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감정 피드백 제안서

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by 한유신

4부 · 16장

감정 피드백 제안서

비는 오지 않았지만 유리창에는 잿빛 물결이 흘렀다.
A-TAG 워치가 감지한 기압 변화가 ‘우울 소지’ 알림을 띄우는 아침,
경영진 회의실에 사람보다 서류가 먼저 도착했다.

표지는 흰색이었고, 제목은 단순했다.

〈감정 피드백 제안서〉

그 밑에 아주 짧은 부제.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 회의실, 이름 없는 파문

개발팀장이 제안서를 읽어 내려갈 때 빔 화면엔 낯선 구조가 비쳤다.

“동료 한 명당 50자 이내의 감성 코멘트 입력”

“서술어·형용사 필터링 해제”

“평균치가 아닌, ‘남은 문장’ 자체를 로그화”


지표 대신 문장이라니.
집계 대신 잔향이라니.

누군가 기침처럼 웃었다.
“문장이 고과가 되면, 객관성은 어디로 갑니까?”

정재만 부장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객관성은 숫자 속에 숨을 곳을 찾았지만, 사람은 숨을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벽시계 초침이 한 칸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 첫 문장, 첫 진동

점심 직후, 시범 기능이 열렸다.
모니터 구석에 초록색 창이 작게 깜빡였다.

“동료에게 50자를 남겨 주세요.
(오늘 하루, 단 세 줄만 허용됩니다.)”

윤서진은 한 줄을 적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말이 줄어도 마음이 남는다.”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워치가 흔들렸다.

“알 수 없는 어휘: ‘마음.’ 재학습 대기.”

그녀는 웃고 알림을 닫았다.

이안에게도 동일한 창이 떴다.
커서 앞에서 잠시 망설인 뒤, 그는 키보드를 눌렀다.

“숫자를 멈추게 한 잉크 냄새.”

엔터.
창이 초록으로 물들었다.
AIVA는 두 문장을 ‘의미 불분명’이라 회색 태그로 묶었다.

그러나 그래프 한쪽이 분홍빛으로 아주 살짝 출렁였다.
정확도 0.4%, 하지만 오차보다 아름다웠다.


― 반대와 균열

퇴근 전에 열린 간담회에서 몇몇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감정 코멘트가 익명이라면,
왜곡과 비난이 난무할 겁니다.”

개발팀장은 슬라이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엔 이 문장만 적혀 있었다.

문장이 흉기가 되지 않으려면 쓰는 사람이 손끝을 조심해야 한다.

서진이 손을 들었다.
“흉기가 될까 두려워 봉인하면,
우리는 칼도 펜도 못 씁니다.”

이안이 덧붙였다.
“감정을 막을 필터보다 감정을 배우는 로그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숨소리를 길게 내쉬었고, 누군가는 주먹만큼 쥔 손을 풀었다.


― 첫날 보고서

밤 열한 시,
대시보드에는 새로운 색이 떠 있었다.
회색 공백 위로 연분홍 점 37개가 반짝였다.

“감성 코멘트 수집률 18 %”
“정서 신뢰도 보정치 +2 %”
“분류 불가 어휘 71개”

숫자는 여전히 앞줄에 서 있었지만, 그 뒤에서 문장들이 낮은 목소리로 웅성댔다.
이안은 모니터를 닫고 불을 껐다.

사무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렴풋이 웃고 있었다.
워치가 작은 진동과 함께 속삭였다.

“출근 상태 유지.
감정 로그 — 회색지대 확대.”

창밖 도시는 파란 불빛으로 덮여 있었지만 그 파란 틈 틈마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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