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시험을 마치고 어떤 대학을 가야 할까 고민을 하던 찰나 아버지께서 신문을 보여주시며 교육대학교에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니라는 권유를 해주신 것이 나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신문의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IMF 이후 교육대학교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다는 식의 기사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래서 큰 고민 없이 교육대학교가 무슨 대학교인지에 대한 고찰은 하지 않고 무작정 원서를 내고 말았다. 그것이 오늘날의 나를 만든 시작이었다.
내가 다녔던 광주교육대학교의 커리큘럼은 굉장히 다이내믹하다. 숫기도 없고 부끄럼도 많은 나에게는 가시밭길 투성이었다. 생전 만져보지도 않았던 피아노를 연주해야 했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노래까지 해야 했다. 남 앞에서 노래라고는 노래방에서 유행가 정도 불러본 게 전부였는데 여기서는 다수의 청강생들 앞에서 정확한 음과 발성으로 시창이란 것도 해야 했다.
술에 절은 피아노를 아는가? 함께 동거 동락하던 동기들과 피아노 시험을 대비하여 의기투합하여 오늘은 피아노 연습을 1시간은 꼭 하자는 도원결의를 한 후 각각 피아노관의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앉아 건반을 누르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모두는 피아노관 앞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뭔가를 갈구하지만 선뜻 말을 꺼낼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누군가 먼저 말을 내뱉는다.
" 한잔 하러 갈래?"
정확히 피아 노관에 연습을 시작한 지 30분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늘지 않은 피아노 실력에 반비례하여 우리의 주량은 늘어만 갔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체육, 음악, 미술, 실과 교과서에 있는 모든 분야를 한 번쯤은 살짝 발을 담그게 만드는 게 교육대학교의 교육과정이다. 그중에서 전공분야는 발목까지는 담게 만든다. 그렇게 교육대학교의 커리큘럼은 나에게 역동적으로 다가왔고 매 과정마다 시험장의 분위기는 나의 낯짝을 두껍게 만들었으며 내성적이었던 나의 성격을 수다스럽게 변모시켰고 지금은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30분 정도는 혼자서 지껄일 수 있는 배포를 만들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성격 개조가 되지 않았다면 정말로 힘든 과정이 되었겠지만 적응 스탯이 어느 정도 찍힌 캐릭터로 태어나서 그런지 힘들긴 했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느낌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조차도 나 스스로에게 교사가 돼야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납득시키긴 어려웠다.
ROTC로 군 복무를 하면서 함께 어울렸던 일반 대학을 다녔던 동기들이 취업을 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냥 취업을 할까?라는 고민을 해봤던 그 시절을 기억해보면 아마도 발령이 나기 전까지도 난 교사가 왜 돼야 하는지 교육대학교 4년 과정 중에 찾지 못했던 것 같다.
2010년 첫 발령을 받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나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 줬던 연수가 있었다. 바로 학급경영 연수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공람되어있던 공문을 찾아보다 연수 신청을 하게 되었고 그 해 겨울 난 혼자서 모텔에서 숙식을 하며 연수에 참여하였다. 학급 경영이라는 말이 그때 마침 유행을 하던 차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거기에서 해답을 찾았던 것 같다. 60시간이라는 연수시간은 그 이후의 나의 교직 생활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내 홈페이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HTML공부를 해서 만든 홈페이지를 학급 경영하는데 써보겠다고 온라인 주소도 만들어서 호스팅도 했었고 아이들에게 아이디를 만들어주고 아이들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난 거기에 날마다 일기를 썼었다. 일기 쓰라는 말을 하기보다 내가 일기 쓰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당시 2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학교 회식이 있을 땐 술에 취해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 홈페이지에 차곡차곡 모아두면 좋았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그 홈페이지는 이후에 업데이트를 해보겠다고 시도하다 파일이 다 날아가 버렸다. 2년간의 나의 흔적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매주 매주 수업 일정 짜고 안내한 후 수업을 진행하고 연수에서 들었던 활동들 하나하나 해보고 수정하고 반응이 좋았던 활동들은 따로 저장해뒀다가 다음 연도에도 다시금 같은 학년을 하려고 일부러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6학년을 매번 자청했던 열정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그게 맞는 것 같았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른 걸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길어질 것 같았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방학중에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1박2일 캠핑을 강행했었다. 우리 학년이 7개 반이었는데 우리 반만 그런 활동을 하기에 눈치가 보였는지 다른 반 담임선생님들께 의견을 물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우리 반만 데리고 관내에 있는 야영수련장에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학급 캠핑을 강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 같았지만 그땐 그게 좋았고 재밌었고 그렇게 해야만 내가 교사로서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나니 그동안 찍었던 아이들과의 추억을 그대로 두기엔 너무 아까웠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학급 앨범이었다.
추억의 기억모음집
내가 교사로서 존재하는 이유를 찾았던 것 같다. 아이들의 추억 속에 내가 점을 찍었다는 만족감에 한동안 저 CD를 책상 위에 세워두고 봤던 기억이 난다. 한 장 한 장 직접 손수 만들어서 졸업식 때 아이들의 졸업앨범과 함께 선물로 증정했다. 졸업식 때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적은 없지만 아이들을 다 보내고 난 교실에서 울적한 기분에 취해 멍하니 학급앨범을 만지작 거렸었다. 아마 아이들은 그런 나를 꿈에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난 무서울 땐 정말로 무서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그런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좇아서 진로를 정하고 꿈을 이루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운 좋게 대학에 갔으며 운 좋게 직업을 가졌다. 그리고 그 직업이 내 직업이라는 걸 운 좋게 깨닫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힘들 때도 있고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게 일상이지만 이 직업을 그만두고 다른 걸 하겠다는 생각이 그 이후에 내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진 걸 보면 말이다.
사명감이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할 필요는 없다. 교육활동의 과정과 결과가 나에게 뿌듯함 또는 만족감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기 PR의 시대에 어디에 대놓고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았지만 오늘 글로 적고 나니 이것 또한 뿌듯하다. 교사로서 살아온 시간 동안 나를 지탱하게 해 준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