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가벼운 창을 만들겠다는 착각

by 한유신

1. 도르래, 그려보다

나는 새 노트를 꺼내 첫 장에 조용히 단어 하나를 썼다.


도르래.


줄을 당기면 무거운 것이 움직인다.

어릴 적 커튼을 당기던 기억처럼.

당기는 건 아래 방향인데, 움직이는 건 옆이었다.

그건 단지 편리한 장치가 아니라, 힘의 흐름을 바꾸는 장치였다.


나는 선을 그었다.

창틀, 프레임, 롤러.

그 옆에 줄을 하나 그었다.


줄은 창 프레임에 고정되어 있었고, 바퀴 하나를 지나 다시 반대쪽으로 뻗어나갔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했다.

창문을 직접 미는 게 아니라, 줄을 당기면 도르래가 회전하고, 그 회전이 창을 옆으로 밀어주는 구조.

무게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내가 손으로 직접 미는 대신, 줄을 당기는 것이었다.

힘은 옆에서 밀리는 대신, 아래에서 끌어당겨 전달되는 구조.


대표가 그린 나의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좋은 시작이야.

이게 되면, 무게는 그대로 둔 채

사용자의 부담은 확실히 줄어들겠지.”

나는 덧붙였다.

“이건 무게를 없애는 게 아니라, 힘을 우회시키는 거예요.”

“그래,”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우회는, 사용자가 피로를 느끼는 구간을 건너뛴다는 뜻이기도 하지.”

나는 다시 도르래에 줄을 그었다.

종이 위의 선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게를 이기지 않고도 다루는 방법이 숨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단 하나의 선 위에 문제를 얹어보았다.

그 선이, 구조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그 물음이, 드디어 현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 자원이 부족한 게 아니라, 조건이 많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팀원들 앞에 조심스럽게 노트를 펼쳤다.

“이게 어제 제가 생각해본 구조예요.”

나는 종이에 그린 선을 따라가며 설명했다.

“창틀의 양 옆에 작은 도르래를 달고, 창과 연결된 줄을 아래로 당기면 창이 옆으로 움직입니다.”

말을 마치자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누군가 말했다.

“그거... 커튼 같은 거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원리는 단순하지만, 사용자는 무거운 창을 직접 밀지 않아도 돼요.

줄만 당기면 되니까요.”

또 다른 팀원이 말했다.


“그럼 창문이 위에서 줄로 매달려 있는 구조예요?”

“아뇨, 바닥은 기존 레일을 유지하고,

추가로 줄이 힘을 전달하도록 설계하는 거예요.”


대표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줄이 끊어지면?”

“예... 보완이 필요하죠.”

“줄이 밖으로 보이면?”

“디자인적으로 고민해야죠.”

나는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설명할수록 문제는 더 많아졌다.

줄을 어디에 숨길 것인가.

도르래는 어느 쪽에 설치해야 하는가.

기존 창틀에 여유 공간이 있는가.

생산 단가는 얼마나 올라갈 것인가.

회의실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내 아이디어가 점점 작아지는 걸 느꼈다.

처음엔 선 하나였고, 그 다음엔 손의 부담을 덜어주는 구조였고,

지금은… 예산과 공간, 유지보수, 심미성의 문제로 둘러싸인 장치였다.


대표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좋은 구조는 많아.

근데 조건이 많은 곳에선, 좋은 구조보다, 조건에 맞는 구조가 더 오래 살아남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자원이 부족한 게 아니라, 조건이 너무 많았던 거군요.”


3. 작게 만들어서 크게 움직여보다


나는 그날 저녁, 회사 구석 자투리 탕비실에서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종이 박스, 클립, 고무줄, 그리고 회의실에서 주운 유성펜 뚜껑 두 개.

누가 봐도 장난 같았지만, 나에겐 아이디어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이었다.

나는 펜 뚜껑을 축으로 삼아 고무줄을 감고, 박스에 종이를 덧댄 창틀 모형을 올렸다.

줄을 당기자 펜 뚜껑이 굴러가고, 종이로 만든 창이 조금씩 옆으로 움직였다.

정말 움직였다.

무게는 종이 한 장 무게였지만, 원리는 똑같았다.

줄을 당기면 창이 옆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나는 작은 숨을 쉬고, 다시 줄을 당겼다.

더 부드럽게 움직였다.

힘은 크게 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로도 당길 수 있었다.

“됐어...”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그건 사실 팀 전체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팀원 몇 명이 와서 구경했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이거 진짜 되네요.”

“여기다 진짜 창문만 올리면 되는 거 아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진짜 창문이 100kg이라는 것만 빼면요.”

모두 웃었지만, 그 말은 농담만은 아니었다.


종이 창은 움직였지만, 진짜 창은 무게, 마찰, 마감, 법규, 비용이라는 진짜 문제를 통과해야 움직일 수 있었다.

대표는 뒤늦게 와서 실험을 지켜보다 말했다.

“움직이는 걸 보여준 건 잘했어.

이제 중요한 건, 어디까지 현실이 기다려줄지를 보는 거지.”

그 말은, 단순한 프로토타입과 실제 적용 사이의 거리를 뜻했다.

나는 창을 다시 한 번 당겼다.

고무줄은 여전히 탄성을 유지했고, 작은 종이 창은 가볍게 옆으로 흘렀다.

그 흐름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힘은 바뀌지 않았다.

단지 길이 달라졌을 뿐이다.


4. 현실은 구조보다 빠르게 반박한다


다음 날 아침, 대표는 프로토타입 사진을 출력해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을 회의실 중앙에 올려두고 말했다.

“좋아. 이제 이걸 실제 창에 붙인다고 가정해보자.

문제는 뭐가 있을까?”

팀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줄이 외부에 노출돼서, 미관상 보기 안 좋습니다.”

다른 팀원은 말했다.

“줄이 끊어지면 창이 그냥 떨어질 수도 있겠네요.

추락 방지 장치는 추가해야 할 것 같아요.”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이트보드에 적기 시작했다.


미관

안전

설치 공간

유지보수

소음

원가 상승


나는 앉은 채로 조용히 그 리스트를 바라봤다.

그 하나하나가 아이디어를 조각내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대표가 말했다.

“이걸 설치하려면, 기존 창틀을 거의 다 갈아야 할 수도 있어.”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럼 리모델링급인데요…”

회의실이 무거워졌다.


프로토타입은 움직였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표는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네 아이디어, 구조는 좋아.

정말 잘 설계됐어.

하지만…”

나는 그 ‘하지만’을 미리 알고 있었다.


“구조는 이상적이야.

근데 지금 우리가 상대하는 건 이상성이 아니라, 시장성과 시공성, 그리고 소비자 반응이야.”

그 말은 내 아이디어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아직 ‘덜 맞췄다’는 뜻이었다.

나는 노트에 다시 정리했다.

구조는 가능하다.

현실은 복잡하다.

우리가 필요한 건

이상과 현실 사이를 이어줄 무언가다.

그 무언가는 도르래가 아닐 수도 있었다.

혹은 도르래의 형태를 다시 그려야 할지도 몰랐다.

내가 만든 구조는 문제를 ‘이론적으로는’ 풀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아직 문밖에 서 있었다.

창은 움직였지만, 현실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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