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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Apr 11. 2021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

집으로 사람을 논하다

  2주간 이사에 시간을 쏟다가 습작하며 길들이던 글쓰기 흐름이 완벽히 깨어지고 말았다. 종종 자리를 만들어 습작하던 글을 불러내지만 글에 담아온 정서는 그리 간단히 불러와지지가 않는다. 그러다 잠시 내 오랜 숙명과도 같은 소재인 '집'을 가지고 또 한 번 산문 쓰기를 시도한다. (이번에 겪은 극단적인 생활환경의 변화는 요즘 습작하는 소설 '소멸된 미래'에서 다루는 빈부격차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사회구조와 인간 본성을 더 깊이 탐구하고 고찰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되리라.)






  본가는 경기도 이천의 농촌마을, 사는 곳은 서울 마포의 어느 아파트 숲이다. 아파트 숲, 울창한 회갈색의 건물이 각 방 창문마다 삐죽삐죽 곧게 솟아있다. 집이 마를 날이 없기를 바라는 서울 시민들의 염원을 담은 돌탑처럼 아파트가 담벼락을 맞대고 구역마다 세워졌다. 걸어서 5분, 걸어서 10분, 걸어서 15분 거리에 네댓 개의 호선이 지나는 초역세권이었다. 동네는 날로 새롭게 번창하는 도시로 감쪽같이 변모해갔다.


  며칠 전까지는 서울역 근처에 있는 10평짜리 원룸이 보금자리였다. 원룸은 가파른 언덕 중턱에 있었다. 귀갓길을 올라와 가쁜 숨을 고르며 막 현관문을 열면 반지하방의 습기에 절은 벽지 냄새가 흐물흐물 공기를 누볐다. 집주인을 반기는 대형견 대신 대형 미국 바퀴벌레가 맞아주지만 않아도 고마운 한편, 눈이 사시가 되도록 온 사방을 샅샅이 훑어보는 번거로움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밥 해먹을 싱크대 수도에서는 녹물이 나와 기르던 식물마저 시들어버리고 새로 했다는 도배는 1년여 만에 시커먼 곰팡이가 검정 벽지로 새 도배질을 해주었다. 화장실 타일 틈과 변기 뒤는 그을음보다 새까만 곰팡이가 그득 끼어있었다. 동네로 산보를 나가면 개 오줌, 똥과 담배꽁초, 원재료가 무언지 알고 싶지 않은 각종 오물이 길바닥을 장식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배낭을 메고 갈 곳 없이 이리저리 길을 전전하는 사람, 타인의 뒤를 공연히 쫓는 사람이 때때로 나타나 집에서 바퀴벌레를 경계하던 습관이 밖에서도 엇비슷하게 이어졌다.


  마포로 오면서 자연히 경계심이 줄었다. 서울역과는 사뭇 다른 풍경과 쾌적함이 단숨에 시야에 들어왔다. 대신에 밖에 나서기 전 행색을 자가 진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지나는 사람마다 편안한 생활복도 마냥 섞어 입지 않고 골라 나온 태가 났다. 또 사방 어디로 발길을 정해도 풍족함이 넘쳐흘렀다. 이사를 온 지 일주일 만에 편리함과 안락함에 도취되어 과연 사람은 올라가기는 쉬워도 내려가는 건 자의로는 불가능하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코로나에 옆구리를 갉아먹히는 부류는 서민 혹은 빈곤층이었다. 특별한 계기로 마포의 신축 아파트에서 잠시 기거하게 되었어도 내 집이 아니기에 그저 편한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다가 서울역 근처 원룸에서보다 배로 드는 생활비가 실재하는 가장 큰 부담이자 현실이었기에 휴직 중이던 상태를 급히 구직 중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사는 집과 그곳에 사는 나란 사람의 막대한 괴리가 코웃음을 치게 한다. 동생이 결혼식 하객으로 입고 갈 옷과 구두를 사러 근처 쇼핑지구로 나섰다. 저렴한 보세 신발가게 사장님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손님을 맞았다. 대학가 쇼핑 골목에 위치한 신발가게 안에는 환한 조명 아래 주인 없는 신발들만 수백 켤레 진열되어 있었다. 십여 년 전에 이곳 유명세를 따라 친구들과 하루 날 잡고 쏘다닌 북적이던 대학가였는데 금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스산하리만치 한산했다. 주변 상가의 절반은 불이 꺼져 있고 임대 딱지를 써붙여놓기도 했다. 동생은 필요성과 의무감을 반반 가지고 구두 한 켤레를 구매했다. 이미 4,000원을 깎은 가격으로 주신다 하더니 사장님은 요즘 다들 어렵잖아요, 1,000원 더 깎아드릴게요. 하시며 신발을 포장해주셨다. 떠날 때는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우렁찬 목소리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셨다. 신발가게를 들르기 전에 거쳐온 옷가게의 점원마다 상냥하고 친절했다. 고작해야 만 원, 이만 원, 삼만 원 팔아주는 손님으로선 분에 넘치는 깍듯함이었다. 그러곤 내 집이 아니나 어쨌든 살고는 있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자동화가 생활화가 된 갖은 편의와 혜택이 집안 곳곳에 세심하게 깃든 고급 아파트에 들어서자 수많은 가치판단과 의미와 의의와 정서가 동요를 일으켰다. 이곳에 살게 된 이유가 뭘까? 이런 곳에 살게 된 의미는 뭘까?


