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 문제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자꾸 남아 있었다.
물방울은 멈췄는데,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회의실 한쪽에 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반쯤 남아 있었고, 컵의 아래쪽은 이미 축축했다.
그 축축함은 어쩐지 내 머릿속과 닮아 있었다.
대표가 말했다.
“그 문제, 다시 정리해볼까?”
나는 컵과 홀더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문제는... 표면이 닿아 있다는 거예요.”
“표면?”
“네. 종이 홀더는 컵과 밀착돼 있어요.
그래서 컵 표면의 냉기가 홀더로 전달되고, 응결된 물방울이 그대로 홀더로 스며들어요.
그 물은 다시 손으로, 책상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표면이 닿아 있어야 컵을 잡을 수 있죠.
하지만 닿아 있으면 안 돼요. 열도 물도, 다 전달되니까.
닿아야 하는데, 닿지 말아야 해요.”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건 완벽한 물리적 모순이야.
접촉해야 한다 /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중얼거렸다.
“닿아 있어야 잡을 수 있고, 닿지 않아야 젖지 않는다.”
이건 컵과 홀더의 기능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그리고 관계는 언제나 양면을 가진다.
붙을수록 전달되고, 멀어질수록 분리된다.
‘닿는 순간 전달된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지금의 모든 젖음과 얼룩을 낳았다.
컵은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한 게 아니라, 단지 가까이 있었을 뿐이다.
그 가까움이 문제였다.
나는 컵을 손에 들어 다시 바라보았다.
컵은 아무 말도 없었고, 홀더도 여전히 묵묵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지금 이 방에서 가장 복잡한 대화가 흐르고 있었다.
“닿아야 한다. 하지만 닿지 않아야 한다.”
이건 단지 물리적 특성의 충돌이 아니라, 설계자의 시선이 진입해야 할 틈이었다.
기술적 모순은 사라졌다.
이젠 한 대상이 정반대의 상태를 동시에 가져야 하는, 진짜 발명으로 이어지는 지점——물리적 모순이었다.
대표가 말했다.
“자, 이건 이제 발명가의 시간이다. 제한 없이 아이디어를 내보자.”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곧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단순히 ‘젖지 않게 하자’가 아니라,
‘닿아야 하면서 닿지 않게 하자’라는 말도 안 되는 문장을 해결할 방법들을 상상했다.
그 상상은 의외로 구체적이었다.
컵과 홀더가 전체 면으로 닿지 않고, 홀더 표면에 작은 돌기(엠보싱)를 만들어 점만 닿도록 하면 열전달과 수분 전달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건 마치 사람 손바닥 전체로 누르는 대신, 엄지와 검지 손톱 끝으로만 잡는 느낌이었다.
전달되는 면이 줄면, 이동되는 것도 줄어든다.
제작 비용 낮음
생산 라인 조정 최소
시각적 차별화도 가능
홀더 내부 표면을 빗금 형태의 미세 홈으로 만들면, 컵과의 접촉은 일부만 유지되고, 그 사이로 생긴 물방울이
아래쪽 홈을 따라 흐를 수 있다.
홀더 하단에는 작은 수분 저수 공간을 마련한다.
마치 빗물받이처럼, 물이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방식이다.
젖지 않게 막는 것이 아니라, 젖은 물이 머물지 않도록 도와주는 설계였다.
구조적으로 단순
손이 닿는 부분과 물이 고이는 부분이 분리됨
추가 재질 없이도 제작 가능
홀더와 컵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얇은 링 구조를 삽입한다.
홀더는 이 링에 닿아 고정되고, 링은 컵과 0.5~1mm 공기층을 만든다.
겉보기엔 닿아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공기 하나가 그 사이를 지키고 있다.
그 얇은 공기층이 열도, 수분도 막아주는 일종의 ‘침묵의 완충제’ 역할을 한다.
실제로 ‘닿아 있지만 닿지 않은’ 상태 유지
열전달/응결 방지 효과
재사용 가능한 중간 부품 가능성 있음
홀더를 컵보다 살짝 크게 설계해 평소에는 컵과 접촉하지 않도록 한다.
컵과 홀더 사이에는 0.5~1mm 정도의 틈이 있어 공기층이 형성되고, 열전달과 수분 전달을 자연스럽게 차단한다.
하지만 사용자가 컵을 잡는 순간, 손의 힘으로 홀더가 컵 표면을 눌러 밀착되도록 설계하면 된다.
즉, '잡을 때만 접촉이 일어나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TRIZ의 ‘시간 분리 원리’를 활용한 이 설계는, 마치 자동문이 사람의 접근을 감지해 열리듯, 손의 개입이 있을 때만 비로소 ‘접촉’이라는 기능이 작동하게 된다.
평상시엔 닿지 않아 열·수분 차단 (시간 분리 원리 적용)
사용 시에는 안정적 고정
구조는 단순하며, 기존 컵과의 호환성도 유지
이 설계는 TRIZ의 시간 분리 원리에 해당한다.
“하나의 요소가 서로 충돌되는 요구를 시간 차를 두고 수행하도록 분리한다.”
컵을 잡지 않을 때는 공기처럼 가볍고, 잡는 순간엔 손처럼 밀착되는 구조
문제는 여전히 컵에 있었지만, 해답은 시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마침내 우리 손끝에 닿아 있었다.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결론은?”
나는 노트에 한 줄을 써넣었다.
“컵과 홀더는 닿아 있어야 하지만, 닿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닿을지를 설계하는 일’을 한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팀원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가 다시 물었다.
“이 네 가지 중, 너라면 어떤 걸 고르겠어?”
나는 각 아이디어를 다시 떠올렸다.
기능적으로는 모두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결국엔 선택해야 했다.
“저는... 아이디어 4번, 시간 분리형 느슨한 홀더를 선택하겠습니다.”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나는 천천히 말했다.
“일단 구조가 단순합니다. 기존 생산 라인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도 적용 가능하고, 재질도 바꿀 필요 없어요.
사용자의 행동, 즉 ‘잡는 순간’에만 작동하기 때문에 에너지 낭비가 없고, 무엇보다도... 이 구조는 설계자의 철학이 보이는 구조입니다.”
“철학?”
“네. 문제를 없애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타이밍을 조절하는 방식이잖아요.
TRIZ에서 말하는 분리 원리 중에서도, 가장 사람다운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대표는 잠시 웃더니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정리하자.
문제는 끝난 게 아니라, 정의되었고, 이제 그 정의 위에 설계를 세우면 되는 거니까.”
팀원 하나가 물었다.
“그런데... 다른 아이디어들은요? 버리는 건가요?”
대표가 말했다.
“아이디어는 쓰기 위해 내는 게 아니라, 생각의 경로를 넓히기 위해 내는 거야.
우리가 지금 가는 길이 옳은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어딜 향해 가고 있는지는 분명해졌지.”
나는 노트를 덮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내 안에서,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형태가 아니라 태도였다.
그리고 이제, 그 태도는 설계를 향해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