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동류

by 미색

면접을 며칠 앞두고 은행 잔고는 바닥으로 치달았을 때였다. 휴대폰에 저장된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짜장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한 그릇은 배달이 안 된다는 말을 하다 말고 사장은 군만두라도 하나 더 시키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됐다는 말도 못하고 주저하다 네, 보내주세요, 해버렸다. 아직 주소를 말하지 않은 찰나 실수인 척 전화를 끊으려는데 사장은 다시 부랴부랴 OO빌딩 5층 맞으시죠? 하고 전에 일하던 직장 주소를 읊었다. 결국 자취방 주소를 다시 일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생활비가 바닥나는 마당에 호기롭게 위장에 기름칠을 하려던 객기가 내 뒤통수를 쳤다. 매사 나는 왜 이 모양인 걸까, 한탄이나 하며 남은 생활비를 쪼개고 쪼개보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탕수육이나 양껏 먹어보고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탕수육은 그래도 오래 두고 먹으면 되니까 탕수육조차 다 떨어지는 날 죽어버리는 것도 좋겠다. 짜장면에 군만두라니, 혼자 이런 만찬을 누리려니 죄책감이 들었다.

실습으로 배정된 제조 공장에서는 점심을 시켜 먹었었다. 백반이 플라스틱 도시락에 포장되어 왔다. 커다란 보온 박스에는 공깃밥이 하나씩 랩에 감겨 있고 국은 스테인리스 들통에 있었다. 공장에는 식당으로 부르는 컨테이너가 하나 있는데 바닥에 열선을 깔고 그 위를 장판으로 덮어서 밖이 아무리 추워도 그 안에 들어가면 후끈해서 몸이 녹았다. 플라스틱 반찬통을 가운데 놓고 바닥에 둥그렇게 모여앉아 밥과 국은 따로 먹고 반찬은 나눠 먹었다. 거의 마른 반찬에 단무지와 김치가 매번 들어있었고 특식으로 동그랑땡이나 동태전이 나올 때도 있었다. 반찬을 둘러싼 무리는 대여섯 명인데 동그랑땡은 서너 개가 들어있었다.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은 특식을 애들 반찬이라고 부르셨다. 그래놓고 반찬이 부실하니까 집에서 반찬을 큰 통에 싸오는 분들도 계셨다. 이 집 김치는 중국산이라 맛이 없다며 자기 집 김치를 맛보라고 가운데 두고 나눠 먹었다. 그러다 한 날은 반장인 아줌마 한 분이 부장 아저씨와 내기를 해서 이기는 바람에 백반 대신 배달음식을 시켜준다 했다. 아줌마들은 애들은 무조건 짜장면이 최고라며 짜장면 한 번 먹어보자고 하셨다. 같이 다니던 친구는 내 귀에다 대고 피자나 시켜주지. 짜장면이 뭐야? 그러며 킥킥 웃어댔다. 나도 피자가 더 좋았다. 먹어보기를 손에 꼽았다. 그렇지만 짜장면도 감지덕지라서 행복했다. 그날은 참으로 시간이 더디게 갔다. 겨울이고 추워서 따끈한 국물 생각이 나 짬뽕이 먹고 싶었다. 그런데 얻어먹는 주제에, 사회초년생인 주제에 다들 짜장면을 먹는다는데 감히 짬뽕을 시켜달랄 수는 없어서 먹었던 그날의 짜장면이 참 맛있었다. 짜장면이 원래 맛있기는 하지만 이다지도 맛있었던가, 새삼 그 고소한 돼지기름과 달콤한 춘장 양념이 유난히도 맛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짜장면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해서 친구의 사무실에 다니는 동안 현주, 오늘은 뭐 시켜 먹을까? 하면 무조건 짜장면이었다.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온다. 계세요? 배달이요! 카드를 들고 바닥이 끌리는 바깥 쇠문을 열어 짜장면을 맞아주었다. 배달원은 음식을 내려놓고 결제를 한 뒤 카드와 영수증을 돌려주었다. 그런데 혹시 OO초 나오지 않았어요? 배달원에게서 카드를 받다 말고 오토바이 헬멧을 쓴 배달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낯익어서요. 이름이 현주 아닌가? 배달원의 얼굴은 생소했다. 생소한 얼굴이 반가운 표정을 하며 내 눈빛을 읽었다. 아마 너 못 알아볼 걸. 그땐 내가 너무 뚱뚱했어. 배달원의 말대로 예전 모습은 오간 데 없어서 나는 그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거의 고개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예전 모습도 기억에 없지만 반에 뚱뚱한 친구가 몇 명씩 있기는 했었다. 그 중에 한 명인가 보았다.

너 그 회사 다니지? 오늘 쉬는 날인가 보네. 요즘은 통 안 시켜 먹더라. 여기 우리 아빠가 하는 데거든. 중학생 때 아빠 사는 동네로 전학 와서 여기서 쭉 지냈어. 지금은 군대 가기 전에 아빠 도울 겸 알바하는 거야. 배달원 친구는 반가움에 말을 길게 늘여놓았다. 난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이 집은 오늘부로 끊기로 마음먹었다. 입맛에 잘 맞던 집인지라 아쉬웠다. 너네 회사 좋더라. 다음에 또 시키면 서비스 보내줄게. 맛있게 먹어. 너네 회사 좋더라는 말만 아니었어도 나는 불어가는 짜장면이 걱정되어 그를 얼른 돌려보냈을 것이다. 나 거기 관뒀어. 아! 그랬구나. 어쩐지. 다른 회사 다니는 거야? 이제 그러려고. 어디로? 배달원 친구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 대한 관심치고 지나치다는 느낌이 슬슬 들었다. 짜장면 부는 거 아닐까? 아니야. 우리 집 짜장면은 특별 비법이 있어서 웬만하면 잘 안 불어. 그렇긴 하더라. 아직 안 구했는데 곧 구해질 거야. 그래, 그렇겠지. 그럼 또 보자. 맛있게 먹어, 암튼. 그러곤 불어서 곱빼기가 된 짜장면을 반만 덜어 먹었다. 짜장면이 부는 바람에 한 끼가 두 끼로 늘었다.

그러곤 늦은 밤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현주야, 나야. 오지랖일 수 있는데 너 혹시 우리 집에서 일할래? 우리 아빠가 시급 잘 쳐준대. 괜찮으면 연락해. 배달원 친구의 이름은 영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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