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아닌교?
요즘 난 이선균이 아이유에게 따라준 맥주 거품 같은 허무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밤 10시 카페를 마감하고 집에 돌아와 맥주를 마신다. 1시간쯤 뒤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덕우가 집에 온다. 그럼 우린 어제처럼 맥주를 마시고 한 얘기를 반복하다 가끔은 웃고 여러 번 휘발성 짙은 소리들을 내뱉는다. 이런 반복되는 하루가 지루해 멍하게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우가 정적을 깨고 유튜브를 해보자고 말했다. 유튜브의 시대에 해보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바스락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땅콩 껍질을 비벼대다가 좋다고 말했다. 당시 내 모습을 상상해보면 심드렁하게 맞장구나 쳐주는구나라고 덕우가 오해할 수 있었겠지만 난 유튜브 스타가 된 모습 상상하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한 시간 정도 토의를 거쳐 매주 월요일 각자 카페를 휴일로 지정하고 여행 브이로그를 찍자는 결론에 내렸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마신 맥주는 어제보다 시원했다. 기다려라 빠니보틀
월요일 아침 알람도 맞추지 않았지만 7시에 눈이 떠졌다.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며 든 감정은 기대나 설렘이 아니었다. 매번 간과하는 일이지만 밤에 나는 지나치게 의욕적이고 아침에 나는 일으킬 수 없이 게으르다는 것이다. 귀에 신경을 집중해 덕우가 일어났는지 인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집은 고요했다. 덕우가 이대로 늦잠을 자 여행이 취소되길 기대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책임지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대강 씻고 여행지를 정한 뒤 덕우을 깨워야 했다. 8시쯤 일어나 샤워를 했다. 덕우방에 노크를 했다.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왜 아직도 누워 있냐고 채근했다. 이제 덕우가 여행을 취소하자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실망한 나는 샤워한 몸으로 내 방으로 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덕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와 내 방으로 왔다. 여행 가자고 나를 채근했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덕우의 의뭉스러운 표정에서 느껴졌다. 덕우도 귀찮아하며 나에게 책임을 넘기고 싶어 했다. 나는 경주에 가자고 했다. 덕우가 내 방 문을 닫고 나갔다. 이대로 여행이 끝나는가 했지만 잠시 뒤 방 문이 열렸다. 덕우가 옷을 입고 부산에 가자고 말했다. 웃음이 나왔다.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각지역을 지날 때마다 버뮤다 삼각지대가 떠오른다. 이름 탓이겠지만, 삼각지에서 오른쪽엔 낯선 자극을 주는 이태원 프리덤, 왼쪽엔 뭔가 부족한 신촌, 직진하면 만남과 이별의 서울역이 나온다. 오늘은 훌쩍 떠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다. 집에서의 귀찮음은 놀랍게도 현관문을 나와 콧구멍으로 찬 공기를 맡으면서 사라졌다. 지금은 설명하기 어려운 충만함이 가슴에 가득 차 있었다. 서울역에 도착했다. 월요일이고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인지 역 안은 한산했다. 배가 고파 던킨에 들어가 츄이스티 도넛과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샀다. 따듯한 커피를 마시려는데 갈라진 내 손이 보기 싫었다. 바로 옆에 있는 약국으로 가 연고를 사서 발랐다. 연고를 바른 손으로 따듯한 커피를 한 모금 먹고 단 도넛을 베어 물었다. 완벽한 치유의 행위였다. 덕우가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순간 가슴 근육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한마디 내뱉었었다. 뭐라고 했었지? 아마 “안녕하세요 부산갑니데이”라고 했던 것 같다.
