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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세호 Feb 10. 2019

이별택시

이별택시


  왼쪽 손목에 찬 '카시오 데이터뱅크'의 우레탄 시곗줄을 오른손 엄지로 연신 쓰다듬었다. 디지털 숫자로 pm 11시 20분이라 표시되어 있다. 시간이 더디게 갈 리 없지만 잠시라도 붙잡고 싶었다. 지금은 7호선 학동역, 고속터미널역까지 대략 5분 뒤면 도착한다. 역부터 서둘러 달린다면 10분 뒤 출발하는 안성행 막차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 막차에 쫓기는 위태로운 상황이 싫었다. 오늘은 분명 평소보다 소주 한 잔쯤 덜 먹고 일어났다.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왜 막차에 쫓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역에 도착해 스크린도어가 열리자마자 ‘경부선 출구’를 향해 달렸다. 표지판을 따라 계단을 오르고 에스컬레이터 끝에 보이는 밤하늘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출구에 도착해 고개를 숙여 가쁜 숨을 고르고 이내 얼굴을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다박다박 터미널 건물에 붙은 간판 불빛, 흡연구역 정자에서 피어 나는 담배 연기. 광장을 점거한 비둘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아스팔트 주차장, 정차된 자동차, 적막하고 생경한 장소가 눈에 보였다. 젠장 이곳은 ‘사평로’ 출구다. 7호선에서 내려 ‘경부선 출구’를 따라가면 매번 ‘사평로 출구’로 나온다. 분명 터미널 역의 구조상 문제가 있다. 시간을 확인하니 11시 29분이었다. 버스를 타기엔 늦은 시간이다. 술자리에 두고 온 소주 탓인지, 쓰다듬은 시계 탓인지 비틀거리지도 않는 멀쩡한 다리가 터미널을 향해 더디게 움직였다.


  평균대 위 체조선수처럼 아스팔트 도로 가장자리에 칠해진 하얀 표시선을 따라 힘없이 걸었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봤다. 신세계백화점 건물 왼편, 직원들만 사용하는 듯한 작은 문(관계자 외 출입금지라 쓰여있었다) 앞에 젊은 연인이 있었다. 남자는 제법 큰 키, 다부진 체격, 스포티한 차림에 검은색 파카를 입고 있었다. 여자는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 남자와 비슷한 어두운 계열의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오버코트 차림이었다. 빨간 목도리를 하고 있어 어두운 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그들도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나와 마주친 남자의 시선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마도 명절이 그 둘을 당분간 떨어지게 했고, 둘 중 누군가 떠나는 연인을 배웅하러 터미널까지 온 것 같았다. 그냥 헤어지기엔 긴 연휴기간 마음이 헛헛해, 본가에서 입술의 감촉을 기억하며 그리움을 달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둡고 인적 없는 이곳을 겨우 찾아냈고, 입을 맞추려는 중요한 순간 길 잃은 내가 훼방을 놓은 상황 같았다. 평소라면 뒤통수를 긁적이며 “이거 길을 잘못 들었네”라고 혼잣말처럼 결례에 대해 사과를 했을 것이다. 그러곤 조용하고 기민한 움직임으로 자리를 떠났겠지만 지금의 지친 심신으로 무리였다. 그저 시선을 거두고 속도를 내 터미널로 향하는 게 최선의 배려였다. 그들을 뒤로하고 걸었지만 청각은 남겨두고 왔다. 입술의 접촉음이나 작은 속삭임도 들리지 않아 미안했다.


  터미널에 도착했다. 31번 게이트에 안성행 막차는 보이지 않았다. 서운함을 뒤로하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가로로 4명이 앉을 수 있고, 세로로 10줄 정도 갖춰진 주황색 간이의자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어디론가 전화하는 사람, 핸드폰으로 검색하는 사람, 고개 숙인 사람 각자 절망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이 다를 뿐 버스를 놓친 처지는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가장 끝줄 바깥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침까지 기다려 6시 첫차를 타도 7시에 지내는 차례에 참여하기 힘들다. 할머니가 집요하게 나를 찾을 테고 엄마는 화가 날 것이며 아빠는 서운할 것이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청력검사를 하듯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검사용 말발굽 모양 트라이앵글을 귀에 가져다 댄 것 같았다. 흐릿한 음성이 어느 순간 분명하게 들렸다. ‘안성, 천안’이라 누가 소리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더벅머리에 곤색 나일론 잠바를 입은 택시기사 아저씨가 보였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재빨리 손을 들었다. 방향이 같은 2명 정도 함께 탄다면 이만 원쯤 지급하고 안성 톨게이트까지 갈 수 있었다. 기사 아저씨 앞으로 갔다. 내 뒤로 캐시미어 코드에 회사 가방과 명절 선물 세트를 겹쳐 든 중년의 아저씨 그리고 사평로에서 봤던 빨간 목도리를 한 여자가 있었다.


  나와 중년의 아저씨는 택시 뒷자리에 앉았다. 선팅된 까만 창밖으로 파카를 입은 남자와 빨간 목도리의 여자가 보였다.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조금 뒤 조수석으로 와서 앉았다. 내가 앉은자리에서 대각선으로 여자가 보였다. 수줍어서인지 안전띠를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 역시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번거로움보다 조용히 가기를 원했다. 창밖을 보는 중년의 아저씨도 같은 마음 같았다. 어쨌든 우린 막차를 놓친 절망을 겪은 사람들이니 몹시 지쳐있었다. 하지만 기사 아저씨는 달랐다. 대게 기사 아저씨들이 그렇듯 익숙한 방법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우선 공통된 관심사를 찾고 그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안성은 예전에는 참 큰 도시였는데 이제는 평택이 훨씬 커졌지요?”, “네, 맞아요”. “천안터미널은 사람이 북적북적했는데 이제는 두정동이 더 큰가 봐요?”, “그런가요? 잘 모르겠네요.” 나와 중년의 아저씨는 이런 식의 대화법에 익숙했기 때문에 적당히 단답으로 대화를 거절하고 감정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귀찮음을 표현했다. 그밖에도 예전과 달라진 명절문화의 아쉬움으로 말을 걸었지만 시큰둥한 반응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타깃을 바꿔 고개 숙인 빨간 목도리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 친구예요? 잘생겼던데” 한참을 뜸 들이다 여자가 말했다.


