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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Apr 06. 2021

후유증

아무렇지 않은 척

  오백국수에서 들깨칼국수에 갈비만두를 먹고 나면 아뜰리에 카페를 들러 차 한 잔씩 들곤 한다. 적당한 양과 저렴한 가격에 맛까지 보장하는지라 점심시간의 아뜰리에는 여직원끼리의 작은 회식을 즐기는 2차 자리로 완벽했다. 채 꺼지지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커피 향내를 맡고 있으면 나른한 기운이 서서히 몸에 퍼져왔다. 느릿한 말투로 이런저런 잡담을 하던 도중에 손가락으로 저만치 떨어진 자리를 가리켰다.


  "바로 저기에서였어요. 저 자리가 뺑소니 합의금 받아낸 자리예요."


  몇 년 전, 시내의 가파른 길을 오르던 우리 사형제가 탄 차를 다짜고짜 골목에서 튀어나온 좌회전 차량이 대차게 박아버린 적이 있었다. 사고 소리가 워낙에 컸던지라 동네 주민이 다 나와 구경을 했고, 순식간에 레커 차량이 사고 주위를 에워쌌다. 우리는 사고 수습을 위해 경찰서에 연락을 했고, 가해차량 운전자는 무슨 일인지 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고 현장은 점점 운집한 사람들로 번잡해졌다. 곧 경찰차 한 대가 인근 도로에 정차하고 우리에게 다가와 신원을 물었다. "가해차량 운전자는 누구시죠?"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어요." 경찰을 데리고 찌그러진 검정 중형차 앞으로 갔다. 운전석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 사이 사고를 낸 운전자가 슬그머니 도주하여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모두 경황이 없던 터라 거기 있던 군중 중에 아무도 가해자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고, 상식적으로 가해자가 도망가버릴 거라는 예측은 할 수 없었다. 금방 당한 교통사고보다 훨씬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 다들 기가 찼다. 황당해하는 우리에게 레커차량 직원들과 경찰이 다가와서 충분히 이해될 만한 객관적인 위로를 해주었다.


  "물증이 없지만 심증으로는 음주운전이었던 것 같고, 아마 면허취소 수준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벌점이 쌓였거나요. 어쨌든 가해차량 운전자가 사고지역을 무단이탈한 경우, 한 마디로 뺑소니죠, 무조건 과실 100% 적용됩니다. 피해자분들은 보험 처리하시고 보험사에 진단서 제출하시면 문제없으실 거예요."


  막내가 자기 회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변호사에게 뺑소니 사고 피해자의 대처 방법에 대해 여러 차례 자문을 구해 결국에는 가해차량 운전자가 금방 석고대죄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죽을상을 하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해자와 함께 온 변호사와 우리는 바로 아뜰리에 카페 그 자리에서 적절한 피해 보상금이 얼마이냐로 실랑이가 오갔다. 내겐 그저 그런 자리가 어색하고 낯선데다 우리보다 한참 연배가 있는 아저씨가 죄인이랍시고 비굴하게 구는 모습이 영 불편해서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뒤 한동안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받으려고 다 같이 한의원을 다녔다. 공교롭게도 사고가 났던 날은 언니와 함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회포를 풀자고 모인 날이었다. 셋째는 마침 여름방학이 시작된 날이었고, 막내가 다니던 회사는 365일 한가한 직장이었다. 사형제는 한가했고, 치료와 안정을 가질 시간은 충분했다. 물리치료도 받고, 한약도 지어먹고, 망가진 차도 고쳤다. 합의금 중 내 몫으로 나눠 받았던 돈은 언니와 교습소를 차릴 때 유용하게 쓰였다.


  '그 모든 일이 16년 한 해에 다 이루어졌었군. 그 해에도 많은 일이 있었네.'


  꽁무니를 감추고 달아났던 가해자 아저씨가 무엇보다도 관건이었다. 아뜰리에 카페에서 다시 만난 아저씨는 극악무도한 범죄라도 저지른 냥 꾹 다문 입을 한 번도 열지 않고 합의금 이야기가 오고 가도 화가 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적지 않은 돈이 주머니에서 훌훌 털리게 생겼으니, 아무리 본인이 한 짓이 있다 하여도 생색을 안 낼 수가 없을 텐데, 변호사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죄를 지었으면 양심적으로 나오는 게 신상에 좋아요.'라는 식의 말을 들었을 가해자 아저씨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을 지키는 며느리 도리라도 각오하고 나왔을 장면이 상상되었다. 가해자 아저씨는 변호사의 조언을 잘 따랐기에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죗값의 반절만큼만 치렀다. 우리는 나중에 떠올릴 때에라도 거리끼지 않았으면 해서 가해자 아저씨를 그 정도 수준에서 놓아주자고 결정했다. 진심이 얼마나 섞여있나를 잴 것도 없었다. 음주운전 교통사고 가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란다는 것은 어폐였다. 그럴 사람이라면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지는 않았겠지. 사람들은 그보다 더 진심이 필요한 순간마다 잔인한 본능을 휘둘러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입히니까 말이다.


  죄의식과 죄책감에 휩싸여 있어야 할 가해자 앞에만 서면 마음이 약해져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쓴다. 되바라지게 쓴소리를 해줘야 정신을 차릴 간사한 인간인 줄 잘 알면서도 그보다 더한 인간이 누구를 용서하거나 사과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하고 소극적이게 되곤 한다. 불쌍하게 연민을 자극하는 사람을 보면 견디지 못한다. 용서할 자격도, 용서할 용기도 없어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로 한다. 대신에 항상 나를 위로해줄 우리를 찾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따뜻한 우리에게로 다시 향한다.


  이제 저만치에 떨어진 자리를 바라보고 '그런 일이 있었노라'라고 회상하는 그런 날이 또 올 것이다. 커피 향내와 훈훈한 봄기운에 노곤히 잠에 취해서 차 한 잔을 기다리는 여유가 있는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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