  마포로 이사 오기 전에 동자동 쪽방촌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방송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재개발로 선정되어 한창 이슈를 모은 그 동자동 쪽방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극 사실적인 현실이 낱낱이 드러났다. 10살짜리 아이 두 명이 서로를 꼭 껴안고 누우면 딱 알맞을 좁은 창고 같은 방에서 십여 년을 살아온 어느 경비 아저씨의 사연이 여러 사연 중 하나였다. 아저씨는 주무실 때 허리와 다리를 오그리고 누웠고, 끼니는 복지기관에서 나눠준 부실한 도시락 하나를 하루 동안 나눠서 드셨다. 우리 원룸에서도 종종 만난 적 있는 대왕 바퀴벌레는 걸핏하면 나타나 잠을 방해했고, 얇은 합판으로 된 대문 밖 복도에는 바퀴벌레 사체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화장실은 공용으로 사용했는데 역시나 더럽고 열악하기가 경악스러웠다. 어떤 아저씨는 노숙생활을 청산하고 간신히 쪽방촌에 방 하나를 마련해서 살게 됐는데 자기 몸 누일 집이 생겨서 가장 좋은 점 중에 하나가 허름한 식당에 가도 쫓겨날 걱정에 눈치 보지 않고 밥을 사 먹는 거라고 했다. 노숙생활보다는 한층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 볼 수도 있다만 그래 봐야 쪽방촌이었다. 쪽방촌 사연 다음으로는 공공 임대 주택에 사는 차상위계층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짧게 간추리면, 빈곤층을 위한 정부의 주택 사업이 치밀하지 못해 주거지만 제공받을 뿐 생활의 개선이 될 만한 일자리나 각종 구제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서 주민들의 삶의 질은 갈수록 끝도 없이 하락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자살 기도자만 늘어가는 실정이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주민들은 소일거리도 찾지 못해 낮부터 아파트 단지를 어슬렁거리며 서로 한담이나 나누고 절망만이 남은 구차한 삶을 넋두리하는 것이 다였다. 서로 누가누가 불행한가, 누가 더 고약한 인생인가 경쟁하듯 재보다 보면 모두가 진이 빠지고 마는 위태로운 화젯거리였다.


  사람의 피부와 눈빛과 걸음걸이가 그 사람이 사는 집에서 만들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마시는 물과 숨 쉬는 공기와 살갗에 닿는 옷 섬유의 질감과 거기 모여사는 사람들의 기운이 그 동네에 속한 모든 이웃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떤 터전에서 보내는 세월이 축적될수록 우리 몸과 마음도 차차 그곳에 동화되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이 동네마다 우울감과 슬픔과 힘겨움이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펼쳐지고는 있었다. 부족함이 있든지 없든지 저마다의 인생은 나름대로 보상을 필요로 하는 순간순간을 이겨내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동자동 사람들과 마포 고급 아파트 숲에 사는 사람들의 괴리는 혼란과 부당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을 가중시켰다. 반지하방에서는 숨어 살던 기분이었는데, 고층의 아파트에서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자그마한 미니어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란 사람은 이곳도 저곳도 있을 곳이 아니라는 이질적인 존재감만 선명해졌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곳에서 동자동 사람들이 낙후된 쪽방촌 생활에서 얻는 자기만족이나 공공 임대 주택 단지를 배회하며 나아질 도리가 없는 미래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계층 밑바닥 사람들의 무가치감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 어디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디에서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걸까? 우리는 현재 어디에 내몰려 살고 있을까? 삶에서 집이란 얼마만큼 의미가 있는 걸까? 계속될 미래를 계획하느라 고심하는 사람과 당장 오늘을 먼 과거와 대조해도 다른 그림 찾기보다 더 달라진 구석이 없는 그런 인생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평소에는 아무도 그러한 공존을 체감하지 못한 채 자기 생활의 테두리 안에서 습관적으로 살아가기만 할 뿐이다. 하나같이 위중한 인생사를 짊어졌기에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쁘다. 서울역을 떠난 나도 곧 그곳 생활을 잊어버리고 타성에 젖은 시간들을 지나쳐 보낼 것이다.


  그러나 민감한 시선을 도태시킬 생각은 없다. 집은 잠시 몸이 거쳐가는 곳, 마음은 한 공간에만 제한적으로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 각기 다른 수많은 사람과 촘촘한 계층과 세밀한 사연을 오히려 내 마음이 집이 되어 품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어디에서 사는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잊지 않고 매일 저녁 기도하고 나의 혼란과 동요를 잠재울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가치관을 위해 성경을 읽는다. 단지 이상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고, 그다음 현실을 초월한 마음가짐만이 유익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새 길을 열어줄 것이다. 세상에 잠시 머물다 나그네 인생을 살며 가장 낮은 내려가기를 자처하는 삶을 살게 본격적으로 집으로 사람을 논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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