“아니요 이제 아니에요. 방금 헤어졌어요”


나, 중년의 아저씨, 기사 아저씨는 동시에 백미러로 시선을 옮겨 당황스럽고 난처한 눈빛을 공유했다.


  고속도로는 귀성 차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한 뼘씩 움직이는 자동차들 탓에 액셀을 밟고 뗐다를 반복했다. 택시가 꿀렁거렸다. 들썩거리며 우는 여자의 어깨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택시 안은 여자의 눈물로 습도가 상승해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뻥 뚫린 고속도로라면 창문을 내리고 소리라도 지르며 감정을 내뱉겠지만, 정체된 이곳에서 소리를 지른다면 도로 위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 것이다. 어쨌든 여자의 분출된 감정은 좁은 택시에만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높아진 습도와 가득 쌓인 감정에 답답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이 찰 때만 간헐적으로 헛기침을 했다. 무언가 결심한 듯 중년의 아저씨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였다. 사각형 모양 가방 버튼이 열리는 딸각 소리가 들렸다. 편의점에서 본 적 있는 라이언 캐릭터가 큼직하게 그려진 티슈를 꺼냈다. 나에게 건네주며 고개를 여자 방향으로 돌렸다. 전해주라는 표현 같았다. 나는 티슈를 받고 여자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다 “저기요”라고 작게 말했다. 여자의 무릎에 티슈를 건네주지 않았다. 조수석 왼편 컵 홀더에 티슈를 한 장 뽑아 살포시 올려놓았다. 여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봤다. 나와 아저씨는 가볍게 눈을 맞추고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가 방향으로 몸을 틀고 엄지와 중지로 손톱을 튕기던가, 성에 낀 창문을 손바닥으로 닦는 행동을 했다. 여자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당신과 감정을 공유한다는 표현이었다. 여자는 가벼운 묵례를 한 뒤 눈물을 닦고 조용히 코를 풀었다.


  우리 셋은 온 신경을 여자에게 집중했다. 중년의 아저씨가 티슈를 준다. 나는 눈물을 닦고 코를 푸는 빈도로 휴지의 젖은 정도를 판단한다. 교체할 타이밍을 가늠해 티슈를 건넨다. 기사 아저씨는 대화의 물꼬를 터주는 질문을 한다. 썩 맘에 들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여자는 나름대로 기사 아저씨가 노력하는 걸 눈치챘는지 작게 웃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이별 택시 안에서 각자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노력 탓인지 여자가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에서 만난 둘은 3년 정도 사귀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 권태기가 왔고 최근 6개월은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이별하고 한 달쯤 지나 남자에게 연락이 와 다시 사귀게 되었다. 한 달간 둘은 연애 초반만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다 오늘 남자가 택시 앞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더듬거리며 이별을 통보했다. 어떤 헤어짐의 증후도 없었다고 했다. 기사 아저씨는 떠넘기듯 나에게 왜 그런 것 같냐고 물었다. 여자도 사뭇 진지하게 백미러로 나를 본다. 기사 아저씨의 투박한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좀 전의 성의 없는 대답에 대한 복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굴려 남자의 심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군대, 질병, 이민, 유학)

-여자보다 여성이 몸이 그리워 연락했고 죄책감에 헤어지자고 했다.

-식사 중 여성의 입을 벌려 뒤섞인 음식을 보여주는 장난이 싫다.(나의 주관적 상상)


터미널은 어딘가 떠나는 곳이다. 떠나는 것과 이별이 닮아서 충동적인 행동을 한 걸까?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건 사평로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남자는 입맞춤보다 이별을 말하려 했던 것 같다. 좀처럼 나오지 않은 말이 드디어 목 끝까지 차올라 뱉어내기 직전,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그 장소에 내가 무단으로 침입해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요 며칠간 머릿속으로 수없이 상상한 이별의 순간이었을 것이고,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남자는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택시 앞에서 급하게 터지듯 충동적인 이별을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좀 전의 당황한 남자의 표정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둘의 이별에 관여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나는 기사 아저씨의 물음에 "글쎄요..."라고 대답했다.


  티슈를 컵홀더에 올려놓은 시간이 길어졌다. 들썩이던 어깨의 움직임도 잔잔해졌다. 가끔 훌쩍이긴 했지만, 여자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로소 엉덩이를 앞으로 빼고 편안하게 몸을 뒤로 기울였다. 쿠션의 푹신함이 느껴졌다. 만남의 광장쯤에서 치솟고 쌓였던 습도와 감정은 안성 톨게이트에 도착한 지금 티슈가 빨아들이고 서로가 나눠 가졌다. 어느덧 택시는 톨게이트에 도착해 갓길에 세워졌다. 마지막으로 여자에게 티슈를 건네며 가볍게 묵례를 했다. 백미러로 기사 아저씨와 중년 아저씨를 차례로 바라봤다. 천안까지 이별택시의 분위기가 지금처럼 유지되길 부탁한다는 눈빛을 전했다. 그들은 알아들었는지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에서 내리니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느껴졌다. 이별택시가 갓길에서 벗어나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나는 명절에 우울한 떡국을 들이켤 빨간 목도리의 여자에게 속으로 말했다. "어쨋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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