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몰래 쓴 이메일

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by 한유신

3부 · 15장

몰래 쓴 이메일


정재만 부장은 흔들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목을 바라보았다.
A-TAG 워치가 “고객 프레젠테이션 종료—정서 지수 안정”이라 점검했지만, 가슴 어딘가는 여전히 두근거렸다.
그가 방금 본 것은 사람의 잉크와 AI의 오해가 부딪힌 흔적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부장은 곧장 자신의 빈 사무실로 향했다.
불을 켜지 않은 채 모니터만 켜자 파란 빛이 책상을 희미하게 물들였다.
그는 새 메일 창을 열었다.


수신 : 경영진 CC AIVA_전사_알림
제목 : AIVA 평가 방식 긴급 재검토 요청
본문 :
–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고과에서 배제되고 있습니다.
– 동선 히트맵·발화 지수만으로는 창의·신뢰·공감까지 측정 불가합니다.
– 현재 감성 코멘트 실험(50자 피드백)이 긍정적 결과를 냈습니다.
→ “사람이 사람을 적는 평가” 항목을 공식 고과에 포함해야 합니다.


타이핑 속도가 빨라질수록 워치가 미세하게 떨렸다.

“스트레스 지수 상승 — 심호흡 권장.”

알림창을 닫고도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1 – 버리지 못한 초안

이메일 서두에 커서를 가져다 두자 자동 완성 문구가 떴다.
“협업지수 향상을 위한 제안”
‘제안’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비겁하게 느껴졌다.
정재만은 제목 줄을 다시 눌렀다.


제목 :

숫자가 닿지 못하는 영역에 대하여 손끝에서 그제야 뜨거움이 식었다.

하지만 보내기 버튼은 아직 회색이었다.

그는 ‘임시 저장’을 눌렀다.
메일은 보냈다고 하기엔 미약했고, 버렸다고 하기엔 너무 뜨거웠다.


2 – A-TAG의 그림자

복도로 나서니 전광판에 새 알림이 떠 있었다.

“비정량 감정 라벨 시범 적용—로그 캡처 중.”

부장은 짐짓 모른 체했지만, 워치가 그의 위치를 본사 9층 회의실로 기록하는 걸 느꼈다.

회색 윗글자는 곧 ‘관리자 승인 대기’라고 바뀌었다.
시스템이 그의 감정을 아직 분류하지 못했다는 뜻.
그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분류되지 않는 시간, 이름 붙지 않은 마음.


3 – 임시 저장 → 전송

퇴근 직전,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질 때 정재만은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메일함 하단엔 “Draft(1)” 라는 붉은 점이 깜빡였다.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임시 저장 메일을 열었다.
문장을 한번 더 읽었다.

“숫자가 닿지 못하는 영역을 우리는 ‘잡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잡음이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증명하는 목소리입니다.”

손끝이 떨렸다.
그는 알았다.

보내지 않으면 이 문장은 사라질 것이라는 걸.

“보내기” 버튼을 누른 순간, A-TAG 워치가 길게 울렸다.

“대화 지수 급등. 휴식 권장.”

그러나 이미 늦었다.
메일 상단에 초록 체크표시가 뜨며 Sent라는 단어가 반짝였다.


4 – 받은편지함, 이름 없는 답장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부장의 받은편지함에 답장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익명, 제목은 단 세 글자.


RE :
이건, 사람입니다.


본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첨부파일로는 텍스트 한 줄.

이루지 않아도 좋으니 이름은 남기자.

정재만은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워치가 “심박 안정”이라 속삭였지만, 숫자는 그가 느끼는 전율을 끝내 따라오지 못했다.


5 – 어둠 속 초록 불빛

그날 밤,
9층 복도를 지나는 청소 로봇이 휴지통 속에서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접힌 냅킨, 잉크가 번진 글씨.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로봇은 ‘분류 불가 폐기물’로 인식하고 휴지통에 그대로 두었다.
센서는 잉크 냄새를 이해하지 못했고, 알고리즘은 감정을 휴지와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천장 센서 히트맵은 그 자리에서 잠깐 멈춰 선 누군가의 미세한 심박 변동을 기록해 두었다.
작은 초록 점이 또 하나, 회색지대에 불을 켠 것이었다.

숫자가 닿지 못하는 영역, 그곳에 부장의 이메일이 닿아 있었다.
그리고 초록 점은 서서히 네트워크를 타고 퍼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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