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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Apr 07. 2021

유전

무엇이 나를 만들었나

  결핵은 유전이 된다. 여동생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결핵에 걸려 몸이 반토막이 났었다. 한창 성장기라 살이 부쩍 빠져도 병을 의심하지 않고 가벼이 여겼다가 뒤늦게 찾은 큰 병원에서 동생은 한 달 정도 집중 치료를 받고 회복되어 퇴원했다.


  결핵은 가난한 질병이었다. 엄마는 여동생보다 먼저 이 병을 앓았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막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때 내게 엄마의 아픔은 하나의 히스테리 정도로 다가왔다. 우리 집의 경제력은 늘 한숨 나오는 수준이었는데 가난이 시커멓게 피어난 곰팡이처럼 집안을 불화로 오염시키는 과정은 내 속에 우울감이 자리 잡게 만들었다. 울적함은 평평하고 곧고 잔잔하게 마음 언저리를 매일 흘렀다.


  결핵을 앓게 되면 주기적으로 먹어야 할 약이 수십 개고, 수시로 가래를 뱉어주어야 한다. 쉽게 피로해지므로 자주 쉬어주어야 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니까 즐거운 생활을 유지해야 하고 영양 공급이 최우선이라서 몸에 좋은 음식을 잘 먹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교해서 집에 돌아오면 집안을 채운 공기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누워 있는 방문을 빼꼼 열고 엄마- 하고 불러보기도 겁나서 돌아누운 엄마의 헝클어진 머리를 잠깐 바라보다가 물러가곤 했다. 아픈 엄마의 등줄기는 타인처럼 완고하고 멀어 보였다. 그즈음에 엄마는 자주 짜증을 내고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기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학교생활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준비물을 못 챙기는 등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닥쳐와 연신 불안하게 했다. 키가 자라고 감수성은 날로 예민해졌다.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텅 빈 주머니와 행색에, 그리고 선명하게 찍힌 어제의 기억들, 이를 테면 아빠의 악다구니와 난동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구경 오던 치부가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내 몸 곳곳에 묻어있을까 봐 두려웠다. 친구들이 나를 싫어하겠지, 나를 멀리할 거야, 하고 짐작한 대로 같은 학급 친구들의 무시와 비난과 조롱이 가까이에서 들려와도 못 들은 척했다. 마음이 덜 자란 아이처럼 내게 벌어진 일들이 무슨 일인지 이해조차 못한다는 듯 굴고 싶었다. 대학시절, 날 멀리하던 친구 중 하나를 등하굣길에 타는 시외버스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친구에게, 그때 나 참 힘든 시기였는데, 그래도 네가 가끔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나는 그림자를 감추고 나머지 말만을 전했다. 친구는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그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너 오늘 아주 임자 만났다며 눈알을 부라리는 건 속 좁은 짓이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든 비굴한 사람들을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우리는 다 그저 그런 갑남을녀인데 그 이들을 모두 미워하면 나마저도 미워해야 했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서, 단지 불쌍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하필이면 나였다 하는 정도로 마음을 추슬렀다.


  엄마가 아프셔서 급식비를 낼 수 없다며? 복도에서 친구와 놀던 나를 한 선생님이 찾아와 불쑥 말 걸었다. 무료급식 지원 신청서를 내면 몇 달간 우유와 점심을 돈 내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부끄러움을 내색하지 않고 선생님을 쫓아가 지원 신청서를 받아왔다. 부모님의 확인 사인이 필요하다 하셨다. 집에 돌아가 방문을 열자 엄마는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엄마의 사인은 단순해서 구차하게 자는 엄마를 깨우지 않고 손수 해결했다. 사춘기가 온 나는 사춘기가 오지 않은 애처럼, 속이 없는 애처럼 묵묵히 무료급식 신청서를 선생님 자리에 갖다 내고 내내 공짜 밥을 먹었다. 옆 자리 친구의 밥과 같은 밥통에서 퍼낸 밥이었건만 도둑질한 밥이라도 되는 냥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고역이었다.


  가난은 내게 살아가는 방법은 오로지 참는 거라고 가르쳐주었다. 무언가를 갈망하지 않고 소망하지 않고 절제하고 단념하고 포기하고 체념하면 어지간한 욕망은 알아서 물러간다는 걸 수차례 경험시켰다. 그 무엇도 간절히 원할 필요가 없었고 무엇을 원했든 어차피 가질 수 없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것에 마음을 주지도, 눈독을 들이지도 않을 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경쟁 시대라는 이름 하에 탐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놀라게 된다. 내 심성은 노골적인 감정 표현을 두려워한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밖으로 내보이길 심하게 꺼린다. 욕심, 분노, 시기, 질투, 증오와 같은 감정들을 다룰 줄 몰라 어설프게 드러낸다. 그렇지 않은 척 참아내고 무식하게 속으로 삭히면서 스트레스를 분출하기 위해서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속으로 수많은 사건의 잘잘못을 가려내고 내 억울함과 억하심정은 정상적인 결과라고 스스로라도 인정해주고 마음을 알아주면서 내게 가장 좋은 친구는 나 자신이 되었다. 동시에 나를 욕하고 미워하고 비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매일 새롭게 갱신되는 인생의 쓴맛과 신맛에 굴복하기 싫어지면 농담과 유머, 생각 없는 행각과 자기 비하를 일삼았다.


  인생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논하거나 혹은 가난이 남긴 건 상처뿐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날마다 해주어야 녹이 슬어서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거울에 투영하듯 글로 옮겨본다. 사춘기가 시작될 즈음부터 해서 엄마는 몇 개월 동안 병치레를 하였고 의사의 권고대로 치료 과정을 잘 지키며 차차 건강을 회복했다. 결핵보다도 심란했던 건 그 당시 우울 전파자였던 엄마의 어두운 낯빛이었다. 건강을 조금씩 회복하고서야 촘촘히 박힌 근심이 엄마의 얼굴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갔고 집안에도 해가 들듯 온기가 뻗치곤 했다. 용감무쌍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담대하고 의외로 적극적인 구석이 있는 엄마에게서 우리 형제들은 많은 걸 물려받았다. 가난이나 결핵, 무조건 참는 게 능사라는 절제력만이 아니라 오롯한 믿음까지도 태어날 때부터 함께 했다. 나란 인간만을 본다면 가진 것도 없고 무능한 구제불능의 한량이었다. 무엇으로도 긍정적인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난이나 망가진 인간관계로 슬퍼하고 힘들 때면 주님께 기도를 드린다. 또 믿는 엄마와 형제들에게 위로를 받는다. 인생의 목적은 단지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는 게 아니라고, 더 높은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가장 쉬운 도리부터 다시 일러준다. 자주 도돌이표를 그리는 엷디 엷은 신앙이고 실수와 실패만을 반복하는 고문관 신앙인이지만 정신을 차려보려 글을 쓰며 기억의 단편을 끄집어내 본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왔고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 가난도 부유함도 나를 완성시켜주지 못할 줄 안다. 아마 그것은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항상 가까이에, 머리맡에 둔 휴대폰처럼 손 뻗으면 닿는 자리에 있을 것이다. 잠자코 두 눈을 꼭 감으며 인내심으로 때가 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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