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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유신 Oct 03. 2023

잔상 기억 3

무대 만들기

잔상은 오감으로 남는다고 했다.


갑자기 익숙한 냄새가 날 때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잔디 깎는 냄새가 나면 먼 곳에서 아주 예전에 같이 걷던 사람이 생각난다.

그 사람이 실제로 나랑 같이 걸었던 적이 있는지는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아도 그냥 잔디 냄새를 닮은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이 잔디 깎는 냄새를 닮을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내겐 그 사람은 잔디 깎는 냄새로 기억되었나 보다. 

그 후로 잔디 깎는 냄새가 나면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 사람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아도 실제 그 사람이 맞는지 몰라도 그냥 그렇게 기억을 하고 있다. 그 사람이 잔디를 깎는 사람은 아니다. 

이렇게 냄새로 기억나는 것은 몇 가지 있다.

흙냄새가 나면 아직도 군대 생각이 난다. 

군대에서 힘들게 생활한 것도 아니고 시골이나 산속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흙냄새는 날 군대로 보내준다.

가죽냄새, 새 차 냄새, 플라스틱 타는 냄새, 고깃국 냄새 등등 많은 냄새를 기억한다.

향수 냄새나 화장품 냄새는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기억하는 건 주로 자연이나 먹는 냄새인 것이 이상하지만 그 냄새를 맡을 때 무엇인가 강렬한 기억이 있었나 보다.

기억은 점점 잔상이 되어 없어지고 냄새는 오래 남아 있다. 

이젠 내가 기억하는 냄새와 그때 있었던 일을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막연하게 어떤 냄새를 맡으면 좋은 냄새, 그리운 냄새, 행복한 냄새와 같이 감정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나는 냄새는 아기 냄새이다.

아들을 키울 때 맡았던 냄새가 기억난다. 이젠 그 냄새를 찾기 어렵고 맡아본 지 오래되니깐 어떤 냄새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같은 냄새를 맡으면 그때 생생한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기억은 감각을 통해 오랫동안 잔상을 남긴다.

공연 무대를 기획하고 설치한 적이 있다. 

아주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했던 일이었다.

항상 남을 위해 무대를 기획했다. 거창하게 기획이라고 쓰는 것이지 그냥 큐시트 만들고 필요한 조명, 음향, 특수 효과 등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현장에 가서 무대가 어떻게 설치되는지 확인하고 예행 연습하고 행사하고 정리하는 것이 무대를 기획하는 단계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무대 설치 업체에 설명해 주면 알아서 설치해 준다.

당시에는 무대에 설치하는 것 대부분이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무대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인데 그때는 그것을 몰랐나 보다.

아니면 그때 생각한 것이 몇 십 년이 지나고 난 후에 어떤 자극에 의해 다시 떠오른 것일 수도 있다.


혼자 다시 무대를 만든다는 느낌이 든다.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자신이 주인공인 무대를 만들고 있다.

무대를 만들기 전에 먼저 어떤 무대를 만들어야 할지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얼마나 보여줘야 할지를 정하고 난 후에 만들기 시작해야 하는데 우리는 일단 무대부터 만들고 있다.

야외무대를 만들 때 먼저 드럼통을 굴려와서 쌓기 시작한다.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닥이 중요하니깐 열심히 드럼을 굴려와서 아주 촘촘히 쌓는다. 얼마큼 넓게 펼쳐야 하는지 모르고 내가 주인공인 무대니깐 일단 넓게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드럼을 굴려와서 자리를 잡는다.

드럼을 굴려오고 모으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드럼을 얻기 위해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고 전문 지식을 배운다.

이제 드럼 위에 올린 판자를 가져와야 한다.

판자를 얻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회사를 다니거나 자영업을 하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 돈을 벌어 판자를 산다.

드럼을 작게 펼쳐놓은 사람은 판자를 조금만 사도 된다. 

반대로 넓게 펼쳐놓은 사람은 판자에 비해 드럼이 너무 많다.


