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창문으로 들어온 문제

by 한유신

1. 보냉백 속 문제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늘 그렇듯 빠르게 도착했고, 겉포장은 멀쩡했다.

문제는 그 안에 있었다.

보냉백.

택배를 풀다가 박스를 놓쳐, 안에 고인 물이 바닥으로 흘러버렸다.


시원함을 지켜주려는 착한 의도가, 젖은 바닥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아이스팩은 제 역할을 다했지만, 그 대가로 내 현관 바닥이 젖었다.

물은 어디서든 문제를 남긴다. 안 생기면 목마르고, 생기면 축축하다.

내용물은 멀쩡했다. 신선한 두부, 생선과 고기, 과일들.

나는 그 물기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문제는 늘 안에서 나온다. 겉은 멀쩡했잖아.”

그 말이 내게는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겉보기엔 정상이지만, 속에 문제가 있다는 것.

그건 사람도, 시스템도, 그리고 포장도 다르지 않았다.

예전엔 그냥 짜증을 냈을 텐데, 이제는 젖은 자국 하나에도 흐름과 구조가 보인다.

물은 왜 흘렀을까?

어디서 흘렀을까?

그걸 막지 못한 건 누구였을까?


나는 물기를 닦고 나서야 박스 바닥을 봤다.

그 아래엔 젖은 명세서와 반쯤 녹은 아이스팩이 뭉툭하게 눌려 있었다.

‘이건 냉기와 물기를 모두 안고 사는 존재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냉백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했지만, 그 자체가 또 다른 문제를 만들고 있었다.


TRIZ에서 말하던 '2차 문제(Secondary Problem)'라는 말이 떠올랐다.

처음 문제를 막기 위해 만든 구조가, 결국은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낸다.

예전 같으면 불만으로 끝났겠지만, 이젠 보냉백 하나에도 내 안에서 질문이 자라났다.


왜 이건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이 문제는 어디에서 생긴 걸까?

그리고 진짜 문제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문제는 다시 돌아왔고, 이번엔 보냉백을 열고 나왔다.


2. 또 짐을 싸야 한다고?


“내일 아침 외근이야. 짐 챙겨.”

대표의 말은 짧았고 익숙했다.

그 말은 곧, ‘문제 속으로 직접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수도권 외곽의 한 건축 자재 회사였다.

현장 창고 옆 회의실에서 담당자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엔 창문이에요. 여닫기가 너무 불편하다는 민원이 많아요.

특히 고령자나 손힘이 약한 분들이 무거워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모터를 달면 어떨까요?”

담당자가 바로 반응했다.

“저희도 그건 생각해봤어요. 근데요, 전기 공급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제조 단가가 많이 올라가더라고요.

그리고 창틀 안에 모터 넣을 공간이 생각보다 안 나와요.

실제로 넣어보려다가 구조가 너무 복잡해져서 포기했어요.”

대표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군요. 일단 오늘은 이 정도 듣고 돌아가서 분석해 볼게요.

문제 구조를 조금 더 보고 나중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


창밖에는 도심의 창문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제가 너무 성급했죠.”

대표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대신 도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제를 듣자마자 아이디어를 내는 건 아니야.

문제를 들으면 누구나 아이디어를 낼 수 있지.

그러니까 문제를 듣고 생각나는 아이디어 3개는 버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왜요?”


“그런 아이디어는 이미 누군가 냈던 아이디어일 수 있어.

하지만 아직 적용되지 않고 문제가 남아 있다는 건, 적용할 수 없는 아이디어란 뜻이야.”

“다시 말해, 그 아이디어를 적용하려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지.

창문에 모터를 다는 것처럼 말이야.

모터를 달면 공간이 필요하고, 비용이 오르고, 원래 필요하지 않던 전기를 써야 하고,

유지보수 문제까지 따라오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문제를 듣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분석을 해서 진짜 문제를 찾는 거야.”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차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문제는 창문으로 들어왔다가, 지금은 창문에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채.

그건 단순한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여는 방식의 문제였다.

3. 아이디어가 먼저 달리는 이유


다음 날 회의실.

우리는 의뢰 내용을 공유하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대표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고, 팀원들의 눈빛은 이미 아이디어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창틀 안에 작은 가스 실린더를 넣는 건 어때요?”

“레버식 조작을 더 부드럽게 설계해보면…”

나는 손을 들었다.

“자석을 활용하면 어떨까요? 프레임에 자석을 심고, 창을 가까이 대면 자연스럽게 열리거나 닫히게—”


그때 대표가 조용히 손바닥을 테이블에 툭 내리쳤다.