자리에 앉자마자 우린 앞으로 유튜브의 방향에 대해 깊은 토론을 했다. 대화의 흐름은 대강 이랬다. 여행 브이로그 - 색다른 게 - 아이디어 제시 - 감탄 - 장밋빛 미래 상상 - 보완점 제시 - 의구심 증폭 - 다시 처음으로 , 그때 생각한 아이디어를 떠올려보면 “산타가 사라진 이유 : 크리스마스에 떠나는 굴뚝 있는 집 찾기, 문학여행 : 연탄 쌓인 곳에서 함부로 연탄제 차는 사람과의 인터뷰, 월요 휴무인 식당의 옆집에서 먹방” 1시간쯤 지나자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간혹 아이디어 자기 검열 중 체념하지 못한 아쉬움에 터져 나오는 “ 이건 어때? 아 아니다” 정도의 신음만 들릴 뿐이었다. 결국 딱히 생각도 없으면서 고뇌하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즈음 둘 다 비슷한 말을 꺼냈다. 일단 이번 주는 준비가 안됐으니 오늘 부산여행을 즐기고 다음 주부터가 진짜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졸음이 쏟아져 잠이 들었다. 기차가 정차하는 게 느껴져 눈을 떴을 땐 대구였고 허리가 아팠다. 수차례 자고 깨고를 반복하니 어느덧 부산에 도착했다. 역을 빠져나와 부산을 마주했다. 회색빛 하늘에 역 앞은 공사 중이라 시끄럽고 산만했다. “부산이다”라고 작게 외쳤지만 삼각지역에서 느껴졌던 가슴속의 충만함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광장 벤치에 앉았다. 바다가 보이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최소한 공기 중에 짠내라도 나거나 갈매기 소리라도 들려야 했다. 부산역 광장에 갈매기 소리를 틀어놓는 건 어떨까? 우선 바다를 보기로 결정했다. 기차 시간까지 6시간 남았다. 역에서 가까운 자갈치 시장에 가기로 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하니 시장 옆에 푸른색이 보였다. 바다였다.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텍사스거리와 , 차이나 타운이 보였다. 잠시 들어가 봤다. 텍사스 거리는 음침했고, 차이나타운은 중국음식점이 많았다. 특별한 감흥을 받지 못해 대강 둘러보고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에서 덕우에 표정을 보니 눈알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지쳐 보였다.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갈치 시장에 도착했다. 겉모습은 남대문시장과 비슷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해산물로 즐비했다. 곧 바다를 볼 수 있다. 기대감을 품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삼촌, 이모들의 호객행위를 뚫으며 바다를 향해 걸었다. 방어, 곰장어, 뭐든 있다며 뭘 찾냐고 우리에게 말을 걸었지만 차마 바다를 찾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바다는 늘어선 가판대와 상점들 뒤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린 그곳에서 음식을 먹을 생각이 없으니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대가 조금 높은 곳으로 올라가 먼발치에서 바다를 봤다. 백사장보다 아스팔트 파라솔보다 컨테이너 통통배보다 화물선이 보였다. 항구라기보다 항만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나는 작게 “바다네”라고 말했고 덕우는 “난 여행을 안 좋아하나 봐”라고 말했다.
공허함은 허기로 이어졌다. 자갈치시장에는 양곱창거리가 있다. 규모가 가장 크고 손님이 많으며 그래서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마음 편한 가게로 들어갔다. 대선 한 병과 양념 양곱창을 시켰다. 양, 대창, 곱창, 염통 등이 양념되어 나온 음식이었다. 부산의 대선은 서울보다 조금 쓰고 염통은 비렸지만 나머진 맛있었다. 무엇보다 몸에 술이 들어가니 흥이 올랐다. 기차에서 멈췄던 유튜브 아이디어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예를 들면 “ 연탄제 찬 사람이랑 인터뷰할 용기는 있냐?” 오늘 이 어처구니없는 부산여행 얘기를 하며 웃었다. 우리가 아는 나머지 친구들에게 굳이 오늘 부산에 대해 얘기하지 말자는 합의도 했다. 대강 배를 채웠다. 장소를 옮겨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서울로 가는 기차 시간은 3시간남짓 남아있었다. 역 주변 작은 이자까야에서 어묵에 맥주를 마시면 나쁘지 않은 여행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자갈치시장에서 역까지 걸어가며 이자까야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런 곳은 없었다. 정처 없이 걷는 건 이제 지겨워졌다. 타협안으로 상상한 장소가 한 스푼 들어간 봉구비어에 들어갔다. 감자튀김과 크림 생맥주를 먹으며 덕우는 다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나는 뭐라고 했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차 시간이 임박해 역으로 향했다. 기념할 무언갈 사고 싶었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가장 눈에 보이는 단팥빵을 급하게 사 기차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싱크대 위에 단팥빵을 던져놓고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에 빠졌다. 긴 부산여행의 끝이었다.
누군가 부산행이 어땠냐고 물어보면 난 좋았다고 말할 것 같다. 즉흥여행이란 원체 걷고, 헤매고, 지치고, 낯설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경험은 그랬다. 옆에서 여행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는 어땠냐고 물어보면 나쁘지 않다고 말할 것 같다. 주변에 당일 아침 호기롭게 즉흥여행을 떠날 수 있는 친구가 얼마 남지 않았다. 덕우가 유일한 것 같기도 하다. 투덜대긴 했지만 화내진 않았다. 그러니까 나쁘지 않다.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하루보다 예측할 수 없는 낯선 하루가 좋다.
즐거운 붓싼 여행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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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솔 - 뭐 좀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