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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유신 Sep 19. 2023

잔상 기억 2

기억의 흔적

살아오면서 속해있던 사회가 바뀐다.

어렸을 때는 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학교 이름과 몇몇 친구들.

몇 학년 몇 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도 계속 연락되는 친구만 알고 있고 나이 먹어서 다시 만난 친구도 알고 있다.

학교 동창이라고 하니깐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물론 몇몇 기억은 나도 할 수 있지만 그 기억이 사실인지 아니면 내가 지어낸 기억인지 구분이 안 간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서 다녔다.

첫 번째 회사는 아주 조금 기억을 할 수 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겪었던 일은 기억이 난다.

기억에 남는 일은 대부분 내가 억울한 일인 것 같다.

즐거운 기억이 별로 없었던 건 즐겁지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만난 사람 중 아직도 연락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특별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 회사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몇 명은 있다.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과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

오래 다니지 않았지만 그래도 적성에 맞아 일이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유학을 가서 기억나는 건 같은 랩 사람들.

지금 연락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매일 만나서 매일 술 마셨던 사람들인데 회사를 옮기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몇 명은 아직 연락하고 살지만 그래도 자주 연락하지는 않는다.


다른 회사에서는 그나마 가장 최근에 나온 회사이고 회사를 나오고 난 후에 바쁘지가 않아서인지 기억이 많이 난다.


이곳으로 와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


내 기억이 가지는 저장 용량은 1년인가 보다.

사람에 대한 기억은 별로 못한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데 내가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몇 년을 같이 만나고 일해도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지 아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굳이 본인이 얘기하지 않는 이상 먼저 물어보지를 않는다.

궁금해해야 하는 것이지 모르겠다.

그냥 그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고 배경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인 것 같다.

아니 스스로 그렇게 길들였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특히 업무적인 관계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처음 보고 이름과 소속을 물어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이, 고향, 출신학교, 결혼 유무 등등 개인적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는 것은 부담이 된다.

이번에 만나고 또 만날지도 모르는 관계인데 할 말이 없으니 기본적인 것을 물어보겠다는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5번쯤 만나서 사적인 자리에서 물어보는 것은 괜찮지만 처음부터 물어보는 것은 부담된다.


근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지 할 말이 없어 물어보는 것인지 공통된 관심을 찾기 위해 물어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취미가 뭔지, 특기가 뭔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런 질문을 하는 사람 중에 무서운 사람은 나에 대한 정보 몇 가지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잘 아는 것 같이 얘기하는 사람이다.

아~! 그 사람 고향은 어디고 학교는 어디 나왔고 지금 어디 살고 있다고 나에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런 정보를 알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 사람과 그만큼 친하다는 것을 아니 가깝다는 것을 알리려 하는 것인지 의도를 모르겠다.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많아서 정리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들리는 말로 그 사람을 정의할까 봐 두렵다.


첫인상을 믿지 않으려 노력해서 첫인상이 없다.

반복돼서 정보를 입력당하면 기억에 잔상이 생긴다.

마치 내가 직접 겪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외국에서 모르는 곳에 가면 친절한 사람이 꼭 있다.

옆에서 굳이 설명해 준다.

여기가 한국으로 치면 강남 같은 곳이고 저기는 대학로 같은 곳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그 장소는 이미 강남이 되어버리고 대학로가 되어버린다.

새로운 장소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을 모두 막아버리고 그냥 외국에 가서 강남 거리를 걷다가 오게 된다.

친절한 설명을 하기 위한 비유는 오히려 선입견을 만들게 된다.

내가 볼 수 있는 관점을 모두 차단해 버리고 주어진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제품을 볼 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게 된다.

예전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외국인에게 요강을 보여주고 무슨 제품인지 용도를 생각해 보라 한 것이 생각난다.

외국인 모두는 식기나 욕실에서 쓰는 것으로 추측했지 정확하게 요강을 맞춘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없었다면 내가 비슷한 프로그램을 보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다.

요강을 주면서 설명하는 것과 먼저 용도를 생각해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아래 사진에 있는 제품은 도대체 어떤 제품인지 상상해 보자.



다양한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유사한 제품을 생각해 보다가 나는 이렇게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아직 잡지를 걸어 놓는 제품이라는 것에 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https://www.yankodesign.com/2009/06/03/super-periodical-reading-combo/


과거 기억에 없던 물건이 나타나면 최대한 아는 범위에서 하나씩 비교하려고 한다.


내가 가진 모든 잔상 기억에서 실체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잔상에 대한 실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기억이 지나가버리면 흔적이 남게 된다.

흔적은 오감을 통해 남겨진다.

냄새, 촉각, 맛, 소리와 보이는 것들로 남을 수 있다.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떠오르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잔상 기억은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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