제한 시간이 있어서 평생 판자를 모으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무대 위에 혼자 서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제 여기서 뭘 해야 할까?

준비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왔기 때문에 무엇을 할지 몰라 다시 무대에서 내려간다.

준비를 해서 다시 올라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내려간다.

세상에 많은 무대는 이렇게 생각하는 중인 무대라 빈 무대라 많이 있다.

무대에 올라왔으면 절대 내려가면 안 된다.

준비가 안 됐으면 처음부터 올라오면 안 된다. 

드럼을 옮길 때부터 무대에서 할 일을 생각하고 필요한 넓이만큼 모아야 한다.

목적 없이 다른 사람이 모으는 드럼을 보면서 더 많고 빠르게 모으면 무대에서 무엇을 할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누구를 위한 무대인지를 생각해야 하고 무대에서 할 일을 계속 생각해야 한다.

관객이 많으면 좋은 것이다. 많은 관객을 모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무대에 나 혼자 올라가지만 무대 뒤에는 나와 함께 준비한 사람이 있다.

준비 없이 올라가는 무대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첫 번째 드럼을 굴리면서 전체 생각을 해야 한다.

아직 생각을 바꿀 시간은 조금 있었다.

마지막 드럼, 누구에게는 100번째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겐 10만 번째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드럼을 옮길 때까지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드럼을 모으고 나무판자를 올리면서 무대에서 할 일이 명확해지기도 할 수 있다.

필요한 드럼을 모으기 위해 다시 공부를 하고 나무판자를 사기 위해 돈을 벌어서 무대를 원하는 크기만큼 넓힐 수도 있다. 

한 번에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기는 어렵다.

무대에 맞춰 무대에서 할 일을 정하면 안 된다. 

무대가 작으면 넓혀야 하고 무대가 너무 넓으면 일부만 활용해야 한다.



어렸을 때 무대는 나무판자도 없는 드럼 한 개만큼이었을 것이다.

드럼 위에 올라서서 무엇인가를 했다. 그땐 드럼 한 개를 둘러쌓을 수 있는 관객이 전부였다.


나이가 들면서 학교를 졸업하고 드럼은 점점 많아졌다.

물론 학교에 따라 드럼이 달랐지만 일단 관객이 보는 맨 앞에 드럼은 가장 빛나고 깨끗한 드럼을 가져다 놓고 잘 안 보이는 중간이나 뒤쪽 드럼은 그중에서 낡은 드럼을 넣으면 된다.

무대 중간에서 뛸 예정이면 무대 중앙에 가장 튼튼하고 빛나고 깨끗한 드럼을 놓아야 한다.

가끔 무대가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보았다.

관객은 무대를 보지 않는다. 

관객이 무대를 볼 때는 무대 위에 있는 주인공에게 관심이 떨어졌을 때다.

주인공보다 무대가 돋보이면 안 된다. 아니 무대에 비해 주인공이 시시해서는 안된다.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공연은 무엇일까?

무대를 만들고 생각하지 말고 어느 정도 만들고 난 후에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아주 넓은 무대지만 아직도 비어있는 무대가 많다.

무대에 비해 시시한 공연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어떤 무대를 만들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무대는 다 만들고 올라가야 할 때인가?





구름을 보면 무대가 생각난다.

왜 구름을 보면 무대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난다.

혹시 무대에서 내려올 때 굴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굴렀는지 아니면 누가 구르는 것을 본 건지 기억이 안 난다.

무대를 만들 때 "구름주의" 경고문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지 구름과 무대가 연결되어 있다.


수십 년 전 기억이 구름을 보면 가끔 떠오른다.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잔상이 오래가는 것 같다.

모두들 자기 무대는 잘 만들어가고 있는지 이미 만들어서 무대에서 어떤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직 무대를 올라가는 계단에 서서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무대로 뛰어가라고 하고 싶다.

생각보다 무섭지도 않고 떨리지도 않는다.

무대에 올라갔다 다시 내려올 수 있을 때는 무대가 작아서 더 넓히려고 내려올 때 밖에 없다.

무대에서 쓰러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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