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우리,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있을까

by ㄱㄷㅇ

안녕하세요. 첫 글은 소설 '아몬드'를 읽고 난 소감문 같은 것입니다.

첫 글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그냥, 쓰던 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는 더 다양한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즐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웃고 있는 모녀와 표정 없는 나. 이따금씩 엄마와 할멈이 여행을 간 건 아닐까 하는 헛된 공상을 하곤 했다. 물론 결코 끝날 수 없는 여행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 세계의 전부였다. 하지만 할멈과 엄마의 부재로 알게 된 건 세상에 다른 사람도 존재한다는 거였다. 한 명씩 천천히,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에 등장한다.


비극은 아주 천천히 스며들다가도 느닷없는 때에 터져버리곤 했다

소설 아몬드는 비극으로 점철된 이야기이다. 다만 그 속에 나타난 기적(같은 존재)은 한 겨울밤 중에 빛나는 별을 보게 한다. '나'는 삶의 시작부터 비극이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본인은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삶에서 보통의 존재와 다르다는 건 대부분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온다. 특히나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건, 자신의 약점이 되고 타인의 공격을 만든다. '나'의 엄마와 할멈은 이를 잘 알았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보통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은 실패했고 '나'는 보통의 존재가 되지 못했다. '나'의 망할 비극은 엄마와 할멈마저 빼앗아 갔다. 하얀 눈이 내리던 날에 할멈은 죽었고 엄마는 오랜 잠에 빠졌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나'는 제대로 슬퍼하지 못했다. 감정을 느끼질 못해서,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만 그 일을 인지한다.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일까, 불행한 일일까. 친구는 좋은 일이라 했고, 나는 불행한 일이라 했다. 나는 감정을 과하게 느끼는 편이었고 친구는 적당히 느끼는 편이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과한 건 부족한 것만도 못하다는 말처럼, 어느 경우든 적당한 것이 좋다. 나는 바늘에 찔려도 팔이 부러진 것처럼 아파했다. 그것이 나를 망가뜨리는 일인 줄도 모른 체, 가는 슬픔을 놓아주질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에게 그랬다.

슬플 만큼만 슬프고, 좋을 만큼만 좋아하면 됩니다. 감정을 죽일 이유도, 키울 이유도 없어요.라고. 그땐 그 말에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나'는 사건 이후 곤이와 도라를 만나게 된다. 곤이는 '나'와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루어진 아이였다. 어려서 친부모를 잃어버렸고, 나쁜 일들만 받아들이다 겨우 진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죽어버렸다. 그 사이 어떠한 일로 곤이와 '나'의 관계는 망가졌다. 하지만 몇 번의 사건 이후로 점차 곤이와 '나'는 가까워졌다.


손바닥을 올렸다가 내렸다. 확 그냥, 이라고 말하곤... 이상하게 이제 더 이상 그런 옛날 잡지 보기 싫다. 즐겁지 않아. 아름다운 것들이 시들어 가는 상상이 돼서. 너 같은 새낀 영영 이해 못 하겠지만.

곤이는 '나'를 보러 찾아왔고, 가끔 책을 사가곤 했다. 그러던 중 '나'에게 말한다. 아름다운 것들이 시들어 가는 상상이 돼서 보기가 싫다고. 곤이는 감정을 '잘'느끼는 아이였다. 본인은 알지 못했지만 타인의 아픔을 보고 공감을 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런 사실을 '나'를 제외하곤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본인이 받은 상처로 인해 세상을 향해 가시가 돋아 있는 고슴도치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본래 그런 아이, 하이에나 같은 작은 맹수로 취급했다.


-응, 늙어 버렸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그래서?
-그래서. 강해질 거야. 내가 살아온 인생답게. 나한테 제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기고 싶어.
상처받는 걸 멈출 수 없다면 차라리 상처를 줄 거야.
-어떻게?
-몰라, 하지만 어렵진 않을걸. 그게 나랑 가까운 세계니까.
-앞으로는 볼 일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자, 작별의 뽀뽀 대신 이거.
곤이가 눈을 찡긋하더니 가운뎃손가락을 슬그머니 올렸다.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 애의 얼굴에서 그런 웃음을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그 애는 사라졌다.
그리고 비극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그리고 그건 곤이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다. 곤이는 태어난 이후 자신이 겪은 세계를 전부라 생각한다.

본인을 타고나길 그렇다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세계는 스스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에 한해서 만들어지니까. 곤이에게도 그랬을 뿐이다. 특히나 어린아이에게 지난 세월을 부정하고 새롭게 나아가기를 바라는 건 오만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한정 짓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 나는 이것뿐이 안 되는 존재,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어떤 것뿐인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남은 건 결국 무너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희망은 어디에서 어떻게 올 지 모르지만 불행과 아주 비슷하게, 아무런 예고도, 소리도 없이 찾아온다. 다만 불행은 모른 척 지나치기엔 너무나 아프고, 희망은 낚아 채기엔 존재를 알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내가 느끼기에 아몬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나'와 '곤이'이다. 당연하다. 소설 속 가장 많은 부분을 '나'와 '곤이'가 차지하고 이야기의 절정엔 '곤이'가 존재하니까. '나'의 구원은 누구로부터 비롯되는지 생각해 보았다. 엄마와 할멈, 그리고 돌아와 곤이. 모두 '나'의 구원이고, '나'는 돌아와 곤이의 구원이 된다.


도라와의 관계는 여느 일이 그렇듯 '사랑'이란 감정으로, 복잡하지만 아주 명확한 단어로 설명된다.

다만 '나'와 곤이의 관계는 우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무언가 다르다.

이들이 더 명확히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다.


이야기를 읽다 문득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나 기적 같은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구원을 만나는 건 아주 어려우나 때때로 마주할 때가 있을 테니까. 누가 나의 구원이었을까. 떠오르는 몇 개의 이름이 있다. 다행이다 싶었다. 만약 떠오르는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까.


편지; 우리 서로를 구하자. 서로가 무너졌을 때,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있어. 일상 속에선 은은하게, 아주 가끔 만나도 괜찮아. 그저 주위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렇지만 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 내 이름을 불러줘. 그렇다면 나는 언제든 네게 달려갈 거야. 언제든, 어디에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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