시 처리했습니다. 제가 잘 처리 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 000 선생님은 바로 나였다. 2주 간의 초과 근무를 했던 수고는 어디 갔는지 그 일의 문제는 내가 뒤집어쓰고 모든 공은 본인이 가져가는 뉘앙스의 대화를 교무실에서 업무를 하던 모든 직원에게 들리도록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던 교감, 교장 선생님에 대한 실망과 선배 교사에 대한 배신감에 그날 이후 우리 교실에는 태풍이 몰아쳤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교사의 기분은 교실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내 마음속에 불고 있는 강풍은 우리 아이들에게는 태풍처럼 느껴졌으리라. 좀 더 전문가 다운 자세를 가져야 했지만 초임의 피 끓는 열정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 선배 교사와는 ……상상에 맡기겠다.
달콤한 맛은 기분을 좋게 만든다. 학교 안의 스트레스를 푸는데 달콤한 아이스크림, 커피믹스 만큼 좋은 것은 없다. 달콤함은 우리 몸에는 독이 된다고 하지만 정신건강에는 약이 된다.
아이들에게 한 번씩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살 땐 꼭 빼놓지 않고 아이들의 숫자보다 넉넉히 사곤 한다. 그렇게 산 아이스크림은 오늘 하루 힘들었을 주변 선생님들에게 위로의 달콤함을 그리고 나에게 위로를 준다. 어릴 적 사탕 한 개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껴 먹던 그 느낌은 성인이 되었지만 필요했다.
아이들에게 속상했던 일, 관리자와의 마찰이 있을 때면 이 방어기제는 어김없이 발현된다. 한번은 짜 먹는 형태의 초코 아이스크림을 앉은 자리에서 5개를 다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로 화가 많이 났던 기분을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힘으로 치유했던 상황이 기억 한편에 남아 있다. 달콤한 것과 시원한 것까지 일석이조의 효과 때문에 난 아이스크림을 선호한다. 과자파 선생님도 주변에 많이 있었지만 아이스크림만 한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 반 아이들은 수업을 잘하다 뜬금없는 아이스크림 공격을 받았던 기억이 많다. 좋은 건가?
유난히 마음이 맞지 않거나 아이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해가 있다. 담임을 맡고 일정 기간 함께 생활한 후 곤란할 때가 있다. 분명 그 아이들은 나에게 큰 잘못을 한 적도 없고 문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들의 어떤 특정한 행동이나 반응 때문에 정이 가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럴 때면 오히려 아이들에게 사무적으로 친절해지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다. 겉에서 보기엔 한없이 친절한 선생님처럼 보이려 노력하는 나를 발견한다.
간혹 동료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 올해 아이들이랑은 정을 못 붙이겠어. 적당히 거리 두고 해 줄 것만 하고 지내야겠어.”
“ 올해 아이들은 너무 힘들어. 그냥 사고만 안 나게 적당히 잘해줘야겠어. “
인디스쿨에 올라오는 많은 글 중에 이런 유형의 고민에 대한 글이 요즘 자주 눈에 띈다. 그만큼 세대 차나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반동을 형성하는 교사의 방어기제가 발동하는 시기가 교직을 겪다 보면 한 번쯤 오기 마련 아닐까? 빨리 오면 초임 시절에 오기도 하고 경력을 쌓다 보면 오기도 한다. 필자는 초임 2년 차에 한번 7년 차에 한 번 겪었다. 아마 그 시절의 아이들은 나에 대해서 친절했던 선생님이라고 기억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기억 속에는 그때 그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깨진 유리 파편처럼 일부만 남아 있다. 과연 아이들을 사무적으로 대했던 교사와 학생의 관계일지라도 학생 입장에서는 좋았다는 뉘앙스가 기억 한편에 남았다면 좋은 걸까? 아이들이라는 책에 점이라도 한번 찍어주려 했던 선생님이 좋은 걸까?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실망해 왔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라는 우주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 교실의 모습에 집중했다. 보이는 부분에 집중하다 보니 아이들의 좋은 점보다는 고쳐할 점만 눈에 보였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이들이 도구가 될 때도 있었고 아이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듣곤 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였다. 초임 시절 나의 역사는 그랬다. 그랬었다.
초임 선생님들에게 안내서가 될 글을 모집한다는 모집 공고문을 보고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 글을 시작했다. 요즘 발령 받는 신규 선생님들이 얼마나 능력이 출중 한지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미력한 지식으로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쓸 자신은 없었다.
결국 선택한 건 나를 객관화 하는 것이었다. 초임 시절 내 교실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겪었던 시행 착오나 과오를 드러내 보며 회초리를 맞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객관화를 거치지 않은 회초리는 의미가 없다. 회초리를 맞아보고 나니 한결 속이 후련하다. 이 글을 읽는 선생님들도 자신의 교실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객관화 해 보길 추천한다. 토해낸 배설물과 같이 쌓인 과거의 잘못들은 앞으로 만들어갈 교실의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본 글은 인디스클 온보딩 게시판에 쓴 글을 옮겨 게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