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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세호 Nov 03. 2018

쪼리

쪼리

  2017년 여름, 제주도 여행의 시작은 쏟아지던 비를 뚫고 용산역으로 향하던 억척스러운 행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닥따닥’ 옥탑방 슬레이트 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빗소리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분노한 카피라이터의 키보드 소리 같았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겁에 질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10분쯤 치열한 내적 갈등을 끝내고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남색 우산을 들고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자 누가 잡아챈 것처럼 강하게 '쿵' 소리를 내며 문이 저절로 열렸다. 밖은 돌풍을 동반한 폭우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11년 만에 가을을 맞이한 한화 팬들의 성난 파도타기 응원처럼 거센 물결이 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칠해진 옥상 바닥에 일렁이고 있었다. 한차례 용기를 머금은 들숨을 들이켜고 우산을 펴고 밖으로 억척스럽게 뛰어들었다.


  빗속으로 뛰어든 이유는 제주도에 가기 전 쪼리를 사야 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준비도 없이 떠난 제주도에서 신고 온 리복 러닝화가 해변에 들어가기 불편하고 어딘가 휴양지에 어울리지 않았다. 임시방편으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오천 원짜리 쪼리를 샀다. 휴지통 앞에서 비닐포장지를 뜯고 엄지와 검지 사이로 쪼리를 욱여넣었다. 작은 종이 달려 딸랑거리는 편의점 문을 열고 나와 보도블록을 몇 발자국 걸었을까, 우지직 소리를 내며 쪼리가 끊어졌다. 휴지통부터 보도블록까지 그건 정말 찰나의 순간의 끊어짐이 분명했다. 편의점 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가 미세하게 귓가에서 여전히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유를 찾기 위해 끊어진 쪼리를 부검하듯 샅샅이 살펴봤다. ‘지익’하고 무엇인가 쪼리와 보도블록 사이에서 늘어났다. 껌이었다. 누군가 질겅질겅 씹다 뱉어버린 단물이 빠지고 고약한 양심이 묻어 검게 변해버린 지독한 껌이었다. 껌에도 화가 났지만 이제 막 비닐에서 나와 몇 걸음 만에 끊어져 버린 나약한 쪼리에 더 부아가 났다. 오천 원이 아까워 버리진 못하고 응급처치로 쪼리를 봉합해 신고 다녔다. 쪼리는 다니는 내내 존재감을 뽐냈는데 족히 50번은 끊어지고 수습하기를 반복했다. 그해 제주여행은 즐거웠지만 유일한 오점 하나가 쪼리였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모든 기억을 행복으로 채우기 위해 용산역으로 튼실한 쪼리를 구매하러 갔다.


  605번 버스를 타고 용산에 도착하니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빨리 쪼리를 사고 집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애당초 오래 걸릴 일도 없었다. 이미 H&M에서 사겠다고 결정하고 왔기 때문이다. 주머니 사정을 고려했을 때 적당한 브랜드였고 버캔스탁과 그와 비슷한 디자인을 신는 무리에 포함되고 싶지 않았다. H&M은 나에게 유니클로와 무인양품 사이에 포지셔닝되는데, 유니클로는 실용적이지만 보편적이고, 무인양품은 심플하지만 밋밋하다. H&M은 실용적이고 심플하며 지나치게 보편적이거나 밋밋하지도 않다. 사람으로 표현하자면 언제나 15분 일찍 출근하는 성실함을 갖춘, 잘 다려진 흰 셔츠와 갈색 면바지를 입는, 서류를 집기 위해 구부렸을 때 우연히 비친 속옷의 무늬가 타탄 체크인, 절제되면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거기에 가격도 실용적이니 편안함까지 갖춘 사람의 느낌이다.


