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시스템이 말을 걸다 - 4

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by 한유신

1부 · 4장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오전 내내 메신저 창엔 파란 말풍선만 떠다녔다.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형용사와 감탄사는 사라졌고, 대화 시간은 평균 17초로 줄었다.
왔다 갔다 하는 건 계산서처럼 깔끔한 알림뿐이었다.
서진의 A-TAG 워치는 그래프를 감시하듯 손목을 죄었다.

집중 지수 51 — 창의 활동 권장.

하지만 ‘창의 활동’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림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점심이 끝난 뒤, 서진은 3층 휴게실 문턱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곳은 히트맵상 ‘정서 소모 구역’ 으로 분류된 장소였다.
그래도 오늘은 뭔가를 쓰고 싶었다.
가벼운 커피 잔을 내려놓고, 잉크 냄새가 스민 작은 메모지를 펼쳤다.

사람들은 점점 말을 지운다
그래프는 예뻐지고 마음은 남는 법을 잊는다

문장을 한 줄 더 잇고 싶었지만, 워치 화면이 붉게 번쩍였다.
“스트레스 지수 상승 — 자리 복귀 권장.”
서진은 펜 끝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카메라는 없었지만, 위치 로그가 이 시간을 기록하고 있을 터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다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 센서가 닿지 않는 구석.
낮은 창문 틈새로 겨울 햇살이 기울어졌다.
가로등처럼 서서히 누렇게 변하는 빛 속에서 서진은 다시 펜을 들었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잉크가 종이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 순간 워치가 또 진동했다.

“비공식 단독 활동 — 5분 경과.”

알림은 차갑고 공정했다.
그는 알림을 밀어 두었다.
펜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누군가 옥상 문을 열었다.


이안이었다.
서진은 급히 종이를 뒤집었지만 잉크가 완전히 마르지 않아 단어 하나가 손끝에 묻어 번졌다.
이안은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 뒤 계단 끝 그림자에 기대 섰다.
두 사람의 워치가 서로의 신호를 잡았다.
경고 알림이 아닌, 근접 인증 진동—“동선 겹침”.

“여기, 히트맵 빨간 구역인데요.”
이안이 조용히 말했다.
“알아요.” 서진은 숨을 고르고 종이를 접었다.
“빨간 구역이라도, 숨은 곳은 있어야 하잖아요.”

이안은 작게 웃었다.
웃음이 그래프에 반영되면 협업지수가 떨어질 텐데,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뭘 쓰셨어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서진은 접은 종이를 흔들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더 묻지 않았다.
둘 다 알았다—워치가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날 저녁, 시스템 브리핑을 준비하던 정재만 부장은 대시보드에 생긴 작은 빨간 점 하나를 발견했다.

옥상 14분.
심박 상승, 말수 0, 단독 활동.
“비공식 감정 활동.”

AIVA는 라벨을 그렇게 붙였다.
정재만은 마우스를 내려놓고 잠시 창밖을 보았다.
해가 완전히 기울어 야경이 깔릴 무렵, 그의 워치도 짧게 떨렸다.

“정서 지수 급강하 — 휴식 권장.”

그는 알림을 끄고 화면을 뒤집었다.
창문 저편, 도시의 불빛은 일정한 간격으로 반짝였지만 그 불빛 사이사이를 떠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이름 없는 파동을 그렸다.

서진의 손끝에 번져 있던 잉크 자국처럼,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조용히 종이 밖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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