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문제의 뿌리를 찾아서

기능이란?

by 한유신

1. 종이가 젖는 게 문제일까?


문제를 정의하고 나니, 생각이 컵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동안 우리는 줄곧 ‘종이 홀더’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정작 종이를 적시는 건 누구일까?

정답은, 컵이다. 아니, 컵 그 자체도 아니다.

컵 표면에 맺히는 작은 물방울들, 그것이 진짜 원인이다.

사람들은 "종이가 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이는 스스로 젖지 않는다.

종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가, 누군가로부터 젖는다.

그 누군가는 바로——응결된 물이다.

TRIZ에서 말하는 것처럼, 문제의 진짜 원인은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작동하는 기능’ 속에 숨어 있다.

컵 속에는 얼음이 있다. 얼음은 음료를 차갑게 유지시킨다.

차가운 음료는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부작용도 따라온다.

컵 바깥에는 공기가 있다. 그 안엔 수분이 있다.

그리고 공기의 온도는 컵보다 높다.

이 둘이 만나는 지점——바로 컵의 표면——에서, 작은 충돌이 일어난다.

그 충돌은 물리학 교과서에서는 '응결'이라 불리고, 우리의 손과 책상에서는 '축축함'으로 나타난다.

온도 차이가 크면, 컵 표면에 수증기가 맺힌다.

그리고 그 수증기는 이슬이 되고, 물방울이 되고, 천천히 아래로 흐른다.

그 물방울이 종이를 적신다.

그러니까 ‘종이 홀더가 젖는다’는 건, 사실 2차적 현상이다.

문제의 뿌리는 응결이고, 응결의 뿌리는 온도차이고, 온도차는 음료와 환경 사이의 긴장이다.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이렇다:

종이는 피해자다.

물방울은 가해자다.

온도차는 원인이다.

얼음과 공기는 구조다.


우리는 그 구조를 바꾸지 않고 종이만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종이라 해도, 물은 결국 길을 찾아 흐른다.

홀더는 단지 그 긴장의 마지막 피해자일 뿐이다.

그래서 종이홀더만 붙잡고 있으면, 문제는 늘 한 발 앞서 도망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진짜로 이해하려면 ‘종이’를 분석해서는 안 된다.

‘물방울’의 발생 조건을 분석해야 한다.

문제를 새롭게 보기 시작하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우리의 시선은 너무 자주, 결과에 머무른다.

하지만 TRIZ는 그 결과를 낳는 시스템 전체를 보라고 말한다.

나는 문득, 내가 종이가 아니라 물방울이 되고 싶어졌다고 느꼈다.

언제든 형태를 바꾸며 흘러가는, 그 작지만 집요한 존재.

그리고 곧 알게 되었다.

진짜 문제는, 종이가 젖는 게 아니라, 물이 거기까지 흘러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진짜 관찰은, 항상 조금 더 아래를 본다.


2. 접촉이 문제다


물방울이 종이를 적시는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바로 컵과 종이홀더가 맞닿아 있는 부분, 그 접촉면이었다.

그곳에서 물방울은 더는 흐르지 않고 머무르며 스며들었다.

가장 차갑고, 가장 습한 부분.

종이가 가장 먼저 젖는 자리.


그래, 결국 접촉이 문제다.

접촉면이 넓을수록 물이 닿을 기회는 많아지고, 닿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종이는 더 깊이 젖는다.

그렇다면, 단순한 발상 하나가 떠올랐다.


접촉을 줄이면 되지 않을까?

컵과 홀더 사이에 작은 틈을 두거나, 홀더가 컵을 '감싸는' 구조가 아니라,

아래쪽에서 '떠받치는' 구조라면?

종이와 컵이 서로 등을 지면,

서로를 젖게 만들 수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컵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은 더 이상 종이를 타고 흡수되지 않는다.

그 대신, 아래로 자유 낙하한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책상에 고이거나, 사람의 손이나 다리에 묻는다.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형태로 옮겨갔다.


TRIZ에서는 이런 현상을 종종 본다.

한 문제를 해결하면, 그 해결책이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이 된다.

이건 기술의 역설이자, 창의성의 무한 루프다.


“문제를 옮기는 것이지, 없애는 게 아니다.”


대표가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문제는 강물처럼 흐른다.

막으면 튄다.

길을 틀어주면 다른 곳에서 불어난다.


나는 순간 놀랐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그저 종이홀더가 젖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컵에서 출발해, 물방울을 지나, 그 물방울이 머무는 접촉면까지 사고를 밀고 내려왔다.

이 흐름은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책에서 본 공식도 아니었다.

그저 문제를 붙잡고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게 바라보았을 뿐인데, 내 안에서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만들어지는 경로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건 낯설고도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접촉을 줄이는 동시에, 물의 흐름을 제어해야 한다는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가 진화했다.