  8월의 H&M 매장은 가을을 맞을 준비가 한창이었다. 카디건 같은 환절기 의상들 사이를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여름 특가상품’이라 적혀 구석에 정리되어있는 쪼리가 보였다. 삼만 몇천 원에 사선이 그어지고 칠천 원으로 가격표가 붙여진 쪼리에 눈이 갔다. 가격이 족히 사만 원에 넘실거리는 쪼리를 칠천 원에 살 수 있다니 마법 같은 일이었다. 쪼리의 바탕은 짙은 남색, 끈의 색은 양쪽으로 하늘색이고 가운데 하얀색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헤링본 체크 격자무늬 패턴이 새겨져 있었다. 짙은 남색은 함덕해변, 헤링본 체크무늬는 출렁이는 파도 같았다. 제주도 그 자체를 담고 있었다. 직원에게 만원을 내고도 삼천 원이나 거슬러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아 남은 돈으로 산 초록색 코끼리 맥주를 홀짝였다. 고개를 돌리니 열린 문틈으로 현관에 놓인 쪼리가 보였다. 분명 내일 떠날 제주도는 즐거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도착한 제주는 쪼리를 제외하고 모든 게 엉망이었다. 인연이라는 수필이 떠올랐다. 피천득 선생님이 3번째 일본을 후회하듯 나 역시 3번째 방문한 제주의 게스트 하우스가 후회됐다. 무모한 용기와 적정선을 모르는 욕정에 사로잡힌 젊은 남자, 겨우 찾아낸 군대 자부심을 연신 내뱉는 아저씨, 주사가 지독한 다수의 사람 지난번 좋은 기억이 있던 게스트 하우스가 맞나 싶었다. 눈치를 보다 친구들에게 근처에 있는 양꼬치 집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숨죽이며 조용히 빠져나가는 와중에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여자가 보였다. 노골적인 추파와 지루한 농담들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작을 하며 술을 들이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밤 궁금했던 그 여자에 옆자리에 앉았다. 흐릿하던 첫인상과 달리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는 어깨까지 오는 조금 긴 단발에 큰 앞니와 조금 튀어나온 입, 동그란 눈과 적당히 짙은 눈썹, 전체적으로 부를 땐 관심 없고 간식을 꺼낼 때만 ‘야옹’ 거리며 몸을 비비는 얄미운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외모였다. 나는 옆에 앉아 어떤 문장으로 첫 대화를 해야 할지 신중하게 대화 매뉴얼을 떠올리고 있었다.


“ 한라산은 백록담보다 진달래대피소에서 사발면만 먹고 오는 게 더 기억에 남아요”
“밥 한 수저에 잔 멸치볶음이라면 7~8마리 정도가 이상적인 짭짤함을 느끼게 해 줘요”
“ 저는 염소가 싫어요. 직사각형 눈동자가 어딘가 꺼림칙해요”

떠오르는 매뉴얼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 와중에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문장으로 그녀가 대화를 신청했다.


“ 그 쪼리 H&M에서 사셨나 봐요?”

  그보다 완벽한 첫 대화 문장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듣는 순간 모든 관심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입으로 기쁨과 놀라움을 표현했다.


“세일해서 칠천 원”

  적절히 당혹감도 줄지 아는 그녀였다.


  H&M 디자인 팀에서 근무하고 있어 한눈에 내 쪼리를 알아봤다고 했다. 이 무슨 우연이란 말인가? 눈을 연신 비비며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눈을 비비고 볼을 꼬집지 않아도 방금 들이킨 한라산 소주의 씁쓸함이 입안에서 느껴졌으므로 현실이 분명했다. 어제 남자 무리에 둘러싸여 혼자 술 먹는 걸 봤고,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했고 체대를 나왔다고 했다. 어제 그 무리에서 버티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밖에도 장거리 연애를 했고 ‘out of sight. Out of mind’ 법칙에 의해 헤어졌지만 좋은 기억이라고 말했다. 나는 서울에 사니 우리가 만나면 단거리이며 좋은 기억도 줄 수 있다고 말했고 서로 웃었다. 그리고 얼마간 끊어지지 않는 ‘대화의 희열’ 시간을 가졌다.


  요란한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 패거리들이 우리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착한 나의 친구들이 양옆에서 그들이 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지만 결국 지난번 쪼리에 붙은 고약한 껌처럼 달라붙어 그녀와의 즐겁던 술자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취객들의 난동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결국 그날 밤이 지나갔다. 이른 아침 눈이 떠져 평상으로 갔다. 어제 그녀가 짐을 들고 평상 앞에 서 있었다. 공항으로 가려던 참이었다고 말했다. 연락처를 물어보려 했지만,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 끊어진 분위기는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어딘가 어제의 그녀와 다른 사람 같았다. 특가로 칠천 원에 구매한 쪼리에 마법이 효력을 다한 것이다. 4만 원에 샀다면 분명 연락처를 물었겠지만 칠천 원에 연락처를 교환하는 마법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더 이상 고양이를 닮은 그녀에게 줄 흥미로운 간식이 없으니 서로 볼일이 없었다. 그렇게 그녀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제주도에서 노량진의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했다. 의자에 앉아 초록색 코끼리 맥주를 홀짝였다. 고개를 돌리니 열린 문틈으로 현관에 놓인 쪼리가 보였다. 웃음이 나왔다. 그해 여름 강렬했던 제주의 기억은 쏟아지던 비를 뚫고 용산역으로 향하던 억척스러운 행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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