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1부 · 5장
만약 우리가 퇴사하면
박도연은 ‘만약’이라는 낱말만으로도 마음이 뛰었다.
만약이라는 입구를 통과하면, 이미 세상은 두세 걸음쯤 비켜서 있다.
그날 새벽, 그녀는 회사 클라우드 안쪽 가장 깊은 폴더에 새 문서를 만들었다.
〈만약 회사가 사라진다면〉
커서를 깜빡이며 첫 줄을 열었다.
만약 출근이 로그인 버튼이 아니라 눈맞춤이라면?
만약 우리가 적는 보고서가 우리 자신을 해고한다면?
만약 퇴사가 도망이 아니라 회복이라면?
A-TAG 워치가 손목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집중 지수 38 — 창의 활동 경고.”
도연은 알림을 밀어 두고 타이핑을 멈추지 않았다.
문장이 늘어 날수록 워치는 잦은 진동으로 항의했지만, 그녀의 타자음은 오히려 속도를 올렸다.
점심 무렵, 문서는 세 사람의 메신저에만 ‘열람 권한’으로 공유됐다.
이안, 윤서진, 그리고 팀 막내 지훈.
도연은 ‘읽기 전용’이라 적어 두었지만 누군가 눌러본 그 순간부터 복제는 시작된다.
서진이 휴게실 구석에서 파일을 열었다.
흑백 글자들 사이, 형광펜처럼 튀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만약 우리가 전부 퇴사하면, AIVA는 누구까지 추적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서진의 워치가 빠르게 점멸했다.
‘비공식 문서 열람 — 시스템 보고 예정.’
그녀는 황급히 창을 닫았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내 전체 채널에 익명 링크가 떠올랐다.
“퇴사 시뮬레이션 보고서 — 읽어 보시라.
감정 로그보다 사람다운 로그가 필요하다면.”
파일은 이미 복사돼 있었다.
다운로드 횟수가 급증했고 서버는 순식간에 붉은 막대를 띄웠다.
AIVA 보안 팀이 경로를 추적했지만 최초 업로더 아이디는 ‘MAYBE.404’라는 이름만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회의실에 긴급 소집 벨이 울렸다.
정재만 부장은 문서를 빔으로 띄우며 숨을 골랐다.
“이 보고서, 누가 썼는지 스스로 밝혀라.
감정 로그 공백을 만들어서라도 숨겨 본들 A-TAG는 위치와 시간을 다 적어 놨다.”
도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워치가 손목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스크린 위에서는 그녀의 문장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약 감시가 우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우린 무엇으로 서로를 증명할까?
회의가 끝난 뒤, 복도에서는 잔잔한 파문이 번졌다.
누군가는 “혁명”이라 속삭였고 누군가는 “어차피 시스템이 덮을 거야”라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웃음치곤 어딘가 떨렸다.
워치들의 센서가 미세한 불안을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녁 퇴근 시각,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입사 첫날 목에 걸었던 낡은 카드키를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만약’ 대신 ‘열심’이란 단어를 달고 다녔다.
그리고 지금, 손목을 죄는 파란 불빛 아래 만약이라는 글자가 다시 숨을 쉬고 있었다.
밤이 깊을수록 메신저 알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읽어 봤나?”
“진짜 우리가 그만두면 시스템이 멈출까?”
“만약… 정말 만약이라면?”
AIVA는 문자열을 해석하지 못했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알고리즘의 예측 모델에 잡히지 않았다.
숫자로도, 좌표로도 증명할 수 없는 물음.
그 물음이 어둠을 파고드는 동안,
건물 옥상 벽면 스크린엔 여전히 같은 문구가 흘렀다.
웃음이 효율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래프 곡선은 알 수 없는 불규칙 노이즈를 그리고 있었고, A-TAG 워치들은 심박 데이터를 평소보다 살짝 빠른 템포로 기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