“좋아. 아이디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야. 다들 좋은 생각 했어. 그런데…”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대표는 손을 깍지 낀 채, 천천히 말했다.


“문제를 듣자마자 나오는 아이디어는, 대부분 이미 누군가 해봤어.

그리고 그게 아직 적용되지 않았다는 건, 그 아이디어가 문제를 진짜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증거야.”

“그래서 난 항상 말하지. 문제를 듣고 떠오른 아이디어 세 개는 버려라.

그건 거의 반사에 가까운 반응일 뿐이야.

해결책 같아 보여도, 진짜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면 다 무용지물이야.”


누군가 낮게 물었다.

“그럼... 뭐부터 해야 하죠?”

대표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자, 너라면 뭐부터 하겠어?”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분석이요. 문제를 잘게 쪼개서, 진짜 문제를 찾아야 해요.”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린 해결하려고 모인 게 아니라, 보려고 모인 거야.

문제를 보면, 해결은 따라오게 돼 있어.”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대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창문을 열고 닫는 걸 단순화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대표는 스스로 대답했다.

“물건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거지.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바꾸는 것.

그런데 그 물건이 빌딩만큼 크다면?

아니면 쌀알처럼 작다면?”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0.00001초라면?

반대로 100년이라면?

그게 과연 똑같은 ‘이동’일까?”

회의실은 정적에 잠겼다.

“TRIZ에서는 이걸 DTC라고 해. Dimension, Time, Cost.

문제를 바라볼 때 ‘크기’, ‘시간’, ‘비용’이라는 세 가지 축을 바꿔서 보면

전혀 다른 해결 방식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지.

예를 들어, 크기를 줄이거나, 시간을 단축하거나, 비용 구조를 바꾸면 우리가 못 푼다고 생각했던 문제도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거야.”


나는 조용히 노트에 적었다.

‘문제의 본질은 동작이 아니라, 조건이다.’


아이디어는 잠시 멈췄고,

우리의 시선은 이제 문제라는 창을 천천히 열고 있었다.

4. 문제를 보는 연습


회의가 끝난 뒤, 나는 다시 창을 바라보았다.

그저 열고 닫는 사물이라 생각했던 창이이제는 사람과 물리, 힘과 구조, 시간과 조건이 교차하는 ‘문제의 장치’처럼 보였다.


우리가 받은 조건은 단순했다.


창은 쉽게 열리고 닫혀야 한다.

누구나 힘 들이지 않고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

구조는 단순해야 하고, 설치비는 많이 올라가선 안 된다.


나는 창을 구성 요소별로 쪼개 보기 시작했다.

프레임, 유리, 손잡이, 고정장치, 힌지, 경첩, 그리고 사람의 손.

창이 하는 기능은 단순하지만, 동시에 복합적이다.

빛을 들이고, 바람을 나가게 하고,소리를 막고, 온도를 차단하고,열리고 닫히며 사람을 안팎으로 연결한다.

그 다섯 가지 기능이 충돌 없이 작동해야 우리는 그것을 ‘좋은 창’이라 부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닫힘’과 ‘열림’이라는 단 하나의 기능조차 부드럽고 안전하게 구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종이에 커다란 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창을 구성하는 요소를 기능별로 적어 넣었다.


열림 → 해제 → 사람의 힘

닫힘 → 고정 → 마찰 또는 무게

이동 → 경첩 → 경로 제한

제어 → 손잡이 또는 스프링

그리고 그 중심에 한 단어를 썼다.

균형


결국 지금 문제는 열고 닫는 힘의 흐름이 사용자와 구조 사이에서 ‘어긋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대표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지금 이 창, 누가 먼저 움직여야 열릴까?”

대표는 내가 적어놓은 조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창은 쉽게 열리고 닫혀야 한다… 여기서 ‘쉽게’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이 열기 쉽게? 그런데 사람이 누구야?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기일 수도 있어. 아니면 창을 억지로 열려는 침입자일 수도 있겠지.”

대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조건을 정할 때는 단순하지가 않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해야 하지. 그래야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조건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단순하게 느껴졌던 문장이, 이제는 막연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다시 써보기로 했다.


창은 실내에 있는 사람이 열고 닫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평균 손힘, 가동 각도, 사용 빈도 등을 고려한 ‘쉽게’여야 한다.

구조는 현재와 비슷하거나, 약간의 부품이 추가되더라도 외관이 유지돼야 한다.

설치비와 제작 비용은 기존 제품 대비 10%를 넘지 않아야 한다.


조건을 다시 정리하니, 목표가 선명해졌다.

이제 문제는 단순한 열고 닫음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조건에서, 어떤 비용으로 열리고 닫히는가의 문제였다.


문제는 아직 열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문제의 구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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