그리고 나도, 함께 진화해야 했다.


3. 기능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쯤 되니 문득 궁금해졌다.

컵, 얼음, 공기, 종이, 심지어 내 손까지—

이 모든 것들이 각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TRIZ에서 말하는 기능 분석은, 각 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살펴보는 일이다.

그 요소가 실제로 하는 일과, 우리가 기대하는 일 사이의 차이를 들춰내는 작업이다.

나는 머릿속에서 하나씩 항목을 적어내려갔다.


컵: 음료를 담는다. 시원함을 유지한다. 동시에 응결을 유도한다.

얼음: 온도를 낮춘다. 음료의 만족도를 높인다. 동시에 컵 표면에 물방울을 만든다.

공기: 외부 환경의 수분을 공급한다. 문제의 시작을 만든다.

종이 홀더: 손을 보호한다. 단열한다. 하지만 물을 흡수하며 손을 적신다.

손: 컵을 든다. 반응한다. 젖는 순간 불만을 생성한다.


기능은 중립적이지 않다.

하나의 기능은 어떤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또 어떤 상황에서는 문제를 만든다.

우리는 지금까지 종이를 탓했지만, 사실 종이는 자기를 지키려고 했던 것뿐이다.

물의 침투를 견디려 했고, 열을 차단하려 했고, 사용자의 손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기대한 기능은 '젖지 말 것'.

하지만 종이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그건 마치 바람을 막지 못하는 커튼을 탓하는 것과 같았다.

기능이 의도와 다르게 작동할 때, 우리는 그 기능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나는 종이홀더의 기능을 다시 썼다.

'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젖는 대신 사용자에게 젖음을 전달하지 않게 하는 것.'

그렇게 쓰자, 문제가 다시 보였다.

이건 단순한 기능 실패가 아니라, 기능의 오해였다.

그리고 오해가 쌓이면, 우리는 자꾸 틀린 질문을 하게 된다.

“종이를 바꿔야 할까?”가 아니라, “종이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이, 다시 나를 다음 단계로 데려갔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대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대표님, 기능 분석을 해봤어요.
문제의 흐름을 쫓다 보니 컵과 종이, 얼음과 공기까지 각각의 역할이 보여서요.”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기능들이 있었지?”


나는 메모해둔 내용을 보여주며 말했다.

“컵은 음료를 담고, 시원함을 유지하고, 응결을 유도해요. 얼음은 온도를 낮추고, 음료 만족도를 높이며, 물방울을 만들어내죠.
공기는 수분을 공급하면서 문제의 시작이 되고, 종이 홀더는 손을 보호하고 단열하지만 물을 흡수해요. 손은 컵을 들고, 젖는 순간 불만을 만들고요.”

대표는 잠시 조용히 내 말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 네 사고 흐름은 아주 훌륭해. 하지만 TRIZ에서 말하는 ‘기능’은 조금 달라.”

나는 순간 긴장했다. 어딘가 잘못된 걸까?

“먼저 컵부터 보자.
컵은 음료를 담는다. 여기까지는 맞아. 하지만 ‘시원함을 유지한다’는 건 기능이 아니라, 기능 수행의 결과야. 마치 창문이 ‘바깥 풍경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실제 기능은 ‘투과’하는 거지.”


“아… 그럼 ‘응결을 유도한다’는 건요?”


“그건 컵 혼자 하는 게 아니야. 컵 표면과 외부 공기 중 수분이 온도차와 함께 작용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지. 기능은 두 요소 간 상호작용의 결과일 뿐, 컵이 직접 수행하는 기능은 아니야.”


대표는 다시 얼음을 짚었다.


“얼음은 낮은 온도를 ‘유지’한다. 맞아.
하지만 ‘음료 만족도를 높인다’?
그건 인간의 해석이야. TRIZ의 기능은 감정이 아니라 물리적 작용에 집중하지.”


나는 메모를 다시 보며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공기는요? 외부 수분을 공급하니까 문제의 시작이라고…”


“공기는 그저 존재하는 매체일 뿐이야.
기능이라고 하긴 어려워. 그리고 종이 홀더, 손을 보호한다고 했지?
사실 손을 보호하려면 손에 직접 작용을 가해야 해. 지금은 그저 열을 막는 구조에 불과해.
종이 홀더의 진짜 기능은 컵과 손 사이의 열 전달을 ‘감소시키는 것’ 정도지.”


“손은 컵을 잡는다. 이건 맞아. 하지만 ‘불만을 생성한다’는 건… 그건 너의 기능이야.”


대표의 마지막 말에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는 기능을 ‘느낌’으로 정의하고 있었고, 대표는 기능을 ‘작용’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TRIZ에서 말하는 기능은 단순하다.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의 특성을 변경하거나 유지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또 한 걸음을 더 내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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