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세호 Jan 19. 2021

지구본

그녀의 세상

  그녀는 몇 번이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20년 만에 짧게 자른 머리가 적응되지 않았다. 목을 감싸던 머리카락이 사라졌다. 겨울의 찬 입김이 목에 닿는 기분이 생경했다. 잠시 잊고 있던 쓸쓸함이 떠올랐다. 그녀는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고 아파트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초록색 미니버스가 내가 보고 있는 그녀를 잠시 가린 뒤 사라졌다. 버스에서 내린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가 작게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한 손에는 딸기, 다른 손에는 예약해야 살 수 있는 제과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케이크 상자에 손을 내밀어 건네받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미간을 보며 약간 입을 움직여 미소인지 우물거리는 입모양인지를 보여줬다. 그녀는 남자와 조금 거리를 두고 걸었다. 걸으면서 오늘은 두꺼운 양말을 신었다. 입김이 진하게 보인다. 손끝이 쓰라리다. 그러니까 춥다는 날씨 얘기를 긴 겨울밤처럼 늘어트려가며 말했다. 그녀가 아는 춥다는 표현이 다 떨어졌을 때 다행히도 누군가의 복도식 아파트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곧바로 현관문이 열렸다. 그녀의 아버지였다. 왼쪽 상단 모서리에 신발 두 켤레가 놓인 넓은 현관에 맨발로 웃으며 서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눈이 아닌 맨발을 보며 발이 시리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진 머쓱해져 뒤통수를 긁적였고 이내 빨간 그녀의 볼을 보며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녀와 남자는 현관에 들어와 신발을 벗었다.  네 켤레의 신발이 현관에 놓친 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녀와 남자가 거실에 들어섰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멀뚱히 서있었다. 그 모습이 유원지에 놀러 가 사진기 앞에 선 노부부 같아 보였다.  그녀는 미소인지 우물거리는 입모양을 하고는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아빠 환갑에는 와야지"라고 말했다. 집안은 준비한 음식의 온기 탓인지 습했다. 그녀의 앞머리가 이마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홍합이 들어간 미역국 냄새가 났고, 기름 냄새, 숨 죽은 채소의 달큰한 냄새도 났다. 그녀가 코를 벌렁이며 킁킁거렸다. 그제야 멀뚱히 사진을 찍고 있던 노부부가 움직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베란다의 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고 그녀의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 준비된 음식을 식탁에 차렸다.


  차려진 상에 네 명이 앉았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과 날씨 얘기를 길게 하고 나니 한동안 식탁이 고요했다. 남자가 짧게 자른 그녀의 머리를 주제로 입을 열었다. 그제야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녀의 머리를 눈치를 챘는지 예쁘다고 그리고 생기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녀는 목덜미를 만지며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보였고 수저를 들었다. 그녀는 배가 고팠는지 미역국에 밥을 말아 소리 내며 음식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으로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딸을 보다 깜박했다며 손뼉을 치며 일어났다. 싱크대에 잠시 다녀오더니 그녀가 좋아하는 잡채를 못 줄 뻔했다며 상 가운데 놓았다. 미역국을 먹고 있던 그녀가 잠시 잡채를 보았다. 그러다 수저를 놓고 젓가락을 집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잡채에 당근을 넣으면 어떻게 하냐며 골라냈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당근을 먹지 못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미안해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버지가 골라낸 당근을 바라보다 젓가락으로 당근을 한 움큼 집어삼키며 웃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자는 그런 그녀를 보고 함께 웃었다. 준비해 간 케이크와 딸기까지 그녀는 숙제처럼 해치웠다. 그녀의 부모는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의 출근을 걱정하며  어서 일어서라고 말했고 그녀와 남자도 거절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익숙한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곧장 목욕탕에 들어갔고 그녀는 큰방을 지나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작은방에 있는 작은 침대 아래로 자신의 몸을 욱여넣었다. 밥을 많이 먹어서인지 그녀의 아랫배가 침대에 닿는다. 남자가 씻는지 목욕탕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늦은 밤이지만 핸드폰으로 조금은 시끄럽게 노래를 틀었다. 그녀가 몸을 욱여넣은 작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지구본이 흔들린다. 

작가의 이전글 2020 읽은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